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렬(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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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해보기
일지신공(一指神功)^^ 촛불끄기
촛 불을 켜 놓고 떨어져 서거나 앉는다.
검지 손 가락 하나(혹은 검지와 중지) 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엄지의 손가락 끝과 맞닿게 한 다음 팔을 펴면서 손목의 스냅을 사용하여 촛불을 끈다.
단, 초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생각보다 쉽다. 한 번 해보시기 바란다. ^^
누구를 위한 관용(寬容)인가?
예전에는 목슴을 걸고 결투를 해도 낭만이 있었고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다.
중국 영화를 보면 몇 날 몇 일이고 사투를 벌인 끝에 한 사람이 이기고 나서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싸움을 마친다. 그리고 이긴 자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재미로 볼지 모르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그러한 고수들의 결투와 그에 따른 행동 즉 관용에 대해 생각했었다. 상대를 살려 보내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배려일수도 있다. 왜냐면 경쟁 상대가 없는 사람이 성실하고 적극적인 훈련이나 노력을 계속해서 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패배가 정당하지 않은 보복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더 없이 좋은 각성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과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자부심을 넘어서는 자만심을 방지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안전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경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류란 일등과 다르다. 일등이란 우연히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반짝 가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경기의 대진 운이 좋거나 경쟁상대가 출전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일등을 자랑하는 사람은 어쩌다 일등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일류는 그런 요행이나 우연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사실 항상 일등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일등을 한 것에 대해 자랑하지 않는다. 대부분 그런 선수들의 반응은 결과에 대한 이야기 대신, 다만 이번에는 뭐가 좀 잘 됐어, 이 번에는 이런 점이 좀 문제가 있었어! 라고 말하고 굳이 결과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그냥 운이 좋았어!’ ‘오늘은 상대가 좀 실수를 해서…’ 라고 겸손하게 이야기 한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훌륭한 선수들은 그렇게 결과중심적이기 보다는 과정중심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에게 관용의 정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정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훈련과 수양의 궁극적인 목적은 승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에서의 승리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노력과 가치를 확인하고 타인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인정 받는 것이지 상대에게 굴욕과 모멸감을 주거나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기를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사람들인 대부분의 관중들은 결과에만 집착하겠지만 경기를 하는 사람은 결과에 집착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기가 어렵다. 왜냐면 시합은 변수가 많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성장하면 할수록 경쟁해야 할 상대의 수준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미국의 유명한 미식축구 감독 롬바드디가 했던 말을 자주 인용했었다.
물론 그는 이겨야 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winning is not everything, but losing is nothing(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지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반대로 해석했다. ‘losing is nothing but winning is not everything 그리고 그것은 “물론 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긴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 안가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삶이란 살아간다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목표들을 정하고 그러한 목표들을 위해서 삶은 꾸려나감으로서 그 삶의 여정이 그냥 ‘살아있음’ 뿐만 아니라 좀더 의미와 가치 있는 값진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래야만 불평등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도 실망이나 좌절하지 않고 과정에 성실할 수 있고 결과를 얻었음에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했던 말 “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용이란 상대에게 베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한 방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행해보기에 대하여
일지신공은 손가락에 힘을 집중하는 능력을 키워서 사용하는 무예의 한 기법이다. 나는 그 진정한 기술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그러한 숙련과정의 한 단계인 촛 불 끄기 과정을 보고 관절과 근육의 조절능력의 중요성을 예시해 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했었다.
팔뚝이 굴고 근육이 많다고 해서 촛불을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의 무게 중심으로부터 어깨-팔꿈치-손목-손가락 관절의 자연스런 연계로 힘의 전달 능력을 최대화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연계와 조절능력을 촛불 끄기 놀이를 하면서 습득하는 것이다. 손바닥의 공기를 손가락을 타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할 때 촛불은 꺼진다. 물론 예전의 무술가들은 바람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근수축의 힘을 시간의 한 지점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지만… 폭발적인 힘은 풍부한 근육의 양이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동원 가능한 근육의 근수축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순발력(瞬發力 power)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