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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4일 09시 22분 등록

2008년 5월, 이번 여행은 4박 6일간의 일정으로 짜인 패키지 상품이다. 인천공항에서 저녁 7시 반 비행기로 출발 1 시간차가 나는 중국 계림 지역에는 현지 시각으로 10시 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4시간가량 소요되는 것이다. 애시에 여행에 관한 모든 것을 작은 올케가 알아서 관리한 바람에 그냥 편한 마음으로 꼼꼼히 준비하지도 않은 채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하였다. 관광은 어머니에게 맞추어 너무 힘들지 않게 산수를 유람하고 올 수 있는 곳으로 계림, 용승, 양삭 등의 지방을 관광버스로 이동하며 절경을 둘러보는 여행지를 계획하였다.

모처럼 만의 해외여행에다가 노모와 단 둘이서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우리는 당황하지 않기 위해 미리부터 서둘러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인솔자는 매우 고단해 보였고 주로 젊은 층을 인솔하여 다녔는지 대충대충 일정에 대해 시덥잖게 이야기를 마치며 특이할 만한 사항도 없다는 듯 대강대강 자신의 할 말만 서둘러 끝내고 마니 어머니는 “네가 따라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라도 못 갔겠다.”고 말씀하신다. 일이란 늘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가끔씩 혹은 자주 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전문적인 일이 아니면 간과하게 되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에 모처럼 만의 여행을 나서는 이들에게는 차분하고 자세한 반복적 설명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연령층이 높을수록 그리고 출장 등을 잘 다니지 않는 주부 참여도가 많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리라고 본다. 딱 부러지는 명확한 음성도 아닌 인솔자의 말은 그래서 처음부터 알아듣기 쉽지 않아 약간 걱정이 되었으나 현지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따로 나왔고 가는귀가 약간 잡수신 어머니는 당신 자신의 핸디캡이 걱정이 되었는지 일부러 가이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비교적 연세 높으신 분들은 앞자리를 선호해 우리 일행은 암암리에 그리 배려하였다.

시차가 한국보다 1시간 늦게 가는 중국은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10시 반쯤 되었고 짐 찾아 나오니 11시가 되어 우리는 곧바로 숙소인 계림 프라자 호텔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고 이내 취침에 들어갔다. 불과 비행시간은 4시간 밖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미리부터 짐을 싸서 일찌감치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비행기에 오르다보니 낮부터 관광을 한 사람처럼 고단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투숙할 호텔의 방 키를 받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는 이내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4성급 호텔이라면 인터넷이 되는 지 여부부터 살폈으나 로비라운지까지 나와야 할 수 있다고 하길 레 마음에 약간 갈등을 느끼면서 이참에 아편 중독(?) 같은 변.경.연에 대한 관심을 살짝 끊어볼까 하고 마음먹어보기로 한다. 사실 이참에 조용히 사라져 보고픈 마음으로 로밍서비스도 신청하지 않고 떠났다. 그런데 오다보니 전화가 절로 되었다. 요즘에는 중국 정도의 거리는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통화가 가능하다나. 그래서 상대방에게 요금이 많이 나올까봐 서둘러 끊으라고 하고 충전기도 따로 챙겨가지 않아 되는 대로만 쓰고 말 심산을 한다. 룸에 들어가서 살펴봐도 도무지 어디에다 충전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그곳은 코드가 세계짜리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내심 안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한편 후회됨을 무마해 보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밍서비스를 받으면 코드 3개짜리를 대여해 준다고 하는데 그러기에 로밍서비스를 받아 나가야 한다고 한다.


< 집 떠나니 변.경.연이 그리워 뒤척이다 >

그런데 실상 전화보다도 변.경.연이 왜 그리 궁금하던지. 사실 나는 집에 있을 때면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부터 부팅 시키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부팅부터 한다. 그리고 무얼 하다가도 간간히 변.경.연 홈피를 들락거리기를 밥 먹는 것보다 더 집중하여 자주 들락거린다. 너무 자주 들여다보니 나 혼자 변.경.연 홈페이지를 독식하는 듯해서 내가 봐도 볼 상 사납기도 하지만 봤다 하면 참견하게 되고 글이 튀어나오니 담배를 끊는 이들처럼 아예 컴퓨터를 켜지 말아야 하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나고 어쩌다 글이라고 좀 써 보겠다고 컴퓨터를 켜면 좌판을 두드리기보다 이내 변.경.연 싸이트가 궁금해져서 먼저 들락거리기를 뻔질나게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꼴불견이 어디 있나. 들락거릴 양이면 조용히 눈팅이나 할 것이지 사사건건 참견하기는 또 얼마나 해대는가 말이다. 그래서 딴에 양심이 있는 지라 자중을 해 보려고도 하지만 그게 성격인지 쉽게 고쳐지는 병(?)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눈을 딱 감고 잊은 듯 모르는 척 외면해 보기로 작정을 해본다. 은근히 내가 없는 동안 변.경.연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를 궁금한 마음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기를 기대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여장을 풀고서 샤워를 마치고 나니 예의 그 변.경.연에 대한 궁금함에 언제 그런 생각을 하기라도 했냐는 듯이 또 마음이 달아올라 나갈까 말까 잠시 동안 서성이며 망설인다. 순간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하고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지에 온 첫날부터 나이 드신 어머니 혼자만 남겨두고 나가기도 뭣해서 그냥 눈 딱 감고 함께 자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그리 잠이 오지 않던지 원.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날 일정은 아침 6시에 콜해서 7시부터 1시간 동안 호텔 뷔페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 반부터 관광차에 올라타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행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잠이 안 오니 미칠 노릇이다. 두어 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는 서둘러 다시 짐을 꾸리고 단장하여 채비를 하고 나서니 가이드가 아침 인사를 하며 어젯밤 로비에 나와 인터넷을 하였는가를 묻는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이 안 된다고 안타까워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피곤해서 그냥 잤노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늦은 잠에 정신이 몽롱하기도 하고 아이 같은 노모까지 챙기면서 여행을 하자니 첫날부터 몰골이 까칠한 채 서둘러 이어지는 스케줄에 합류하기도 바쁘다.


