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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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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8일 22시 36분 등록

 

그녀는 홀연한 깨침 속에서 글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네.

선의 불꽃들보다 사제의 마음이 더 사로잡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런가.

손끝에 떨림이 일고 가슴속에 솟구치는 이것은 무엇인가?

홀연히 깨치다앞에서 고개를 떨구네.

이내 눈물이 흐르네. 이것이 환희의 눈물이면 얼마나 좋을까.

 홀연히 깨치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아득해지네.


 

산은 산 대로 겹치고 계곡은 계곡 대로 겹쳐 넘치고

높이 드리우는 구름이 아니라면 볼 수 없고

저 멀리 마주 하는 산과 산도 알지 못하는

몇 겹 구비 골짜기를 휘돌아 들고 인자한 호랑이가 한결같이 지켜주는

그래서 그 호랑이의 인도를 받아야만 다다를 수 있는 아주 깊은 골짜기에

골세양바드레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네.

병풍처럼 드리워진 뒷산은 세상의 끝인 듯 하였고 양쪽의 품어 안은 산등성이는 늘 신비한 것을 갖고 있어 그 마을의 창고와도 같았네. 누구네 것이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에 자라난 감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항상 싱그러운 과일을 주었고 심지도 않은 콩이며 미나리며 오이는 저절로 자라나 손만 뻗으면 되었네. 조그맣게 일군 밭들은 산 따라 나무 따라 어여삐 자리잡았고 세 가구의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은 거기서 일함을 최고의 행복으로 살았네.

 

저 멀리 아카디아 지방의 조용한 골짜기에 아름다운 에반제린이 있었다면 이 곳 골세양바드레엔 청초한 춘희가 있었네. 온갖 꽃들은 그녀를 위해 만발 하였으며 산 그림자의 높이에 맞춰 춤추는 잠자리들도 그녀를 위해 날아들었네. 그녀는 구름띠 걸쳐 놓은 듯한 은하수를 덮고 잠들었고 영롱한 이슬 소리에 잠을 깼다네. 해 그림자 걷히지 않은 곳의 나비와 잠자리들은 그녀의 손길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네.

계절마다 달리 피는 꽃과 나무들을 쫓아 산을 헤집고 다녀도 그곳은 호랑이의 한쪽 등에 지나지 않았네. 그녀는 마을 어른들 따라 자연의 언어를 먼저 배웠다네. 보랏빛 싸리나무를 꺾어 나비를 쫓을 때도 나비들은 그 싸리나무에 덮쳐져 잡혀짐을 즐겨 했으며 그녀가 가는 곳에서는 어느 풀벌레든, 나무든, 돌이든 정성을 다해 놀아주었네. 그곳의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한 진정한 친구였음을 그녀는 20년이 지나서야 홀연히 깨쳤네.

 

그녀도 들국화처럼 자라 학교에 가게 되었다네. 학교는커녕 아랫마을까지 가는 데만 일곱 굽이 돌고 호랑이의 목선을 넘어 십 리 길을 걸어야 했네. 그렇게 산속을 걷는 것에 등산이라는 이름이 별도로 있다는 건 중학생이 되어서야 알았네. 그녀는 학교길이 너무도 무서웠네. 골짜기 마다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유난히 깊고 서늘한 계곡에는 애기귀신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었고 호랑이 바위 아래의 꺼지지 않는 촛불이 무서웠고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똑같이 소리를 내 누가 따라오나 싶어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또 없고.. 그렇게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는 여우이야기가 있는 곳을 지날 때면 등골이 오싹하여 줄달음을 치곤 했네. 해 짧은 겨울 이면 어두워진 밤길을 걸어 집에 와야 했고 그 무서움은 마을을 지키는 호랑이도 어찌해 주지 못했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했지만 그녀는 짐승이, 그것도 전설속의 짐승이 훨씬 무서웠네. 그녀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걸 도시에 나와서야 홀연히 깨쳤네.

