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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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저는 이 말이 무척 좋습니다.
어느날 문득... 마치 마음에서 불현듯 일어나는 바람같습니다.
어느날 문득, 지리산을 가보아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섬주섬 짐을 꾸렸습니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라 짐은 단촐합니다. 이틀 양식, 옷가지 약간. 그런데도 가방 하나 짐이 가득찼습니다. 고작 이틀 동안 지고 갈 짐이 이런데, 내가 한평생 지고 갈 짐은 얼마나 많을까... 휴~ 갑자기 한숨이 나옵니다.
목요일, 밤 11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밤중에 집을 나오니, 왠지 가출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아주 멀리 떠나는 것처럼 기분이 묘해집니다. 야반도주 같아서 왠지 짠해집니다. 밤에 여행을 가는것도 썩 괜찮은 거 같습니다.
정신없이 자다보니 구례역이었습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저마다 등산복차림에 등산가방을 하나씩 맸습니다. 속으로 '참 다들 어지간히 할일이 없구나' 웃었습니다. 나도 그 중에 하나라는 게 재밌어서 또 웃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성삼재에 도착한게 새벽 4시 반, 아직 깜깜합니다. 스무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처음엔 다같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화장실 갔다 온사이 혼자가 되버렸습니다. 혼자서 한 시간 가량 깜깜한 길을 걸었습니다. 주위가 깜깜하니 온 신경이 귀로 집중됩니다. 온갖 풀벌레 소리에, 가끔 뭔가가 풀을 스치고 가는 소리까지 생생합니다. 무서움이 신경을 흥분시켜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비하는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캄캄해서 무섭긴 한데 그게 또 스릴 있고, 곧 밝아올 아침이 있어서 괜히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역시 산행은 새벽산행이 제일 맛좋습니다.
해뜨기전 노고단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너무 멋있어서 올라다가 말고 사진기를 꺼내들었습니다. 사진찍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찍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땐 사진 잘 찍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이곳에서 해가 뜰때까지 앉아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해는 못보았습니다. 그래도 새벽 풍광은 질리도록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떠들어서 새벽의 고요함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걸 볼 수 있다는게 참 좋습니다. 이런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숱할 테니까요. 막힌 길로 무표정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니... 우~~~~ 안습입니다. 이렇게 좋은 자연이 있는데, 그걸 못느끼고 산다면 살아도 사는게 아닐 것 같습니다. 뭐든지 누리는 놈이 장땡입니다.
해도 떴으니 이제 슬슬 걸어볼 때가 되었습니다. 저처럼 혼자서 오신 분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도 나누지만, 마음으로만 인사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상하게 지리산에만 오면, 말하는게 귀찮아집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흥얼거림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하게 걷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굳이 말을 섞지 않고도, 자연을 느끼는것 만으로 충분합니다.
쉴 때는 푹쉬고, 걸을 땐 아주 열심히 걷습니다. 풍광이 좋은 곳을 만나면 양말을 벗고, 편히 앉습니다. 이 맛이 기가 막힙니다. 어쩌면 이 맛에 자꾸 산을 오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래도 듣고, 바람도 느끼고, 산세구경도 좀 하고, 수첩에 뭘 적기도 합니다. 그러면 20분이 금방 흘러가버립니다. 가끔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지도를 봅니다. 제가 갈 코스는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입니다. 보통 2박 3일로 많이 합니다만, 조금만 열심히 걸으면 1박2일도 문제없습니다. 저는 열심히 걸어서 1박2일 여정으로 끝낼 생각입니다. 오늘 잘 곳은 세석대피소.
아악~!
갑자기 코펠을 안가져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런, 미치겠습니다. 문득 떠난 여행이라 허술한 게 많습니다. 코펠이 없으니 밥해먹기는 글렀습니다. 사람들한테 빌릴까? 그냥 끓는 물을 빌려서 봉지라면을 해먹을까?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산장에 가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밥을 못해먹는 단 생각이 들자, 갑자기 배도 더 고파집니다.
빡빡한 일정 덕에 별뜨고 해진 뒤에야 늦게 산장에 도착한 바람에 밥도 못해먹고 쫄쫄 굶었습니다. 다음날 천왕봉을 오르는데 힘이 하나도 안 나더군요. 쪼콜렛도 안되고, 과자로도 역부족입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밥심입니다. 밥대신 천왕봉 봉우리에 올라서 실컷 산천 구경했습니다. 온 산에 제 발밑에 있군요. ㅎㅎ 이 순간 만큼은 배부릅니다.
지리산의 하산길은 무척 깁니다. 하도 '지리'해 지리산이라 할 정도입니다. 중산리로 내려왔는데, 왠 날씨는 이리도 더운지. 쨍쨍 내려쬐는 햇볕이 8월 같습니다. 날씨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중간에 대피소에 들려 라면 한봉을 끓여먹고는 쉬지도 않고 내려왔습니다.
삐리리~! 거의 다 와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어제 쌍둥이 조카가 태어났다는군요. ㅎㅎ 갑자기 웃음이 납니다. 진주에 들려서 촉석루를 구경하려 했는데 계획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조카보러 얼른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문득 시작된 여행은 또 문득 끝을 맺습니다.
늘 이렇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지리산을 새벽부터 오르다니...저는 오래전에 대학생때 서클 선배들하고 갔었는데, 노고단까지 오르는 것이 정말 힘들어서 울면서 올랐던 기억이 나요. 그때부터 선배들 말이 학교에서는 성격좋은 줄 알았는데, 이런데 오니까 제성격 나온다 했었지요 ㅎㅎ 사실 그 후로는 저는 산행이 정말 싫어서 거의 안가고 있어요 ㅋㅋ 산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하던데요, 귀자님은 좋은 사람일거 같고, 저는 ㅋㅋ 아직도 산행을 싫어하고 있어요.
아, 근데 그 노고단 산장에서 본 은하수는 정말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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