* 여행지에서 생각해 보는 나의 습관과 성격, 글쓰기에 대하여

< 어설픈 글쓰기 >

인터넷과 상관없이 어떨 때 나는 한 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 흐름을 멈추기가 싫어서 그냥 죽치고 앉아서 써 내려가고는 한다. 말이 되고 안 되고 문제의 초점을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런 때에는 제법 긴 분량의 글이 쏟아져 나오곤 하는 데 그렇게 여남은 장을 계속해서 이어 쓰고 나야 무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쓰는 글 중에 간혹 제법 그럴싸한 글들이 튀어나오기도 해서 그 맛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어찌 보면 아직까지 완급 조절이 되지 않는 소나기식 퍼부어 대는 글쓰기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찔끔 깨작거리고 나면 괜히 무얼 하다 만 것 같아 찝찝할 때도 있고 무얼 한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아 시원한 맛이 없다. 그러니까 일테면 뜨거운 방에서 지지면서 땀을 쭉 뺄 때처럼 개운한 맛이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직 새벽 글쓰기가 인에 베이지 않아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필이 꽂히는 날 아무 검열이나 제약 없이 와르르 써재껴야 무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렇게 하고나면 조금 개운한 감이 들고는 한다. 그러다 몇 줄만 마음에 드는 글이 나와도 마치 전체 내용이 다 좋은 것 마냥 술술 폴리기도 하고 그게 잘 안 이어지면 공연히 헛심이 빠져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글 쓸 때는 그냥 글만 주야장천 쓰는 것이 좋다. 그때에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고용보험에 돈 타러 가는 날도 다 귀찮게 여겨지고는 한다. 좋은 친구가 불러내는 것도 사실 마뜩치 않다. 맥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연락을 받고나면 거절을 잘 못하는 편이기에 친구 따라서 강남 가듯 팔랑거리며 쫓아 나갔다가 콧바람이 들고나면 또 분위기가 먹히지 않아서 한참을 애를 먹거나 괜한 짜증을 일으키고는 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확 깎아버리고 몇 달이라도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처박혀 단숨에 쓰면서 끝장을 내고 오고픈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뭐 그리 대단한 글을 쓰는 사람이기나 한 듯이 말이다. 마음 한구석엔 언젠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렇게 한 번 실컷 살아보고픈 생각이 이따금씩 아주 간절하다.


<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고픈 고요함을 그리며/ 글쓰기의 어려움 >

그러면 스스로가 내가 지극히 홀로 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해볼 때가 더러 있다. 나는 범띠인데 범은 원래 홀로 어슬렁거리기를 좋아한다더라고 예전에 내가 울산 살 때 만신을 어머니로 둔 매일 통도사에 가서 삼천 배를 올리던 그녀가 스치는 말로 내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솔직히 그녀의 말이 근거 없는 소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 밑에서 있기보다 혼자서 조물조물 다 해치우고는 하는 성격이 없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무엇에 대해 생각을 좀 해야 할 때면 조용한 공간이 필요하고 외부 세계를 잠시 떠나거나 차단하고 싶은 욕구가 더러 생겨난다. 예전에 지방에 살면서 처음 신혼살림하며 김장을 할 때에도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서 배추를 사가지고 다듬고 절여가며 한 아이는 방에 재우고 한 아이는 등에 업고 혼자서 고물고물 다 해치워 버렸다. 평상시에도 아무도 없을 때 청소나 빨래, 음식 등을 장만해야 부산스럽지 않고 한갓진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하는 습관을 좋아한다. 일을 하면서 사방을 어지르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정신이 없어서 나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리정돈을 해가며 하지 않으면 일이 잘 되지 않고 거추장스러워서 짜증이 일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에도 공부하려면 책상정리와 방 정리부터 하고 봐야 책을 봐도 볼 수가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방이 대단히 비좁아서 쌓아두고 사는 통에 사실 마뜩치 않은 것을 몇 번이고 참으며 억지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럴 때면 나는 금방이라도 넓고 확 트인 공간을 향해 뛰쳐나가고픈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 찾아들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한쪽 구석에 처박혀 지내듯 이런 모양으로 사는 것은 정말이지 내 뜻과는 거리가 멀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 웅지가 서리기는커녕 쪼그라들고 도로 잠식해 버리고 말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이런 감정들을 억지로 누르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감정이 되살아나고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항인 것 같기도 하다. 지난봄부터 이래 저래 이런 현상이 밀려왔는데 주변 여건상 형편이 닿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거나 하면서 글쓰기에 대해 회의가 잠시 찾아들기도 했다.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말이다. 그게 잘 안되니까 짜증스러움을 억지로 참아내며 시간만 죽이는 과정이 찾아들어서 제법 한참을 헤매며 멍하니 놀게 되었다. 이렇게 노는 것은 재미가 없고 시간은 시간대로 아깝게 흘러가고 일은 일대로 잘 진행이 안 되는 공연한 허송세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말이지 이것만 마무리 하면 저것만 끝나면 하고 기다리면서 기회만 보다가 차일피일 지연만 되는 악순환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어디론가 당장에라도 가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한 작업에만 매달리며 오직 그것에만 몰두하고 싶은 욕구가 불현듯 찾아 들고는 한다. 마치 한증을 하러 막사 안으로 들어갈 때의 장면과 같이 곧잘 연상 되기도 하는데 깨끗이 청소된 첫 꽃불을 피운 막사 안으로 홀딱 벗은 채 거적 하나만 달랑 뒤집어쓰고 들어가 막사 안의 공기를 흠뻑 빨아들이며 내 몸의 피부를 적응시켜가면서 서서히 땀방울로 쏟아내는 정화의 열기 같은 것을 글을 쓰면서도 느껴보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뜨겁기만 하여 견디기 어렵기도 하고 또 처음이라 지치지 않고 잘 견딜 수 있기도 한데 마치 그런 경우처럼 온기와 내 피부가 조화롭게 아다리를(나는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런 일상속의 표현들이 마치 우리말의 방언 같은 느낌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맞추며 공간의 유익을 최대한 흠뻑 빨아드려 만끽하고 싶은 것과 같다. 그리하여 내 피부 속 찌꺼기들이 순조로이 송골송골 솟아나는 땀방울로 흘러내릴 때처럼 글쓰기 작업도 그렇게 개운한 맛으로 흘러내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 머릿속과 마음이 늘 그렇게 한갓지지 못한 채 얽히고 설켜 복잡한 상태에 대한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빨리 끝내고 이러 저러한 일들을 해나가야 하는데 하는 어설픈 강박과 조급함일 것이다. 그래서 글의 내용과 질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기에 앞서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은 심정에만 매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늘 갈망은 하면서도 아직 의식의 순화와 맑은 피 돌림 같은 순환을 위한 한갓진 장소를 찾아들거나 시간을 가져보지는 못했다. 그 대신 어디서건 상관없이 방해요소들을 스스로 차단해 가며 써보고자 하는 실용적 패턴으로 바꿔보려는 노력을 시도 중이다. 찾아들고 싶은 심산유곡에 대한 유혹도 있지만 도시에서 행해지는 일상도 있고 하니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 일단 글을 쓰다보면 사실 어디 나갈 시간도 별로 없고 나가는 것도 귀찮아 지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분위기 전환이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곤 한다. 솔직한 바람은 넉넉한 서재가 딸린 나만의 공간에 한껏 널브러져가며 아무 걱정꺼리 없이 마음껏 글을 쓰고는 한동안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시간 속의 산책 / 글쓰기도 장난이 아니다 >