 

그녀는 자연보호를 몰랐네. 꽃들은 항상 흐드러지게 피어 그녀의 배경이 되어 주었고 그녀의 눈길과 손길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맘껏 꺾고 만지고 예뻐하라고 있는 건 줄 알았네. 그녀는 학교를 꽃들과 함께 다녔고 매일 다른 꽃들과 등교하고 같이 공부했네. 꽃병에 꽃을 꽂는 것이 꽃꽂이라는걸, 그것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걸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네. 막대기로 건들며 몸을 동그랗게 마는 비단개구리를 괴롭히는 것이 취미였고 개미집은 헤집고 거미줄은 꼭 망쳤고 잠자리 꽁지를 떼고 풀잎을 꽂아 시집 보내는 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네. 미끄덩거리는 투명한 태 속의 새까만 알이 꼬리 달린 올챙이가 되어 나올 때 그녀는 도와 주었고 물오른 버들피리로 아름다운 음악도 들려주었네. 그녀의 일상자체가 체험학습이었다는 걸 엄마가 되어서야 알았네.

 

수줍은 진달래 꽃 같은 그녀에게 설레임이 찾아온 건 열 다섯 살이 되는 이른 봄이었네. 설레임을 준 그 아이는 있는 듯하면 없고 없는 듯 하면 있었고 늘 멀리서 그녀를 지켜주었네. 그 아이는 눈으로 말했고 마음으로 다가왔네. 그녀 또한 눈으로 대답하고 마음으로 말했네. 씩 나타나서 편지를 주고 가면 그녀는 수줍은 마음에 다른 친구들을 시켜 편지를 전해주었네. 매일 산길을 걸으며 편지를 읽고 또 음미했으며 써 내려간 글씨 사이로 그의 손길을 헤아렸고 별들의 빛을 받아 밤새 답장을 썼네. 그녀는 그 아이가 일년을 매일 같이 자신만을 위한 시를 써주었다는 걸, 그것으로 인해 그녀 자신이 더 아름다워졌다는 걸 25년이 지나서야 알았네. 그리고 그때서야 그것도 사랑이라는 걸 홀연히 깨쳤네.

 

골세양바드레를 떠나온 그녀에겐 늘 기다려주고 쉬게 해주던 느티나무 같은 건 없었네. 그녀는 목련처럼 순박하고 청순했으나 시들어 갔고 별 달리 친구도 없었네. 그쯤 일기를 꼬박꼬박 써야 착한 사람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은총이었네. 그녀는 즐거운 일이든 슬픔이든 그리운 마음이든 창피한 일이든 일기장에게 얘기했네. 그녀에겐 일기장이 엄마이고 얘기를 들어주던 잠자리이고 감나무이고 푸른 하늘이었네. 이제 일기쓰기는 또 다른 일상이 되었고 그녀가 살아온 만큼 일기장도 쌓여갔네. 그것이 그녀를 지탱해준 또 다른 힘이었다는 건 20페이지의 개인사를 쓰면서 깨달았네.

 

그녀에게는 애늙은이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네. 자아가 미성숙한 그 때 유독 그 친구는 인생을 내다 보는 듯 했고 삶을 이해하는 듯했네. 어느 따스한 봄날, 그녀에게 세상의 중심이 너 인줄 아니?’ 라는 말을 던지곤 사라져 버렸네. 그녀는 그 말에 머리를 한대 맞은 듯이 멍했다네. 그 후로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맴돌았고 풀리지 않은 화두로 따라 다녔다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도 확신 할 수 없었으며 그럼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아이를 낳고 열정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서 그녀는 홀연히 깨쳤다네. 세상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내가 있어야 남도 있다는 것을! 순간 그녀는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고 그녀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네.

 

그녀가 밤 바다를 처음 보게 된 건 스물 한 살이 되어서였네. 밤바다의 시커먼 출렁임에 그녀는 얼어 붙었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네. 밤에 바닷물이 시커먼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친구들은 말했지만 그녀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네. 밤에도 바다는 당연히 파아랄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라네. 그녀는 왜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살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였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홀연히 깨달았네. 산골에서 밤하늘만 보고 살아서 그렇다는 것을. 그녀가 산 골세양바드레의 밤하늘은 밤임에도 파아란 바탕에 흰구름이 보였기 때문이라네. 그런 하늘만 보고 살았을 뿐이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바다를 꿈꾸었기 때문이라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그녀도 꿈을 가진 성숙한 아가씨가 되었다네. 그녀는 상냥했고 항상 에너지가 넘쳤네. 그녀의 원숙한 아름다움에 총각들의 마음은 설레었다네. 그러나 쉽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순 없었다네. 그녀는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그녀에게 남자는 그녀의 오랜 친구인 나무, , 나비, 들꽃, 바위와 다르지 않았네. 그런 그녀에게 쉽게 남자로 다가오지 못했고 그대로 늙어가게 내버려 두었네.

