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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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이며 과학자가 되리라!
책을 읽는 도중, 나는 소름끼치는 한 순간을 맞았다. 전기침을 맞은 것과 같은 짜릿한 전율이 발가락 끝에서 머리끝까지 0.5초 만에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전기침을 맞은 대목은 소설가 도로시 캔필드 피셔가 말한 내용이 인용된 곳이었다.
“나는 어떤 장면을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만일 그 장면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미지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두 따옴표 사이의 문장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아랫줄로 눈을 옮기지 못하는 나였다.
나는 꽤 오랜 시간 꾸준히 글을 써 왔다. 물론 글을 통해 공식적인 대외활동을 하거나 그것으로 밥벌이 수단을 삼을 만큼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내 글들이 공개가 되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보는 이들의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때면 난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아쉬운 것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100% 완벽하게 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 모자라고 미흡한 느낌, 완성되지 않은 듯한 찝찝함이 다 헹구어 내지 않은 치약거품처럼 텁텁하게 남아 있었다. 이 개운치 않은 느낌은 항상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으로 나를 더 다그치고 채찍질해 왔다.
그래, 여하튼 도로시 캔필드 피셔의 말대로, 나 역시 글을 쓸 때 이미지가 머릿속에 먼저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경사가 거의 50도쯤이나 되는 고개를 내려올 때, 내 뒷덜미를 누군가 힘껏 밀고 달려 내려오는 듯한 아찔한 공포. 물미역이 사방에 널려 있던 부산 자갈치 시장의 눅눅하고 비릿한 저녁 어스름. 한 겨울 하얗게 언 모래를 움켜쥐며 쓰러졌던 그 차디찬 고통까지. 이 모든 것들이 까만 글자로 내 눈 앞에 보여 지기 전, 나는 이미 거기 그 장소에, 그 때 그 시간에 가 있었다. 시각적 이미지와 들려오는 소리들, 그리고 냄새와 촉감까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문장보다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게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책은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뱃속 어딘가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접근하지 못한 대단히 어둡고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져 있으며 내가 그저 모호한 느낌으로만 짐작하는 것, 아직 형체도 이름도 색깔도 목소리도 없는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한 이사벨 아옌데의 말도 나의 이런 심정을 정확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내가 느꼈던 모호함과 불분명함들이 비단 나만의 ‘결함’이나 ‘오해’가 아니었다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말은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그 느낌의 본질이 아니다. 말은 이해를 위한 표현수단이지 본질의 완벽한 재연이 아니기 때문에 모호함과 불분명함, 혹은 그저 짐작에 불과한 작은 느낌일지라도 그것이 ‘틀리다’라거나 ‘아니다’라는 부정의 의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쯤 오게 되니 내 마음에 어느 정도 작은 안도감이 생겼다. 대 작가들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러한 느낌을 통해 글을 쓰고 있고, 글을 쓰면서 느꼈던 모호함이나 불분명함도 자연스러운 과정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 그러면 이렇게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말로 완벽히 표현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책에서는 이것을 ‘직관’ 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머리 밖으로 꺼내 증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공식적인 의사소통이라기 보단 비언어적이며 비수학적이고 비기호적인 그 무엇.
놀라운 것은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 심지어 과학자들이 남긴 위대한 창조와 발견은 바로 이 ‘직관’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생각한다는 인식은 분명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소설가나 음악가가 느낌과 직관으로 창작 행위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과학자와 수학자가 같은 맥락으로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데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나의 이러한 의심을 한 번에 날려 버리는 강력한 한 마디를 남겨 주었다.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에 불과하다.”
또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먼 역시 “내가 문제를 푸는 과정을 보면 수학으로 해결하기 전에 어떤 그림 같은 것이 눈앞에 계속 나타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정교해졌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글을 쓸 때 느꼈던 막연한 모호함, 이사벨 아옌데가 말한 뱃속 어딘가에서 떠오르는 심상, 아인슈타인과 파인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 ‘어떤 그림 같은 것’ 을 ‘직관’이라고 확실히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직관이 나에겐 이미지를 그려내고 소리를 재생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고, 두 과학자에겐 숫자와 공식을 표현하는 부차적인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일련의 창작 과정이 있다. 그리고 숫자를 기호화 하고 공식을 만들어 연구하는 과학적 과정이 있다. 이 두 과정이 ‘직관’이라는 공통분모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고 놀랍지 않은가! 과학과 예술이 ‘창조’라는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고과정이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맞는 말일 수 있다. 실제로 면역학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샤를 니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 전진과 도약, 무지의 정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직관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상력이나 직관은 예술가나 시인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실로 이루어지는 꿈과, 무언가를 창조할 듯한 꿈은 같은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안심이 된다. 글을 쓰면서 내내 느꼈던 불안감과 모호함이 오히려 상상력과 직관으로 발현되어 보다 생생한, 본질적인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 위대한 작가들, 위대한 음악가들, 위대한 과학자들 또한 나와 같은 느낌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실로 큰 위안이 된다. 결국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글이든, 음악이든 혹은 과학이든 수학이든 구분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과 직관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과 직관을 제대로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라도 위대한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먼 훗날, 대단한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느낌과 상상력, 직관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난 대단한 과학자가 될지도 모른다. 글과 숫자, 문장과 공식 그 어느 것도 경계 없이 어울려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믿게 된 것이다. 그 안에는, 진실 되고 간절한 나의 느낌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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