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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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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9일 18시 50분 등록
* 가족의 신임 얻기


세상의 여러 많고 많은 일들 중에 그래도 환자들을 돕는 보람된 일을 하는 것만도 다행이고 그 좋은 일을 하며 월급을 받는 것도 감사하단 마음이 들었으며 적은 봉급이나마 가족을 위해 고기 근이나 사들고 들어갈 때에는 정말이지 가장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러면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로구나 하고 알게 되었고 함께 맛있는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저축을 위해 일체의 낭비를 줄이며 생활에 임하고 평소에 관심에 두던 것들을 찾아 공부를 해 나갔다. 또한 보람에 비해 다소 적은 월급봉투를 고민하며 나름의 재테크를 위해 시간을 이리저리 내며 기반을 잡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면서 소박데기가 되어 처음 친정으로 기어들 때와는 달리 성과여부를 떠나 노력하는 자세만으로 차츰 가족의 신임을 되찾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내 것은 안 써도 가끔씩 만나는 조카들의 용돈만큼은 내 용돈이상으로 챙겨주며 지냈다. 그러한 사소한 일들조차 나의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덜 보시게 하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시집살이도 못하고 쫓겨 온 꼴인데 친정에 와 있는 것이 며느리들만 있는 우리 집에서 자신들의 역할 여부를 떠나 그리 달갑게 이해될 일만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내 도리를 철저히 해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환경이며 생활방식 면에서 친정과 전에 살던 시댁의 사고방식은 천지차이로 아들과 딸에 대한 편차가 극히 심했지만 그것을 다 이해해주기만 할 올케들의 입장도 아닐 테고 오나가나 늘 손해 보는 쪽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딴엔 서운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복이 그런가보다 하며 내 힘으로 사는 것이 떳떳하리란 걸 다짐해 가며 더 많이 노력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보다야 형제로부터 전혀 눈치가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열심히 투명하게 매사에 임했고, 내 생활 자체를 반듯하게 꾸려 나갔기 때문에 기죽을 일은 없었으며 그로써 내 가족에게서부터 먼저 당당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이점을 높이 사 주셨고 형제들 역시 고마워하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한 면에서 항시 내가 외로울 것을 걱정하시지 내가 능히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추호도 염려치 않는다. 그 믿음이 내게 얼마만한 큰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랑과 신뢰이며 위대한 유산인지 나 역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일은 딱 부러지게 확실히 하되 자존심은 잃지 않기

또한 일을 하면서도 자존심을 팔지는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는데 열심히 임하는 대신에 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거나 일에 비해 현격히 대우가 떨어지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각오와 자세로 임했다. 그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매달리는 법은 없었다. 옮겨 갈 때에는 대우가 나아지거나 환경적인 조건을 따져서 퇴근 후 내가 할 일들과의 조화를 살펴가며 조금이라도 편의와 보탬이 될 만한가 가늠하여 움직였다. 일테면 거리라든지 시간적인 요소의 안배 등과 잘 연계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다. 그래야 얼마간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계획한 목표를 달성해 나갈 수 있고 그것으로서 보람과 성취를 함께 누리며 내심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이고 의욕적으로 활발하게 일과 생활에 활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 해야만 하는 낮 동안의 고된 일상을 지나 나만의 선택적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며 나름 만족감과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자기계발에 혁신을 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두세 몫의 일을 감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성취하고픈 대학원 생활과 해보고 싶은 공부들을 찾아 즐겨 배우고 익히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획과 목표달성 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딜 수 있게 하는 나만의 유일한 위안과 힘의 원천으로 늦게까지 고달픈 일상의 일정들이 오히려 휴식과 안정으로 다가왔고,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고된 일상의 터널에서 나만의 즐겁고 은밀한 희열의 순간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나는 안다. 이혼의 상처가 전적으로 슬픔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는 것, 삶의 슬픔 가운데에도 계획과 운영 여하에 따라 기쁨과 느꺼운 충족감이라는 것이 스며들 수 있다는 것,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도 그 자체만은 아니며 그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나름의 행복한 요소가 잠재하고 깃들어 있다는 것, 죽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고 하는 옛 말의 의미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일을 하며 전적으로 내 입장만을 생각하거나 내세우지는 않았다. 가급적 이러저러한 사항들을 고려해서 절충을 해 나가려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늘 당장에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겸손해야 함도 되새기며 임했다. 인류가 사랑해야만 만사형통의 구원이 있다고 외쳐대는 성자들처럼 내가 나를 내려놓아가며 사랑하려 애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었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알아서 상대를 배려하고 제 할 일부터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안 되면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신뢰를 망가트리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다른 것은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여형제도 없는 처지에서 가까이 살거나 멀리 있거나 간에 누가 잘 모시고 못 모시고는 차치하고 내가 친정에 있는 것 자체가 자칫 기생하는 꼴로 비춰지는 것을 한편으로 경계했다. 사실 내 이혼의 많은 요소가 시누이가 가정 경제를 완전히 빼앗아 가져가고부터는 더 이상 볼 것이 없어졌던 것처럼 고작 친정에 들어와 더부살이 하는 꼴로나 비춰질 것을 가장 경계했고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가장 경멸하는 삶을 똑같이 재연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겨우 그런 모습으로나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는 이만 못한 오명이 될 것이고 ‘너도 별수 없지 않느냐’ 라고 하는 식의 꼴불견에 지나지 않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기에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철저히 명심하였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아니 삶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결코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맹세의 맹세를 거듭하며 마음을 단호히 다스려 나갔다.

