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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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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2시 21분 등록
 사람에게 배운다는 것 - 추기경님의 가르침


<선의 황금시대>에는 많은 스승들이 등장한다. 나는 책에서 보여지는 스승과 제자, 사람인 그들의 말과 행동에, 마음에, 시선이 향했다. 나는 책에서도 배우지만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책도 사람인 저자의 생각과 시선이 만들어낸 것이니만큼 이 책에 나오는 스승, 사람에게 배운다는 것에 마음이 끌리다보니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 나와 우리 가족은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추기경님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 추기경님의 코와 입 사이의 긴 인중, 입모양, 눈매와 얼굴형이 돌아가신 내 큰아버지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TV 화면에 추기경님이 나오면 큰아버지 TV 타셨다고 반가워했고, 정작 형제인 아버지와는 별로 닮지 않았는데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추기경님이 큰아버지와 더 닮았다며 신기해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9시뉴스에서는 추기경님의 장례미사와 운구행렬, 하관의례 소식을 담은 화면이 보이고, 부모님과 동생이 숙연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명동성당 앞마당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성당 안에서 진행되는 입관예절을 지켜보던 신자들의 탄식과 흐느끼는 소리가 전해지고, 추기경님의 유해가 운구차량에 옮겨지자 차량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울먹이는 사람, 운구행렬이 이동하는 길가에 시민들이 모여서 손을 흔드는 모습, 어떤 택시 기사분은 차를 세우고 길가에 서서 목례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장지에 도착해서도 추기경님의 관이 흙으로 덮일 때까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들, 이제는 TV에서 조차 다시 볼 수 없게 된 추기경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며 나와 우리가족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왜 울었을까?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그 분이 가시는데 우리가족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영하의 추위 속에 서너 시간씩 기다리며 조문하는 사람들, 추기경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사람들은 왜 혈육을 잃은 사람들처럼 흐느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 사랑이 아닐까? 살아서 사랑과 희생, 나눔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추기경님의 사랑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명동성당, 거기엔 종교와 학력, 정치와 이념, 지역과 나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남녀와 노소의 구분이 없어 보였다. 내편 네편이 없었다. 나는 이처럼 자기 이익을 초월해 한마음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초월해 우리 모두는 슬픔을 같이 했다. 추기경님이 떠나고서야 막연히 이해하고 있던 사랑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랑의 구체적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늦었지만 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내 일이 아니면 그만이고, 지나가면 그뿐이라 생각했던 나, 내 것이 먼저였기에 남을 돌아보고 이웃을 살필 여유와 마음이 없었던 나, 아니 마음은 있어도 정말 마음뿐이었던 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나, 구차한 변명으로 자기합리화에만 급급했던 나, 이기적인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추기경님께서는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고 하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하셨고, 어두운 군부독재 시절에, 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이었다. 명동성당 앞에서 좌판을 펴고 묵주를 판다는 한 노점상은 언젠가 추기경님이 일부러 와서 묵주를 사주신 적이 있는데, 좋은 묵주가 많으셨을텐데도 원래 없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신 분이라 너무 아쉽고 그립다며 없이 살지만 남에게 더 잘하고 살겠다고 했다. 어느 노숙자도 그동안 자포자기 했는데 비록 이런 처지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못 줄망정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성실히 살겠다고도 했다.


추기경님은 자신의 묘를 일반 성직자와 똑같은 크기로 하고 평범한 관을 써서 검소하게 하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안구를 기증해 앞 못 보는 두 사람이 새로운 빛을 찾는 것을 보고 자기 신체 일부를 내놓기로 약속하는 시민들이 줄을 있는 등 희미하던 장기기증의 불씨도 살아나고 있다. 추기경님은 자신의 부재를 통해 더 큰 존재를 드러내고, 더 큰 가르침을 보여주셨다.


신의 아들로서 예수님보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때로는 우리에게 더 깊은 감동과 믿음을 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보여주신 추기경님의 삶이 바로 그러하셨다.


누군가는 사람에게 배운다는 것은 그의 시선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을 따르고, 그의 말과 행동을 본받고, 그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의 삶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나는 평상시에는 나 편한대로 살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언제나 뒷전이고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는, 염치없는 날나리 신자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요즘은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가 더해져 내 앞에 보이는, 놓여있는 일에만 급급해 주일에 한번 가는 교회에도 가지 못했다. 주일에는 꼭 예배에 참석해 추기경님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정리하며 나를 다시 한번 돌이켜봐야겠다. 추기경님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고맙다.”고 하신 말씀대로 나에게 사랑을 준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겠다. 사랑받는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다. 넓은 시야와 깊은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살피는 행동을 실천해야겠다.


성직자 묘역에 플랭카드로 내걸린 추기경님의 마지막 말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 그 분이 남기고 간 감사와 사랑의 메시지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내 이기적인 마음을 서서히 녹이고 있다.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고 가셨다.


지금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계실 것이다. 위대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IP *.40.2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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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오리새끼
2009.03.02 02:42:58 *.129.8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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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9.03.02 08:04:46 *.67.52.202
어려운 시기에 사회의 큰 어른이 돌아가시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람들이 기댈 곳이 점점 없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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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9:59:33 *.255.182.40
김수환 추기경님은 종교를 떠나서 우리 사회를 따듯하게 지켜주셨던 어른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듯한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책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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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3:32:08 *.246.196.63
어제 명동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명동성당에 잠시 들렸었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이 계단을 따라 주욱 걸려있는데, 늦은 밤 고요한 가운데 한계단 한계단 오르면서 사진을 바라보니 그분의 삶의 발자취를 잠시나마 따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내용이 많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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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영
2009.03.02 16:03:36 *.124.157.251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짧은 이 한마디의 울림이 크게 전해옵니다.
심신애님 글을 통해 이런 울림을 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남은 하루 서로 사랑하렵니다.
레이스에 함께 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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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
2009.03.06 22:07:31 *.232.219.144
저는 천주교신 자는 아니지만
끝까지 베풀고 떠나시는 모습에 얼마나 존경스럽던지
조금 더 일찍 추기경 님을 알았더라면
명동 성당이라도 찾아가 말씀을 들어보는건데하고
생각했어요.

정말 성스러우신 분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끝까지 힘내세요!! ^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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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12:01:29 *.43.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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