어쨌든 이러한 생각들 와중에도 시간은 너무나 잘 흘러간다. 나는 무엇보다 살면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해 죽겠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로 신기하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전혀 혼자라서 심심하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어디를 잘 가거나 하는 취향은 못되는데 그냥 혼자 있으면서도 나름 늘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생각보다 하루가 금세 후딱 지나가고는 하는 것이다. TV를 봐도 볼게 너무나 많고 책도 읽어야 할 것이 산처럼 쌓여있고 쇼핑을 해도 다리가 아프지 마음이 지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잘 가기만한다고 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싶다. 내가 의욕하고 있는 만큼의 진행이 안 된 상태에서 시간만 가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되니까. 가야할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지 못하는 미숙에 처할 때마다 나는 회의에 젖고는 한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이렇게 후딱 지나가는 세월 속에 꿈틀거리는 애벌레로 있는 지금의 이 상황에 숨이 콱콱 막히고 심장에 불안감이 밀려들기도 하면서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쳐대는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심하게 잘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내 일을 회피하고 엉뚱한 일에 매달려 세월을 좀 먹는 것 같은 느낌이 찾아들기도 한다. 자신감 부족과 초점이 흐려서 일 것이다. 나의 이런 증상들을 매우 부정적 감정에 매여 있다고 진단해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는 솔직히 의심스러워한다. 내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인가 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해보겠다고 한 것이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빨리 끝내고 잊어버리고 싶은 감정으로 치달으며 생각으로만 점철되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가야 하겠다고 하는 전략적이고 초점 중심적 사고로 연결되지 못함이다. 바로 그러한 면들이 내게는 현격히 부족한 면으로 생각된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 역시도 그렇지 않았을까를 더듬어 보게 된다. 도대체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무턱대고 질러가며 해결하는 방식에 처하다 보니 일의 머리만 있고 마무리 없이 사상누각이 되고는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슴 미어지게 발견하고 깨닫는 순간이다. 아, 미치겠다. 머리는 점점 둔해지고 몸의 움직임은 저만큼 비껴서 가는데 나의 허물과 부족과 자책만 보이고 남으니 이것 또한 글쓰기와 함께 내면으로의 탐색이 가져다 주는 섬뜩한 두려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느껴가는 이러한 과정들과 시도들은 유익함이지 않겠는가.

때로 남들은 나를 지극히 외향적인 사람으로만 알고 혼자 있으면 못견뎌하는 사람인 양 생각하기도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살면서 즐겨 좋은 때가 대청소 말끔히 해놓은 상태에서 음악을 잔잔히 틀어놓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우아하고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그것을 무지 즐겨 좋아했다. 정갈함 가운데 한가함을 즐기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깨끗하게 할 일을 다 해놓고 유유자적 한가하게 지내는 시간을 대단히 좋아한다. 결혼해서는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라는 사람이 내 무릎에서 잠잘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더랬다. 그는 아마도 당시의 내 느낌들을 잘 몰랐을 테지만. 그런 모습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물려 토닥이며 재울 때와 다르지 않은 평화로움과 행복감이었다. 이혼해서는 그러한 한가함을 즐기지 못했다. 무릎을 베고 자는 사내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홀로 사방을 차단해 가며 살았다. 인생의 낙을 잃고 의욕이 생겨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한가할 겨를 없이 그저 돈돈 하며 무엇이 돈이 될까, 무슨 자격증을 따야 좀 더 오래 현 상태를 유지하며 버틸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 뒤지지 않고 불쌍한 이혼녀가 아닌 우아한 싱글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를 연신 고민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반 이룩한 것도 없이 말이다.

어쨌든 나는 공상 같은 꿈은 많지만 새침때기 새악시처럼 까탈스레 가리는 것도 많다. 주제넘게 스리 실력도 없으면서 우아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누려보고 싶어 돈을 많이 벌고자 욕심을 내곤 하기도 한다. 현실은 노가다처럼 일을 하고 있으면서 그 양으로 질을 메워가며 부가가치를 따라 마셔보려고 하는 맹추 같은 허욕으로 억측을 부리는 미련 곰탱이 짓도 한다. 이렇게 뜬구름을 잡는 공상 속에서 한 번 필이 꽂혔다하면 인정사정 할 것 없이 그 마음의 절제를 가늠하여 조절하기보다 내친김에 그냥 확 밀어재끼는 무대뽀적 정서도 있다.