<결혼 전 우리 집은 다소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시가 또한 분리해서 살 수 없는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경제권 자체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아 늘 마음 불편하게 살아야 했고 아무리 보살펴도 늘 경제권을 둘러싼 원성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월급 일체를 내놓고 타서 쓰면서 살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될뿐더러 시어머니도 아닌 시누이가 남편의 월급통장을 관리하려 든다는 것 자체부터가 몹시 마음 상하는 일이었기에 몇 달이나 기다렸다가 받은 것을 절대 도로 내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남편이 내게 자주 이리저리 거짓말로 둘러대고 시댁이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삶의 여러 기반을 다 잡아준 상태에서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깔끔하게 완전 분리를 위한 목돈까지 안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외로 매달 일정액을 생활비조로 더 보태고 있는 실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도 부모형제가 있는 터고 그러한 것까지 관여할 만큼 야박하게 살지 않았다. 문제는 오히려 그쪽에서 시침을 뚝 떼고는 언제나 나만 호강에 젖어 사는 양 죄인 취급하거나 부당하게 몰아붙이는 면에 대해서는 울화가 치밀도록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자존심도 전혀 생각지 않을 수는 없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빠져 지냈건만 하늘을 찌르는 가당치 않은 욕심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후에 그 역시도 자기도 할 만큼 했고 도무지 해갈이 안나 힘에 부치노라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성과 관행대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기보다 또 속절없이 주저앉게 되고, 한편으로 무거운 어깨를 진 이면의 보람된 삶의 한 의미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가족 관계에서 순위를 매겨 놓고 사는 듯한 그에게서 그의 월급봉투만은 그가 나를 신임하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통장 관리는 생활비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나는 한사람의 아내와 세 아이들의 어미로서 내 방식과 내 계획 아래 우리들의 꿈을 성장시키며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지 설령 누가 나보다 훨씬 나은 경영을 하고 잘해 크게 보탬이 된다고 해도 싫었다. 나는 의당 가져야 할 마땅한 내 생활태도를 확고히 지니고 싶었고 내 천복과 내 지복과 내가 생각하는 내 복만으로도 깜냥 것 잘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도 나는 수입이 될 만한 일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성격이 맞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만 많이 벌어 거들먹거리며 잘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며 최소한의 일의 질도 가려 선택할 줄 아는 고집스런 면이 있기도 한 나름 심지와 의지가 강건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무와 결탁하여 호심탐탐 기회만 엿보며 이익만을 누리려는 삶이나 겉으로는 의리를 가장하며 속으로는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려 드는 엉큼한 이율배반적인 습성을 지닌 그러한 비성숙한 인간관계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단호히 배척하고 배격할 줄 안다.>- 이 부분 빼버리려다 나중에 어느 부분에 혹시 필요할까 해서 끼워둠. 글을 쓰다보면 왜 이리 원망이 되살아나곤 하는지... 이것을 없애기 위해 현재의 글쓰기를 계속행야 함. 그칠 때까지! ^-^*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내게 맡겨지는 일과 직업관에도 항시 일관성을 띠며 고스란히 나타났다. 나는 내게 맡겨지는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다. 병원 경영과 고객인 환자의 입장 양측을 늘 고려하며 내가 해야 할 마땅한 역할을 찾아 나갔으며, 내 치료실은 내게 맡겨진 자율권 안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일체를 관리해 나가는 시스템방식을 구가했다. 그러기에 누구 밑에 있으면서 대강 요령이나 피우려드는 식의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새로운 직장에 취직해 들어가게 될 경우 몇 달간 원장이 나를 써보고 고용의 지속여부를 판가름해도 좋을 만큼 배짱과 확신 하에 맡은바 임무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고 그러기에 내 구역 내 관할에 대해서는 자율권도 쥐어야 했다. 나는 환자들에게도 건성으로 비위나 맞추며 요령껏 슬렁슬렁 치료를 하는 여우같은 치료사는 되지 못한다. 내 치료실에 들어온 이상 내 책임과 관리 하에 치료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환자가 나보다 기가 셀 경우는 내 치료를 다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곤 하였다. 최선을 다해 역지사지의 입장을 따져가며 근무태도를 보였다. 환자의 입장이 되어서 바쁘고 힘겨운 일상 가운데 짬을 내가며 굳이 내원해 받고 싶은 치료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하며 치료에 임했다.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늘 힘은 들었지만 누구에게나 떳떳할 수 있었고 당당했다. 또 그렇게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공부를 병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치료실 분위기 또한 주위의 다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최대한 편안하게 휴식과 안정을 통한 상호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모했다.

