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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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으면……
바람이 분다. 강바람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오늘 굿을 하는 영매가 너무 고와서일까. 바람이 어쩐지 처연하다. 바람에 울긋불긋 깃발이 날리고, 꽹과리며 피리 소리가 슬슬 분위기를 불러 온다. 한낮의 햇볕인데도 뜨겁다기보다는 어딘가 서늘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비단 가을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작두에 비친 빛이 주는 느낌이 거기 모인 사람들 마음을 차갑게 가라 앉혀서이리라…
드디어 소화가 신어미의 도움을 받아 작두 위로 올라서려 한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건지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건지 그 누구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희미함을 뚫고 소화의 하이얀 덧버선이 더욱 곱게 느껴진다.
마침내 그녀의 막힌 말문이 터지고 그녀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뿜어낸다. 아마 할아버지 영가인 듯 싶다.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다.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느 새 목소리가 바뀌어 있다. 이번에는 어린 아이 목소리이다. 그렇게 여러 명의 삶을 작두 위에서 풀어내던 소화가 마침내 땅에 내려왔다.
탈진했다. 탈진한 얼굴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타인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그녀만의 슬픔이리라……
나도 왜 이 주제가 내게 다가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이틀째 날 문득 내게 다가온 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동안 고민했다. 이 주제가 혹시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는 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좋은 주제는 없었다. 아니 떠오르지조차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생각의 탄생> 참으로도 거창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13가지 생각도구.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13가지 생각도구만 터득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천재가 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방법들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던지,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별점은 생각하는 능력’이라던지의 친숙한 표현들을 제외하고라도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살지?’ 하는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뒤이어 연달아 떠오르는 답들은 ‘인간이라고 모두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다’와 그를 뒷받침하는 장면들이었다.
매일 정크푸드나 먹으며 TV앞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스포츠 중계를 보는 뚱뚱한 백인 남자.
이틀이고 삼일이고 오락실에 틀어박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자신의 삶 역시 게임이 소모되듯이 소모되고 있음을 느끼지도 못하는 옆집 아이.
일년에 읽는 책이라고는 패션잡지가 전부에 머릿속에는 온통 옷과 장식품으로만 가득찬 속칭 된장녀들.
여기까지는 편안히 동의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 참 한심한 인간들이지.”
그렇다면 다음 부류의 사람들은 어떠할까?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에 따라 원하지 않은 전공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좋은 대학을 가고, 원하지 않은 직장도 다니고, 조건 좋은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는 남들이 시키니까 우리 애만 안 시킬 수 없어 죽어라 과외 시키고.
이제 슬슬 기분이 나쁜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난 묻고 싶다. “내 삶을 주관하는 이 과연 누구인가”하고.
나는 너무나 잘 짜여진 사회적 각본에 따라, 삶의 시기마다 번갈아 등장하는 유능한 감독에 의해 마치 영매가 타인의 목소리만 대변하듯 내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내 삶을 내 스스로 이끌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조차 없지만, 어떻게 해야 내가 진정한 주인공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알 것 같다.
그 시작은 다름아닌 “생.각.하.기”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저 멀리 어두운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보일 것이다. 지쳐서, 이젠 정말 지쳐서 포기하고 싶다 여겨질 때, 나의 간절함이 한 줄기 빛으로 되돌아올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순간인 게다.
천재가 되는 창조적 생각도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삶에서 주인공 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