그래서 이런 나를 감안하여 여행을 하면서 이런 습관들을 좀 다스려보고 싶기도 하였다. 기질과 성격은 쉬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잘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자연적으로 좀 의젓해져야지 싶기도 하다. 우선 말수를 좀 줄이고 행동도 자분자분 여성스러워져야 하리라고 본다. 일부러 그러려하기보다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다. 원래의 나는 조용한 가운데에서 판을 이끌고 잘 어울리면서도 제법 조신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 점잖고 우아해야 하는데 나는 요즘 거칠어졌다는 것이 대세요, 중론이다. 사실 교양이고 나발이고 체면이고 가 다 쓰잘머리 없는 노릇이라고 치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마음대로 뜻대로 안 된다고 하는 자포자기 심사로 오래 머무른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가운데 은연중 변해가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나이를 들어가는 이즈음 나도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새로운 가짐으로 삶의 태도를 좀 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 내 안에 가장 그리운 사람: 아이들과 큰오빠

< 큰오빠 생각 >

나는 가끔씩 안쓰러운 사람들을 보면 두 사람 생각이 나고는 한다. 오매불망은 세 아이 중에 특히나 가장 혼란을 겪었을 맏아들이 생각나고, 어려서는 잘 몰랐는데 나이 들면서 집안일을 할 때면 영락없이 큰오빠 생각이 나곤 했으며 요즘 글을 쓰다보면 자꾸만 튀어나오는 인물 또한 큰오빠이다. 불쌍하고 가엽고 여린 것을 보면 애잔한 마음과 함께 아이들 생각이 나고, 착하고 무던하며 심중에는 끌탕을 하면서도 홀로 모든 것을 이겨내며 허허 웃어넘기며 감내하는 사람을 보면 늘 큰오빠가 생각나고는 한다.

내 큰오빠 그는 참 쓸모가 많은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뚝딱 해결을 하는 만능 해결사였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책임지고 참아내는 워낙에 무던한 사람인지라 행여 속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그 심중과 배포에는 누구보다 푸른 꿈이 하나 가득 서려있는 사람이다. 고국에 있을 때는 뼛속까지 맏이로 태어나 순종하며 생활에 헌신적으로 임했다. 이제는 미국시민으로 살지만 그래서 미국사람처럼 살게 되기도 했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정직하고 온순하며 담담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미련스러움이 있지만 세련되지 않았을 뿐이지 천성이 아주 고운 사람이고, 말이라도 고생하는 티를 내지 않고 엄살이나 허풍 따위는 전혀 피우지 않고 사는 순박한 사람이며 혹시라도 욕심보다 도리를 먼저 알고 행하는 사람이다. 힘겨워도 혼자 짐 지고 속상해도 발설하기보다 바람결에 날려버리듯 굳이 시비를 따져 가리려 하지 않으며 천복을 타고난 사람처럼 인간사 작고 얕은 손해는 얼마든지 보고 살아도 괴의치 않는 속없는 듯 해 보이는 사람, 아니 맵고 짜고 시고 달달하고 쓰고 상큼한 속 잘라낸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빚어낸 인물 같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마침내 지복까지 누리며 잘 살게 될 것이다. 천수까지 건강하고 평화롭게 잘 살고야 말 것이다. 이제부터는 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내 안에 오래 전부터 약지 않고 잘나지 않아도 성실하고 묵묵한 큰 오라비 같은 사람을 기리는 마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나보다. 그렇게 생색내지 않고 묵직하고 꾸준히 사람을 보살피는 힘을 가진 사람을 갈망하고 있었나보다. 그런 만남을 기대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던가 싶기도 하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절대 아니거늘 흔하디흔하게 내가 아는 지극히 평범하고 좀 모자라서 늘 아쉬운 감이 드는 야무지지 못한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었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그랬고 커서는 영악스런 마음을 쫒아 간과했으리라.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는지 아니면 항시 오빠와 같은 사람이 내 안에 박혀있었는지 가슴깊이 내가 살펴본 나는 오히려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더군다나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알아낸 사실이기도 하다. 전에는 내 뇌리에 이렇게까지 큰오빠가 자리한 줄 몰랐고 이리도 많이 해결사처럼 존재하는 비중인줄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저 내 혈육에 대한 연민 정도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슨 일에 처하여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큰오빠 같은 사람 하나만 있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고 두려움 없이 원하는 일을 다 해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심한 갈증을 느끼고는 한다. 물론 처지가 처지라서 더욱 그러한 면을 갈급해 하는 면이 없지 않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실로 오빠 같은 사람 하나만 내 주변 가까이에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 사람과라면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기고 돕고 나누면서 잘해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 정말 많이 들곤 한다.

오빠는 언니네 친정에서 감쪽같이 우리 집안을 속이고 혼사를 하였을 때에도 혼자서 다 감내해 나갔다. 결혼하고 신혼초가 되어서야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결백한 어머니의 성품을 알아 쉬쉬하며 조금도 올케언니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속았다고 펄펄 뛰지 않았고 자기가 애써 하지 않아도 되는 온갖 궂은일을 어머니 몰래 쿠사리를 들어가면서도 아내 심정을 헤아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도왔다. 생활비는 내놓지 못해도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처제들을 내몰라 하지 않고 기꺼이 보살폈다. 그것이 그 집안의 일이라고 치부하여 모른 채하기보다 의당 자신이 도와야만 하는 일로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받아들이고 보살피며 처신했다. 남을 도울 때에도 언제나 성심 성의껏 도왔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고 담보하듯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했다.

미국생활 초창기 주인은 갱단에게 자신의 가게가 털리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사리며 두려워 먼발치에서 걱정만 할 때, 오빠는 맨 몸으로 막아서며 자기 가게처럼 혼신으로 지켰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미련 곰탱이는 없다. 내 큰오빠인 그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고 나도 그런 진국의 사람을 좋아하고 원한다. 그런 사람 하나만 내 곁에 있어도 지금 보다 100배 더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는 한다. 착하고 성실하고 무던하며 터럭만큼도 남의 것 공으로 탐내지 않으니 복을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그는 천복을 받을 만한 가장 아름다운 형제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잘 살지 않는다. 그는 넉넉하지 못하다. 하지만 남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기 피와 땀으로 살아가고자 애쓰고 낭비하지 않으며 전혀 허세가 없이 살아가는 세상 누구보다 성실하고 검소한 사람이다. 무던히 일만 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았고 노력한 만큼 잘 살아보려는 의지는 어머니를 닮았으며 온갖 고생을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어제보다 나은 꿈을 간직하며 자기다운 삶을 살고자 애쓰는 의지는 그 스스로를 닮았다.