무슨 일이나 그렇지만 일단 타성이 붙기 시작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머물고 만다. 우리 업계의 경우 사실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은 학회나 선후배 혹은 병원의 의사와 의료기기업자들로부터의 신기술과 지식 정보가 전부가 아니다. 가장 정확하게는 오히려 내원해 드는 여타 지역사회의 환자들로부터 일상의 사소한 하나하나를 다 세세하게 전해들을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옆의 건물에 어느 병원이 들어왔다고 해서 그 병원의 운영 시스템과 직원 관리에 대해 그리고 시술 방식 등의 노하우를 어떻게 우리가 속속들이 알고 대처해 나갈 수 있겠는가? 단호히 없다. 그 병원은 어떤 식으로 운영을 하며 원장의 특기는 무엇이 전문이며 무슨 기계로 어떤 치료를 하고 얼마만한 효과가 있는지 등은 그 병원을 내원하는 고객인 환자에게서 보다 확실하게 전해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저 환자에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앉아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접할 수가 있고 그 정보는 생각보다 매우 귀하고 정확하다. 어떤 기술 무슨 효과이든 대상자보다 더 정확하게 느끼고 감지하는 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단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거짓 정보를 흘릴 확률이 적으며 최 말단의 가장 강력한 서비스의 수혜 대상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의사나 치료사보다 여러 병원에 대해 다양한 경험과 선택권을 가지고 야무진 비교와 평가를 하는 최적의 막강한 당사자들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음이다. 이들의 느낌과 이해보다 더 정확한 판단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정보들을 나를 찾아 치료를 받는 환자들을 통해 수집해 나가며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일선에서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하는지 등의 윤곽이 잡혀지게 마련이어서 나는 이 점을 항시 중요하게 생각하며 내가 속한 곳의 차별화를 모색하고는 했다. 나의 장점은 편하게 해준다는 것이고 치료시간이 환자에게 안정과 휴식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환자가 웃으면서 편한 마음으로 드나들며 속내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수습해 나가다