그러던 어느 가을, 갈대를 한 움큼 꺾어와 건네며 사랑을 고백하는 용기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네. 그녀는 갈대는 너무 마음에 들었으나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진 듯한 처진 어깨를 미리 보았기에 그는 싫었네. 그는 매일 찾아왔으며 정성을 다했네. 그녀의 냉담한 표정에도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고 늘 한결 같았네. 그가 바다 같은 마음을 지녔음을 보지 못했네. 세련되지 못한 표현 속에 태양 같은 따스함이 숨어있는 줄은 몰랐으며 싫기만 했네. 매일 찾아오는 그. 오지 말라고 하는 그녀. 그러기를개월. 드디어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독한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네. 그는 가슴에 돌을 얹은 듯 한숨을 쉬고는 일어났네. 포기한 듯 걸어가던 그는 돌아서며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네. 그 때 그녀는 얼얼한 뺨을 만지며 크게 깨쳤네. 그가 진정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하늘이 맺어주는 백년가약의 인연이라는 것을! 

 


그녀의 삶에서 홀연히 깨달은 평균시간 어림잡아 20년이네.

이 어찌 책을 덮고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선사들을 붙잡고 몸부림치며 기도했네.

마조스님의 홀연히 깨쳤다를 내려 주소서.

약산스님의 하나되어 깨닫다도 주소서.

위산스님의 크게 깨쳤다도 주소서.

수로화상의 당장에 깨쳤다도 주소서.

얕은 나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의식을 일깨워 주소서.

 

그녀는 홀연히 고개를 들어 황벽스님의 시를 읊조리며 마음을 추스리네.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온 힘을 쏟아 덤벼라.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기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IP *.111.2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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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8 23:10:05 *.176.68.156
I'm speechless. 읽다가 턱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감동적이고 또 재미있어서요.

이런 글도 가능하다는 것을 '홀연히 깨치게' 해 주시는군요^^.

황벽스님의 시 다시 한 번 두개골에 새겨 봅니다. 그런데 영 파지지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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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부
2009.03.01 00:18:10 *.167.143.73
그러게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는 거였네요.
감동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환한 그림처럼 온전히 들어있군요.
새로운 형식의 컬럼 도전~
이또한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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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영
2009.03.01 00:22:19 *.124.157.220
자신의 삶의 이렇게 다시 발견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에 저도 흥분이 됩니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글 속에 삶의 진실이 주는 순수함과 위대함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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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놈
2009.03.01 09:50:30 *.229.155.147
그녀 불덩이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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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2:53:39 *.78.105.123
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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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22:22:09 *.109.189.24
신명이 나고 몸이 따라 움직입니다.
마치 온 천하를 해짚고 다니는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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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1 23:13:08 *.168.110.44
대단하십니다.
류춘희 님의 글을 읽노라니 한편의 영화를 보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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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23:52:39 *.234.77.178
우와... 정말요...
승호님 말씀처럼 한 편의 영화같다는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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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6:09:55 *.149.106.27
소녀감성!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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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7:24:58 *.18.17.40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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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9.03.03 17:35:40 *.247.80.52
읽다가 많이 울었어요.

따뜻한 봄날과 내게 편지를 써주었던 친구와 햇살이 가득했던 길들과 별밤에 풀벌레소리와 오그라들게 했던 어둠과... 어머니와 수줍은 친구와... 그리고 춘희님의 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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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9.03.04 12:17:58 *.111.241.42
나는..... 정화님의 글을 보고 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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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
2009.03.06 20:55:41 *.232.219.144

저도 예전에 할머니 댁에 놀러가면 그 동네 잠자리 씨를 말렸었는데,,
(힘들었지만 참 열심히 잡았더랬어요 .. ㅡ,.ㅡ;;)
그후 그 동네 잠자리들이 뜸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재밌어서 읽고 또 읽고 그렇게 돼요.
중독되었나봐요. 헤헤 ^^

그런데 놓쳐버린 사랑 고놈.
왜 깨달음은 꼭 한발 늦게 오는 걸까요?
(아,,울고싶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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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12:00:51 *.43.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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