< 우리 집에서 나 >

가만히 보면 나는 우리 집의 이단아요 요물이다. 나처럼 허영과 허세가 있는 사람은 우리 집안에 아무도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특별하기를 원한 듯하다. 나는 누구와 닮거나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껏 누구를 닮고 싶은 적도 없고 누가 그렇게 부러운 적도 없는 것 같다. 꿈이 없었나? 지극히 현실적이었나? 자만심 가득했나? 내게 원대한 꿈같은 것은 없었다. 그랬다면 뭐가 되도 됐을 것이다. 그러니 아니다. 없었다. 있었다고 하면 공상에 가깝거나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노력한 것도 없었다. 나는 탱자탱자 세월아 내월아 하며 살았다. 나는 스스로 잘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야심을 동반한 속내를 마음 한구석에 은밀히 감추고 살았다. 그렇지 않고 어찌 그리 노력하지 않고 운 좋게 살아갈 수 있었으랴. 나는 내 스스로 복을 많이 타고난 사람이라고 철통같은 확신으로 단정해 버렸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것이고 평화로울 것이고 즐거울 거라 믿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그렇게 주문했고 최면을 걸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노력만 좀 더 기울였더라면 아주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말이다.

기막히게 무지했고 철이 없고 야망 따위도 별로 없었다. 온실의 화초처럼 그저 화단의 꽃으로 혼자서 뽐내며 스스로를 만족하는 가운데 제멋대로의 생각에 빠져 발칙하게 살아온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이런 나에게 큰오빠와 같은 존재는 더없는 원군이 되기에 충분하기에 더욱 애타게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유아적 작태를 어느 정도는 벗어나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걱정이 된다. 오빠가 내 곁에 있다면 나는 내가 꿈꾸는 경영을 시도하고 잘 살아서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오빠에게 도움 청하고 같이 풀고 맡기며 오빠도 훨씬 잘 살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도 하고 오래 떨어져 생활한데다가 어쩌면 너무 늙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참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을 간절히 갖고 있으면서도 어려울 때 그다지 아버지나 그가 떠오른 적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이제야 너무 연로하기도 하고 마음으로는 다 도와주시려 하지만 고지식해서 일을 어렵게 생각 하시고 직업적인 일 외에 일반적인 일들은 수완이 별로 없으시며, 예전의 그는 귀찮은 일은 전혀 손을 대지 않으려 하는 게으름뱅이에다 스스로는 수고를 통해 무엇을 이룩해내려 하지 않는 그 집안 전체의 분위기와 맞물려 일의 추진력보다 생각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두 분 다 내게 그다지 의지가 되지 못함이다. 그러나 큰오빠는 달랐다. 무엇보다 성실했고 말이 없으며 맡은 바 일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서든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는 사람이며 절대 대충 일을 하지 않고, 만약 잘못 되었으면 밤을 새워 가면서라도 다시 바르게 수정하고 잠을 자는 사람이기에 보증수표와 같은 사람이다. 만약에 융통성과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아마 갑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노력에 비해 고생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늘 안쓰럽다. 그러나 마음만은 천하태평으로 여유가 있어 누구 부럽지 않은 성실과 인내로 무난한 삶을 꾸려가고 있으니 요즘 아무리 미국이 불경기라 해도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 것이다. 모쪼록 건강이나 잘 보살피며 아들딸과 사위며 며느리에 손자들과 더불어 편안한 노후를 잔뜩 누리며 살아가길 손 모아 바란다.