그리고 우선은 하고 싶은 일보다 내 상황에 맞는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부터 찾아나갔다.
일의 순서를 정해 목록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딴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선후를 가리고 우선 당장에 처리해야 할 일부터 수습을 하는 식이다. 일테면 상의를 할 것이 있으면 찾아가 직접 상의를 하고 생각할 것이 있으면 생각할 시간을 갖으며 처리할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 처리를 해 놓고 본다. 하다못해 관공서를 가는 일이랄지 기한을 넘기지 말고 해야 하는 서류적인 사항 등과 앞으로 일과 공부를 병행할 것인지 일만 할 것인지의 계획, 어떤 일들을 할 수 있고 무슨 조건을 필요로 하는 지 등을 사전에 점검하는 것이다. 시간과 발품을 팔아야 할 그 정리가 대충 끝나자 당연 생활인으로서 취직자리를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나를 하나의 상품으로 객관화 시켰을 때 내 가치가 얼마인가를 생각했고, 남이 매기는 값의 현주소를 파악해 가며 장차 나라고 하는 상품의 가치와 질을 향상시켜나가기를 노력했다. 나의 이력과 결과가 된 지난 시간에 대해서도 냉정히 고찰하며 과오와 불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철저히 실패를 인정하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 시작하는 자세로 임했다. 한시적으로 얼마간은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보리라 다짐했고,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완제품이 생산되어 나오는 상품처럼 반드시 산출물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애썼다. 사무침이 커서인지 그때만 해도 그나마 건강이 따라주어 하루 종일 일하고도 저녁 식사할 겨를 없이 자기향상을 위해 공부한답시고 여기저기 천지사방으로 온대를 쑤시고 다니며 필요한 사항들을 보충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혀 힘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어라도 쌓이고 늘어갈 수 있도록 가시적이고 증명이 될 만한 것들을 획득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그래도 불면의 밤은 수없이 찾아왔고 울지 않고 잠든 날이 없이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지언정, 목이매이고 힘에 부쳐 허리가 꺾이면서도 꺽꺽 대며 계속해서 일상을 멈추지 않고 진행해 나갔다. 오직 그것 이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확실하게 옳았다. 이렇게 나마의 오늘의 토대는 지난 10년 동안의 억척의 생활에 근거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왜 최소한 10년간은 열심히 한 우물을 파며 전문성을 키워나가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하는 지 체험으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재능, 꿈, 자기계발 이런 근사한 용어들을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재능이란 것이 다 무엇인가. 꿈이란 어떤 것을 이름인가. 자기계발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모든 의미들은 사치스럽게 지금에 와서야 붙여지는 한갓 허울 좋은 장식에 불과하다. 그 반반한 생각들은 당시 내 생각 안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여유롭게 느껴지지 않았고 생각이란 것이 미치지도 못했다. 나는 온통 슬픔 속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울어도 울어도 그치지 않는 장대비처럼 주룩주룩 멈추지 않는 서러움만이 내 정신과 육체 가득히 봇물 터지듯 퍼부었다. 밤이면 밤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피곤해 하면서도 잠을 못 이루고 울다가 지쳐서 겨우 잠들곤 했다. 자고나면 매일 눈물로 얼굴이 부어있었다. 잠시 잠깐 동안의 한가한 어느 결에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복잡한 지하철 속에서 조차 주르륵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대화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울음 그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말보다 흐느낌이 먼저 새어나왔다. 지금은 많이 잦아들었지만 1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울음그친 뒤의 그 울먹거림이 온몸에 세포처럼 들러붙어 으흐흑 하는 흐느낌을 자주 토해내게 되곤 한다.


* 몇 가지 기준을 간략히 세우고 분명히 하다

나는 다만 몇 가지 기준을 분명히 했다. 오랜 투쟁적 시달림으로 우선 몸이 많이 쇠약해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일단의 상황 종료! 와 더 이상 어쩔 도리 없이 막판까지 온 것이라는 일종의 안도감에 피로가 몰리면서 몸이 아파왔기 때문에 우선 몸부터 추슬러야만 했다. 그래야 일도 할 수 있고 계획을 세워나갈 수 있었다. 내 사전에 이혼이란 죽음과도 같은 선택이었고 죽으려는 생각으로 임했기 때문에 떠나보내고 떠나올 수 있기도 했다. 다시 삶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며 사치와 허영 따위의 마음은 없었지만 이왕에 다시 삶을 선택하는 거라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애시부터 재혼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그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이혼녀로 살아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나 그들이 보기에 이전보다 불행해 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강박 같은 의식이 들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전의 삶보다 초라해 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일도 예전의 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왕에 해야 하는 일이라면 미친 듯 뛰어들어 단시일 내에 가장 외향적 성공의 잣대라 할 수 있는 돈이 되는 무슨 일이건 해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임시방편으로 얄팍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가 다시 삶을 선택한 이유, 그 집 귀신으로 족보에라도 올리고 죽어야 훗날 내 자식들의 정체성과 어미의 원통함을 알기라도 할 것 같았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죽은 귀신이라도 구천에서 떠돌다 헤매면 너무 야속할 것 같은 애처로운 참담함을 뒤로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때부터 어쩌면 경계境界에서의 망설임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서 오히려 나를 협박하듯 내밀던 이혼서류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허탈함에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그 모멸의 순간순간들을 시시각각으로 겪을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애간장이 타들어갈 만큼 울분과 치욕을 느꼈지만 죽음을 생각해대던 이런 저런 생각의 마지막 단계의 변경邊境에서 생명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건진 단 두 가지 가장 절실한 삶의 이유마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만 해도 원통하고 절통함으로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쳤다. 어느 누가 더하고 덜 할 것 없이 똑같이 소중했다. 그래도 내리 사랑이라 어린 자식 생각이야 더 하지만 그것은 부모님을 미더워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심적 토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면 당장에 가장 슬퍼할 사람은 부모님이었고 내가 눈을 못 감을 이유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이들 두 입장을 헤아려 생각을 해가며 일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욕심보다 올곧으며 가족들이 납득하고 찬성하는 조신한 일을 찾아 해야만 했다. 무엇이건 되고도 싶었지만 자칫 그릇된 욕망으로 치달을 수 있을 내가 모르는 나를 한편으로 또 경계警戒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에 치를 떨며 생사를 결정하려던 그 귀로에서 가장 진실한 의미로 다가오며 살아야겠다고 하는 참다운 이유가 되고,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가의 당위성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아이들과 부모님이 중심에 자리했다. 이것만이 생사를 방황하던 최후의 심연에서 끌어올려 나를 지탱케 하는 가장 유일한 근원적 희망이요 처절한 생명의 끈이었다. 그렇다. 나는 수직으로 관통하는 사랑에서 생명의 힘을 끌어올렸다.

당시 나는 한편으로 내 스스로가 나를 신뢰할 최소한의 힘마저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와의 결혼생활 불과 5년 동안에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자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에 이전의 30년 세월은 어디론가 감쪽같이 공중분해라도 된 듯 날아가 버리고 없는 상태였다. 결혼 전 나와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자주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고 지냈던 당시 20년 지기 동창 하나는 그때의 나의 상태를 목격하고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하면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고 기막혀했다. 유년시절부터 무척이나 명랑한 성격에 활기찼던 모습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주눅이 들어 생기를 잃고 말았고, 자주 깜짝깜짝 놀랐으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이 불안해하는 것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었다. 한집안의 가족의 일원으로 신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자괴감과 내 생각은 무엇이건 모두 틀렸다고 하는 5년 동안의 세뇌작업과도 같은 공감의 불일치한 환경 속에서 어느덧 늘 그들이 주장하던 말대로 내 판단은 모두 틀린 것만 같아 이제는 내 자신조차 나를 신임할 수 없는 불안한 지경의 심적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혼이 말해주듯 불합리한 일상과 오래 유기와 같은 방치에 시달리다보니 심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급기야 나도 내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고 확신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내 의지와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이 오직 실패와 낙오자라고 하는 냉혹한 현실만이 남아있는 우울한 자화상이었다.