< 그에 대하여는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도사린다 >

헤어진 후 나는 오래 그를 염두에 두며 생각해왔다. 그런데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부정적인 면에 늘 떨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평소에 내말을 끝까지 다 잘 들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게다. 늘 들어주는 것 같지만 결과는 달랐던. 우리를 방해할 요소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는 독립적이지 않았고 늘 부모님과 누이들에 얽매어 끄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가 땡깡을 부리듯 도중에 중요한 무슨 일을 처리하다가도 성질나는 대로 때려치우고 말거나 하는 식이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불안한 마음에 믿을 수가 없곤 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식어서라기보다 솔직한 내면으로 들여다보면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보다 무난한 삶의 형태를 이어가고픈 바람이 더 먼저고 그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 감정 깊숙이에 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살 부미며 살아서 그런지 어쩌면 안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기대를 할 수 없어 보나마나 일 것 같은 짐작이 먼저 판단을 내리게 하고 마는 것이다. 일테면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기에 결국 내가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씻기지 않는 절망감 같은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이다. 도저히 어떻게 될 것 같지 않은 그런 두려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1%를 보고 10 혹은 20%를 헤아리기도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나의 50%를 보고도 단 1%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인연의 거리’ 혹은 시쳇말로 인간관계의 궁합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절 동안 다 나쁜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좋았던 순간들도 제법 많았을 테지만 그와 나는 우리들만의 감정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 그가 비오는 날 강남대로를 달리면서 하던 눈물어린 고백과 하소연처럼 도저히 자신의 선에서 수습하지 못하고 이제 그 안에서 나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이들과 그를 찾겠다고 덤벼들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어질 책임추궁과 감당해 나가야할 몫이 도저히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 나 둘만의 문제라면 벌써 해결이 되어도 되었고 아마 헤어지지 않고 살았을 것이라는 미련을 저버릴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라도 달개 받을 만큼 나는 더 이상 죽어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더군다나 이제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아이들과는 너무 어려서 헤어졌기 때문에 다가서기 쉽지 않을 만큼의 공백이 벌어졌고 그래도 그거야 천륜이니 극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고사하고 그가 감당하지 못하는 그 가족들과 얽혀서 낯을 붉히며 살아갈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와 그 사람만을 빼올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 애시에도 그랬고 그렇게 꼬득이며 산적도 없고 그렇게 할 재간도 없는 맥없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러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시간들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원치 않는다. 처음의 시작처럼 나를 맞아드리던 그 마음으로 순결하게 돌아 올 수 없는 한 우리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서로를 위해 빌어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백번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사이의 이별에 애꿎은 아이들을 끼워 넣어가며 의도된 다른 감정들을 조작하고 개입시키지는 절대 결단코 말아야 한다고 오매불망 누차 하염없이 생각하고 믿는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남은 아이들과의 인연도 이제까지의 삶과 여태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작용할 것이다. 내 아이들에 대한 생각 또한 다르지 않을 나 자신에 대해 안다. 아이들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우주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지 아이를 만나고 찾아서 이러쿵저러쿵 맡긴 물건 도로 가져와서 하자나 찾듯 당한만큼 보복하고 싸우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심적 상태를 염려하는 것이고 다만 이러한 내 마음조차 아주 엉터리로 조작하며 어미와 아이들의 관계까지 왜곡하며 인위적으로 막으려드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이미 그 실상과 실태를 겪고 나온 사람으로서 괜찮다. 욕을 해도 들리지만 않으면 되고 모함을 해도 막을 재간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아이들에게까지 주입하고 세뇌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불안과 그릇됨을 상쇄시키듯 아이들을 내세워가며 정당하지 않게 볼모로 하여서는 키웠네, 어쨌네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내쫓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의당 그쪽에서도 당신들이 할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음도 마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까지 그래온 것처럼 이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더욱 더, 그리고 죽을 때까지 참아 살아가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생각을 애당초부터 싹을 잘라내듯 말살하려드는 자세 자체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말 못하는 심중에 상처와 고통이 쌓여있고 계속 쌓아나갈까봐 오직 그것 때문에 가슴이 저리다. 나는 헤어진 이후 오래 혼자 살아가는 일에 대해 준비하며 살아왔다. 앞으로의 선택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고는 해도 할 수 없겠지만 역시나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아이들에게 기대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소위 그 가족의 바람처럼 자식 낳아 기를 때는 쌀밥 먹자고 한 것이라고 하는 그 논리를 나는 아직도 받아드리기 어렵다. 함께 나누고 짊어지는 것이지 어째서 좋은 영화보자고만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말인가. 설령 그러했더라도 현실이 그렇게 되지 못함을 억지로 당조짐하고 주리를 틀어서 자신들의 생각대로만 살아가야만 하겠다는 논리를 나는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아 받아드릴 수 없고, 내 자식에 대해 그러한 논리가 계속해서 전가될 것을 더욱 가슴 조리며 우려한다. 그러한 사고로 얼마나 많은 왜곡된 교육을 하였겠는가를 생각만 해도 구토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천륜은 천륜끼리 해결하도록 놔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가족 과의 인륜 관계는 끊어졌지만 아이들과 나와는 아이들의 정체성에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천륜인 것을 막아서서 될 일이겠나. 자초지종에 대한 오해와 어른들의 생각에 의한 감정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불신부터 안겨주는 것이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하고 항변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가 처신에 맞게 잘 살았으면 이렇게 가족문제로 까지 치달아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함이다. 적어도 자신들의 삶을 지켜갈 정도의 능력과 처세와 준비를 갖췄더라면 자식들의 불화를 부추기며 불에 기름을 끼얹는 가족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볼모로 동생의 처신이 부족함을 잡아주려고는 하지 않고 합세하여 은폐하고 그것으로써 편을 들어 고작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작태를 나는 납득할 수 없다. 평생 내 아이들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며 산다고 해도 결코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자식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마치 제 자식인양 온갖 망발을 늘어놓아가며 평생을 짐 지우려 들려고 하지 않을 지 자못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절대 생모인 내게 도저히 그러한 포악을 떨며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 말종의 짓거리요 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어딜 달려들고 어딜 때리려 드는가. 그렇게 밖에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인생이더란 말인가. 아무리 가려봐도 제 눈이나 가릴 뿐 세상을 어떻게 가릴 수 있다는 말인가. 천부당만부당하며 하늘이 있다면 그리 살다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하다. 이제라도 자신들의 처세를 바로 돌아보고 뉘우쳐야 할 것이다. 인생과 일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무슨 힘으로 그렇게 살아가고도 뻔뻔한 것인지 통탄스럽다.

몰론 그쪽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나도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무리들에 지나지 않으며 어차피 삶의 방식과 양태는 모두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회와 인간생활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고 일정한 규범과 질서가 있다. 생각의 견해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겠다. 당장에 자신들의 안위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망상에 혀가 내둘리고는 한다. 어쨌거나 적어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제대로 가르치고 진로를 터주어야 할 텐데 지금의 상태로선 아득하기만 하고 참견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걱정만 늘 태산같다. 그래서 그동안 더 미친 듯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짬이 나면 하염없는 걱정만 되니까.


사람이 단순하게 글로써만 이해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생각이나 말 혹은 몸의 언어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결혼한 남녀 사이에서 가장 기본 적인 바탕이 사상적 교감과 몸의 구사로 연결되어진다고 할 때 나는 단연 정신적 교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러 사람들은 이혼 했다고 하면 부부관계의 성생활에 많은 비중을 주어 말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다소 취약한 감을 느끼기도 하는 나는 내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을까를 고민 하고는 했지만 그저 그럴 뿐 달리 개선해볼 마음을 가져보지 못했다. 베갯머리 공사라고 하는 것을 나는 써보지도 해보지도 못했다. 들어줄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 따위 치사하고 옹졸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성격 탓에 아양 따위는 잘 못 떠는데다가 그러한 삶의 방식이 기본적으로 결혼생활이나 일상을 지배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혹여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진실한 삶이라고 나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부부간 육체를 나눔에 대한 노력은 공동의 관심과 이해로 해나가는 일이 아닐 바에야 의미가 없다고 느끼며 나에게 그것은 호기심 가는 일이라기보다 심드렁하고 인위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타고난 육체에 대해 달리 보존할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추구하며 살고 싶다. 성격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와 안 맞을 수는 없다. 더러 점괘 같은 것에는 누구는 특히 잘 화합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해대고는 하는 데 그런 분류를 맹신하는 것에서 어쩌면 오해의 싹이 트고 공연한 테두리에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과연 믿을 만한 해석이 그리 쉬운가.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살 재간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이런 성향이 타고난 저항의 기질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동안 그렇게 많이 배운 교육이 다 쓸모없는 짓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으리라.

교육을 받으면 상식적 수준이라는 것이 있고 사회에는 규범이라는 것이 있다. 범죄 집단과 같은 극히 이례적인 부류에 속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고무신도 짝이 있다고 하물며 사람이 그렇게 맞지 않고 못 견딜 수만 있겠는가하고 의문이 간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과 잘 어울리는 사람과 만나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지금까지와 앞으로 그와 나 가운데 누구라도 그러한 선택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불편이 있다고 해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아이들로 인해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하면 이제는 부모형제를 떠나 자식에게 이해를 구하고 그만의 인생을 누리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부모와 누이들에게 시달리다 한 평생 다 가다시피 했다. 벌써 오십도 넘었는데 낼 모레면 육십이다.