* 스스로를 치료하며 건강부터 챙기다

그러기에 관조적으로 나를 투시하기보다 당장에 해결해야 하는 일부터 순서를 매기면서 바쁘게 찾아나갔다. 한갓지지 않은 상태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혼 직후 친정에서 쇠약해진 몸부터 추스르려고 할 때 긴장이 풀려서 인지 갑작스레 허리 병이 찾아들었다. 한동안은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었고 치료를 받으러 가는 일조차 힘이 들어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앉지도 서지도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가며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번개가 번득거리듯 쩌릿쩌릿한 허리 통증과 뼈마디가 딱딱 갈라지는 듯한 천둥쳐대는 것과 같은 증세로 설설 기다시피 했다. 심장은 무거운 바위 돌로 가슴팍을 짓누르는 듯한 가슴통증을 유발하며 목구멍까지 묵직하게 말뚝이 박힌 것처럼 먹먹함과 함께 꺽꺽 눈물 참음과 눈물 터짐으로 헐떡거렸다. 의사는 쯧쯧 혀를 차가며 차라리 마음 놓고 울라고 하며 자리를 비켜주고는 했다. 온몸의 살갗이 예리한 칼날처럼 모조리 날이 서서 의사의 손이 닿거나 바늘이 내 몸을 살짝만 건드리기만 해도 너무 아파 자지러지고는 하였다. 신경이라고 하는 신경은 모두 벌떡 일어서서 모든 외부세계를 거부하는 듯 잘금잘금 오줌이라도 지릴 것같이 온 살갗이 다 아프고 온몸의 기가 하나로 다 통하기라도 하듯 특히 질에서 심장까지가 일직선으로 찌리리 전기 충격과도 같은 통증을 유발하며 가슴까지 쩌릿쩌릿 타고 올라왔다. 나는 지금도 이 증상을 가지고 있고 내가 여태까지 만난 의사들은 이 호소를 제대로 확실하게 규명해 주지 못한다. 나의 증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고, 나는 몸이 피곤할 때나 신경 쓰는 일이 있을 때 자주 이 현상을 느끼고는 한다. 그럴 때면 나 자신은 이 증상의 신호를 알기 때문에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조그만 자극에도 아주 날카로워지고 극도의 피곤에 쌓여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창백해지곤 한다.

그래서 싫지만 우선은 예전의 직업으로 돌아가 병원에 취직을 해서 내 몸부터 치료해 가면서 환자들을 돌보며 서서히 다음 할 일들을 준비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이는 것을 대신해 내 마음을 차분히 다져가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지를 굳게 가졌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수첩은 내가 해야 할 일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첩을 열어보며 체크해 나갔다. 그날 해야 하는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매일매일 확인했고, 가계부 따위도 아울러 함께 적어가며 허리띠를 최대한 왕창 졸라맸다. 부모님의 배려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되고 가급적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나의 경제적 자립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머지는 오직 이 두 가지 신념을 지켜나가는 일을 위해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 외의 것들은 완전히 차단시켜 나갔다. 복장 하나 태도 하나에서 조차 빈틈없이 정조대를 차듯 바싹 조였다. 하다못해 옷도 바지만 입고 다녔고 혹시 모를 어떠한 사태에도 대비 하듯 속옷도 함부로 벗을 수 없는 까다로운 옷으로 챙겨 입었다. 심지어 활동적으로 치료를 하다보면 땀에 안경이 밀리고 더운 습포로 치료하거나 할 시에는 습기가 차는 등 안경의 불편함 때문에 라식 수술을 고려하면서도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끼를 억제하기 위해 혹은 외부의 불경스러운 것을 차단하고 살듯 안경으로 나의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제한적으로 보며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적 연상까지를 해가며 살았다. 하다못해 이러한 작용도 그와 살 때 그가 내게 해대는 말들에 은연중 인이 박혀 염두에 둔 처사이기도 했다. 내가 맹목적인 데가 있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느 놈 꼬임에 잘 넘어갈 수 있다고 하는 염려인지 악평인지를 하도 들어온 터라 말이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과 꼭 필요한 우선순위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투자해 나갔다. 내가 처한 상황이 싫어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아 교류는 하지 않았지만 자격증을 위한 학원비라든지 새로운 기술들의 정보에 대한 협회활동 등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은 취해 나갔다. 그렇지 않고는 나를 향상시켜나갈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싫든 좋든 불가피하게 해 나가야 하는 일이었고,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기본적인 성향이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내적 교류만 없을 뿐이지 외적으로는 잘 어울렸다. 다만 마음을 터놓고 지낼 만한 분위기는 스스로가 피하며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 때문인지 집착 때문인지 나의 이혼에 대해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상황으로 받아드리기도 했고, 한편으로 생이 남아있는 한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이 늘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던져두고 기다림을 선택해 들어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다만 간섭을 받아가면서는 내가 독립적으로 임할 수 없다는 것을 결혼생활을 통해 절실히 알았기 때문에 그와의 개별적인 연락조차 갖지 않으면서 단호히 완전한 혼자가 되어 내 의지대로 살아가며 자립을 성취해 내고 독립심을 키워 보고자 이를 악물었다.


* 아홉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열 가지 일도 한다

9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10가지 일도 한다는 말은 지극히 일리 있는 말이다. 일을 해보면 안다. 일단 부딪쳐가며 하다보면 문제점도 생기고 정보도 교류하게 되며 더 나은 점들을 모색해 나가게 된다. 안목이 트이고 여러 가지 고충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기도 하며 미처 생각지 못한 의외의 도움과 나눔을 공유해 가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사회생활이고 살아가게 마련인 이유인 것이기도 하다. 물론 잘되기만 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라는 속담과도 같이 무슨 수가 나도 나게 되어있고 솔직히 안 해서 그렇지 일이 없다는 것도 사치스러운 구실이 아니겠나. 정말로 당장에 밥을 굶는 상황이라면 못할 것이 뭐가 있고 죽을 작심을 한다면 해보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으며 겁내며 망설이고 자시고 이유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게으름에 불과한 것이요 한낱 어불성설語不成說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일을 해서 성과가 생기면 재미가 나고 또 생각지도 않게 부수적으로 연결 되어 좋은 기회를 덤으로 가지기도 하는 등, 하다보면 의욕에 차서 많은 일도 시간을 아껴 쓰며 더 잘하여 더 나은 성과를 올리게 된다. 그러면 본인도 신명이 나고 보는 사람도 그 사람의 여유로운 상태가 믿음직하게 느껴져 더 많은 일을 맡기게 되어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일을 하는 사람이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도 더 많은 일을 잘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방 칸이라도 얻어 독립하려 했던 얼마간의 자금을 몽땅 털어서 최대한 하나로 뭉쳐 목돈을 만들어 서툴지만 있는 대로 발품을 팔아 일단 최대한 전세를 끼고 집 하나를 과감히 사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혹은 자존심등을 내세워가며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한 마음들을 참지 못하고 불쑥불쑥 내질러 회사를 뛰쳐나온다거나 친정살이조차 조신하게 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고 싶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두었다. 아닌 말로 그동안 숙맥으로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살다가 이판사판 자포자기 심사로 혹시 언놈에게라도 꾀여 바람이 나거나 급한 마음에 얼른 한몫 챙기겠다는 심사로 멋모르고 덤벼서 투자랍시고 한다고 설치다가 그나마 홀라당 들어먹기 일쑤이기도 하며, 정신 못 차리고 우선 편한 것만 취하며 되는 대로 살아가다가 어처구니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단단히 경계經界를 늦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사전에 이혼이란 없다’라고 하는 신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별 수 없이 이혼녀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일에 대해 그리 장담하고 산다는 것이 무색해 진 까닭이고,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못 견디고 집구석을 뛰쳐나왔다고 하는 인식의 저편에 바로 내가 서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이혼 했데’ 라고 말하기보다 ‘이혼하고 나왔데’ 라고 하는 ‘나왔데’를 꼬리에 함께 붙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혼하고 혹은 못 살고 뛰쳐나왔데’ 라고 말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의미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구 만들어가며 붙여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주 하찮은 의미로 비하하며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전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마구 남발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말이다. 심지어 이혼이라는 현상과 상황에 대해 마치 판단의 권리라도 가진 듯 취조하는 형사가 되기도 하고 죄인 나무라듯 가볍게 자신들이 지어낸 추측성 상황에 끼워 맞추기도 하는 등 오버하며 단정하기를 서슴지 않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유년의 명랑 쾌활함을 잃고 근 10년간 벙어리 냉가슴이 되어 침묵 속으로 젖어들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사교대신 일과 공부를 택하며 혼자 살아가는 방법과 나름의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도 그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우선 바쁘게 움직인 것 자체는 시름을 잊어야 하는 나의 형편과 나를 지켜봐야하는 가족들의 시선에도 나쁘게 작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좋든 싫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양적인 일로서 24시간을 투명하게 운영하며 한가할 틈을 없애고 적응력을 키워나가려고 애쓴 흔적들은 내 상황에 어긋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 더 부가가치 높은 일로서 다소 한가로움을 갖지 못한 것은 일로 하여금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항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반하며 걱정스러운 일면이 있기도 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전공이 그러하니 별수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의욕하며 성격상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생활인으로서 모색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된 점도 없지 않았다. 하여 그 기간 동안에 서툰 점도 당연 많았지만 그러한 가운데 새로이 진지하게 배워나가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던 점은 다행으로 생각된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딴의 노력들이 애처로운 한편 소중한 경험의 자산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사람이란 언제나 열심히 땀만 흘리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의욕이란 것도 아무 때고 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에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고 절실히 느낄 때 공연히 시기 따위를 따지며 주저하기보다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여 많은 성과들을 올려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안타깝고 미흡하나마 어려운 시기를 책임감 있게 헤쳐 나가고자 했던 바른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그리움과 함께 애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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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8.07.20 10:16:48 *.174.185.26
오랜만입니다. 누님.
글이 점점 변해가네요, 책으로... ^^
동생은 태풍도 신경써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하고 그런 와중에 비전은 흐릿해지고... 쩝