인생에서 제대로 누려봐야 할 그렇게 많은 날이 남아 있지 않다. 설령 백 살 넘게 살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루라도 젊고 싱싱할 때 제대로 느끼고 깨달으며 살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그와 내가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잘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너른 마음도 생기고 남을 향한 배려와 도리 체면과 제대로 된 처세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애써왔던 것이다. 이혼 후 더는 남의 짐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모든 이치는 너른 대서 좁은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임하고 행해짐이 순리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 명심하였다. 한 치라도 나은 것에서 부족한 것을 메우게 되어 있다. 그밖에 무엇이 있던가. 역행은 어려움과 혁신과 피와 눈물을 필요로 한다. 혁명은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고독과 좌절, 한숨과 넋두리 속에서 불같은 치솟음으로 발화되고 점화할 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고 결과에 따라 위대하기도 하다.

내가 야속해 하는 것은 내 편의의 아이들을 소유하겠다는 것이나 그들의 에미로 무얼 보상받거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는 안이함이 결코 아니다. 나는 내 능력이 좀 더 있어서 내가 원하는 무엇이 있다면 덜어서 그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우선 나를 세워야 하고 그 형편이 되지 못함일 뿐이다. 5년 밖에는 안 살았고 지난한 삶의 과정을 거쳤지만 한 때의 부부인연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잘 살아보지 못한 미안한 감에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다. 그도 그러한 일말의 마음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까지 형편이 피지 못해서 그러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오만 풍상과 갖은 모욕을 서로 간에 주고받으며 헤어졌을 지라도 그것은 그때의 상황이고 다 끝난 마당에 이제와 무엇이 남았겠는가. 의리와 우정 또 아이들을 서로의 피와 살을 섞어 낳은 것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인연 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만한 배려와 체면치레도 하고 살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간 살아가는 일이겠는가 말이다.

나의 부재로 말미암아 겪었을 아이들 마음의 감정의 편린들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에 대해 곡해든 선택이든 나를 보지 않고 살아가도 좋다. 하지만 내 이혼이 그랬고 나를 소중히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살고 싶지 않았듯이 그리고 그런 그에게 전혀 기댈 마음이 없었듯이 아이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이들 또한 나와 같은 선택권을 얼마든지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기 바란다. 그에게 가졌던 생각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들에게 애정을 구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아직 덜 늙어 그런지 조금도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억지로 움직여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다만 어린 상처가 너무나 죄스럽고 안쓰러운 것이다. 나는 내가 어미로서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내가 아비와 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으로서 그 부분에 관한 죄의식은 털끝만큼도 없다. 할 수 없음이지 하지 않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절대로 살아있는 아비 없이 살아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눈꼽만큼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각별하다. 세상 누구 못지 않게 사랑받았고 존경하며 자랐다. 나는 그러한 내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아비의 사랑과 아비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을 빼앗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우스꽝스럽고 허접한 처사에 더욱 기절 초풍할 노릇이고 억울했으며 치욕스러웠다. 나는 재판 따위를 거치며 아이들을 찾아오려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 그 과정들을 내 인생에서 겪고 싶지 않았으며 내 친정 가족에게 보이며 부모형제에게 누를 끼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라는 말은 내게 의미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고 차지라려는 이기심과 억지보다 얼마나 서로를 알고 배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가 먼저 제고되어야 하고 그것이 안타까움이어야 하지 않은가. 아이를 상대로 법정에 서서 물건 찾아오듯 오만 악다구니를 받치면서 그들과 똑같은 작태를 보이며 서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갈 추호의 마음이 없으며 상상마저도 싫었다.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모든 결혼생활을 뒤집어 엎고 죽이네 살리네 악다구니 받치며 얻을 것이 무엇인가. 인간사에서 헤어짐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게 아이들을 위함이라고 여길 수 없고 지금도 그러하다. 모든 것을 차압해 가면서라도 같이 싸워야 한다는 것 등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내용증명이나 공증 따위의 말조차 무엇인지 모르고 살던 순백의 얼치기 나였다.

한동네에서 수십년을 살았고 믿었으면 무엇 하는가. 결혼을 다짐하고 살았으면 뭐하는가. 고작 그렇게 밖에는 연출하지 못하고 그렇게 밖에는 끝낼 수 없다고 하는 최악의 저질 스러운 삶이 절망이며 불쾌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이들과 살려면 상상 이상의 치열한 다툼이 일어야 했고 누가 하나 죽어나가도 나갔을 만큼 살벌했으리라. 좋아서 내질러 낳을 때는 언제고 물건 빼앗듯 가져가면 그만이란 말인가. 내가 설령 법정에서 전적으로 이길 수 있었고 이겼다고 치자. 그 다음에 그런 마음들이 내게 양육비나 제대로 쥐어 줬을까? 천만에 아니다. 그럴 사람들 같으면 그 정도의 양심과 정신 상태와 마음가짐이라면 도저히 그 따위 개망나니 짓 같은 추잡한 짓거리는 하지 못한다. 집까지 팔아치우고 오밤중에 줄행랑 쳐대듯 도망가서 사는 그게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인가 말이다. 나는 도저히 어이가 없고 기가차서 말이 곱게 나와지지가 않는다.

분명히 상기시켜주고 싶고 바로 잡고 싶은 것이 이혼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들을 상대로 하여 아이를 볼모로 어른들의 가당치 않는 주장들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나보고 아이들을 버렸다고 할양이고 아이들을 정말로 잘 키워주고 싶었다면 그까짓 월급봉투나 채가면서 가세하지 말았어야 한다. 사람을 상대로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애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았어야 한다. 나를 내쫓든 버리든 끝이 나고 이사를 가든 도망을 가도 전혀 늦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하나하나 전부 다 밝힐 수 있다. 억울함에서가 이유가 전부가 아니라 왜곡과 말살을 바로 되돌리고 진실을 보존코자 하기 위함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대는 노탐의 노인들의 세상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천성과 재능을 잘 유지하고 가꾸며 살아야할 새로운 세대들에게 의자를 비워주는 것은 기성세대가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최말단의 사항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순리이듯 인간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 하나만 버린 것에 대해 일면 감사하는 마음이 아주 컸다. 그가 아이들을 맡겠다고 했을 때 나는 차라리 안도 했다. 아이들을 담보하며 월급봉투를 가로챈 시누이에 대해서는 역겨움에 비위가 상하고 메스꺼움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렸지만 내가 믿은 것은 당연 아이들 아비였다. 아내에 대한 정체성의 부재와 그 집안에 대한 세뇌와 같은 공작에서만 합세하여 놀아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정신이 말똥한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내게 너는 아이를 잘 낳으니 다시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참을 수 없고 비굴한 치욕과 저속하고 굴욕적인 언사를 위안처럼 했을 지라도 나는 달게 받았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만 참고 넘어간 부분이 아니다. 아비로서 제 씨앗이나마 거두는 것을 속으로 다행으로 안도했다. 결국 가장 마지막 순위에서 내가 잘려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이들을 떠안긴다는 생각이전에 늘 입버릇처럼 해대던 ‘여자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논리에서 멈추고, 제 자식은 그나마 거둘 줄 알아서 그 참혹한 사항에 처해서도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여태 그를 향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나를 세상의 반 중에 겨우 하나인 여자로만 알았던 그를 나는 결코 이 세월이 지나도록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그는 세상의 단 하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살고 싶지도 않았고 나 혼자 어려움을 겪으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더 이상의 모든 시달림을 끊고 싶었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너무나 큰 상처로 다가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더 이상 방치한다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해보았으니까. 사람이 어떻게 소외되고 짓밟히고 숨통을 조이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는 그 생활 속에서 처절히 경험했다. 유년에 결혼 전까지는 결코 단 한 번도 일말의 근처도 가보지 않은 무시무시한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나는 왜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강으로 뛰어드는지 안다.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 고층아파트에서 창문을 열면 어떤 생각이 들고는 하는지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유리창을 보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안다. 알면서 끙끙 참으며 이성적으로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라고는 없었고 당연 씨 내림을 한 아비가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조금도 변함없이 생각한다. 함부로 싸 발기며 내질지 마라, 인생들아. 당신들이 살아있는 한 반드시 책임을 져야할 것에 대해 비굴하며 저속한 비겁함을 보이지 말라.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 하에서 성씨라는 것이 그토록 하찮은 것이더냐. 나를 비록 겨우 씨받이로나 생각했더라도 차라리 좋다. 너희들 씨앗에 대해서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죽어도, 죽더라도 너희들 할 일은 다 하고 죽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씨 뿌리는 자들이여. 당신들의 사명이나 제대로 알고 뿌리고 뿌렸으면 함부로 흘리고 다니며 몰라라 하지 마라. 더럽고 치사하고 치졸한 그지 깡깽이 족속들이 아니거들랑. 그리고 요즘 세대들에게는 다소 억지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COREANITY적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더군다나 한국적 남성임을 내세우지 말라. 아무렇게나 싸 발기며 제 씨가 어느 나라에서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입양 천국의 대한민국 그 잘나고 잘난 남자들이시여. 제발!!!

간혹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사랑 아닌 섹스를 들먹이며 육체적인 관계만의 이성적 호흡을 가지고 궁합에 대해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게의 사람이 그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상대와 좀 더 편히 잘 맞고 덜 맞고의 차이겠지 단지 그것에만 치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고 내 경우에는 그렇게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들을 실험해 보기는 어렵다. 일일이 경험적 체험을 나누고 확인을 토로할 수 없는 노릇이니 어쨌거나 생각과 느낌 따위의 분위기로나 결론을 내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몸이라는 것이 주는 육체가 향유할 수 있는 기쁨에 대해 그것이 정신적 교감을 능가하리라고 이해하지 못한다. 아예 정신적 교감 없이 시작도 안 될뿐더러 혹간 그렇지 않게 관계가 된다손 치더라도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정신적 일치감이 없다고 하면 무슨 의미와 어떤 의식을 불러내어 나누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의문이 든다.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몸이 주는 행복감보다 정신이 주는 행복감이 열려야 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로 잴 수는 없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비해 까다로운 반응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정신적 교감만을 나누며는 살 수는 있어도 육체는 만족스러우나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하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상적 교감이 덜 일치 되더라도 육체적 나눔에 의해 공감대 형성에 도움이 될 수는 있으리라고 여겨지기는 한다.

다 경험해 볼 수 없는 노릇일 테니 어떻게든 나를 규정하고 넘어가야 할 텐데 나의 사고는 아직까지 이렇게 밖에는 머물지 못한다. 이것 또한 나의 망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더는 이해가 불감당이다. 아니 그보다는 아무 거리낌이나 이유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스러운 교감과 일치라고 여겨지는 데 그를 향해 그런 부분을 생각할 때면 심히 갑갑증을 느끼게 되곤 한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동안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내가 닫아놓고 살아온 생각과 관념들로 인해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없이 내 사유에만 끼워 맞추고 있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가 그러함은 어쩔 도리가 없겠다.

내게 잠시 사진에 대해 강의를 들려준 선생은 이런 논리를 주장하였다. ‘궁금한 무엇이건 해보라’고. 맞다. 해보면 단순해지고 알 수 있고 머리 터져나갈 일이 없어지며 그러므로 몸으로 발로 부대끼고 뛰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쉽게 가능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 또 나의 의문이다. 사귀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계속해서 얽매임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구속과 자유와의 합일 된 조화와 융합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성시켜 나가며 상생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점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이 부분에 대한 내 관점이 없거나 약해서 우왕좌왕하며 갈팡질팡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계속해서 멈춤과 맴돎을 방황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벽을 깨부수지 못하기 때문에 이념을 차고 나가는 뒷심이 없이 막혀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심장의 불안감으로 인해 불안한 일상 가운데 하루를 시작하고는 한다. 이것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물이 웅덩이 한복판에 뱅글뱅글 퍼져갔다 조여드는 반복적 흔들림 같기도 하다. 이런 때에는 나는 활기차게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뻐근한 공포와 불안감이 뱅그르르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며 기웃기웃 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얼음 속을 거닐어 본 사람은 안다. 얼음이 녹지 않고 튀어서 칼처럼 비수가 꽂히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그 냉혹한 차가움 속에서는 몸을 녹일 수 없음과 아무런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없음을, 연민조차도 허무함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 지독한 냉기 속에서 서로의 온기로 무뎌지기 전에 심장마비를 일으키고야 말 것 같은 차갑다 못해 얼어버리고 말 것 같은 고독을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다. 아니 희망이란 아무대서나 품어서 얻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시린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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