누님이 정조대 차듯 마음가짐을 다시 조인 것 처럼 저는 입에다 자물쇠라도 채워야 할까 봅니다. 이 나이쯤 되면 직장에서도 중견인데 도무지 끝이 안보이네요. 제가 보기엔 잡다한 것들인데 BOSS 눈에는 그게 젤로 중요하다니 원... 제가 딸랑 딸랑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 봅니다. 헤~

누님 글 계속 써내시는 거 보면 제가 다 배부릅니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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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
2008.07.20 14:49:50 *.52.236.169
다시 쓰시네요. ㅎ



어떤 의미에서 여백은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몰라요.

조금은 비워두었다가,

간간히 시를 쓰기도 하고,

원망도... 절망도...

그러다 피식, 다시 웃음 짓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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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2008.07.20 16:20:30 *.133.22.173
써니님! 한번도 뵙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나의 일인듯 계속 눈물이 나는군요.
1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자신을 해방 시키세요.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 마무리되면 아마 어느덧
저만치 초월해 있을겁니다..
과거에 발목 잡혀 있지말고 지금 이순간 하루하루 온전히
충만하고 기쁘시길요... 아마 그러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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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21 06:47:11 *.36.210.11
형산 아우, 자네 배가 부르면 내가 낳나? ㅋㅋㅋ


개구쟁 님

'이'는 어디로 갔죠?

기다렸지요. 사라졌나 하면서



님의 여백 의미있어 보이네요.


정원님, 뭐라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영 딴판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면서( 마음 껏 노는 것과 제멋대로 쓰는 것에 대해 둘 다에 대한 양심적 방황이 들기도 합니다. 발뺌 같은 것일 지도 모르겠구요. 사실 밉다고 쓰는 것이 다 미운 걸까 하는 가슴 한켠의 알 수 없는 정이랄까 연민이랄까 상념이랄까 하여튼 미움이 미움만은 아니라는 역설에 대해 또 써야 할 것 같아요... 복잡하죠? )

관심 갖고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들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시작한 일이니 길을 찾아 가보렵니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군요. 무사히 좋은 한 주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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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
2008.07.21 17:30:16 *.132.197.114
써니님의 글을 읽는 동안 계속 제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습니다.

마치 감정이입이 된것 마냥 내 자신의 삶인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뭐라고 표현을 하지 못하지만, 좀 더 뚜렷한 삶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님의 글에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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