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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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불관용’이라는 개념은 홍세화 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먼저 접했다. 프랑스어로는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로 표현되는데, 똘레랑스는 ‘16세기 초부터 유럽 땅에서 신구교도 사이에 처절하게 벌어졌던 화형과 학살 등의 앵똘레랑스 행위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 제기되어 발전한 사상’이라고 <왜 똘레랑스인가>를 쓴 프랑스인 필리프 사시에는 정의한다. 나와 다른 사상, 민족, 종교, 지역과 평화적으로 만나 대화와 토론을 벌이지 않을 때,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상적인 반신 불수, 쇼비니즘적 민족주의, 배타적인 종교, 그리고 맹목적인 지역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홍세화는 따끔하게 지적한다.
관용으로 방대한 역사를 한데 꿰어낸 <제국의 미래>는, 만만치 않은 비판에도 불구하고(나도 그 중 하나이다) 훌륭한 책이다. 그녀가 지적한 국가, 제국 수준의 거시적인 관용을 개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가 속한 사회와 내 자신의 ‘관용’을 되짚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먼저 사랑하는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경우를 보자. 이미 다문화 다민족 사회에 접어들고 있는 초기 단계에 있으며, 이에 대한 준비를 서서히 해나가야만 한다. 대도시인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에 내려가더라도 외국인노동자, 북한에서 목숨 걸고 넘어와 정착하려 애쓰는 새터민, 외국인 이주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우리, 나의 시각은 어떠한가?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인의, 호주인의, 유럽인의 인종차별을 성토하기에 앞서, 피부색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민족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노란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보다 조금 더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을 보면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 때문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들이 많다고 들었다. 한국에 올 정도면 꽤 엘리트였던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주요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이곳에 남아서 생활해가는 사람들이다. 불과 한 세대 후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외국인 이주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이 피부색과 어머니의 출신지 때문에 놀림을 받고 언어 습득에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빈번히 접하게 된다. 그들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방치된다면 이는 이미 불화의 씨앗을 키우는 셈이 된다. 언론에서 일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 의한 사건사고 몇 개만 연이어 터뜨린다면, 격한 감정대립까지 갈 가능성도 농후하다. 관용까지는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불관용으로 치닫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자메이카 출신 흑백 혼혈의 한 여성의 독백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 또한 같은 짓을 해오지 않았느냐?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피하고 무시하고 덜 존중했던 그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그들과 같으니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리라. 너는 네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기뻐한 적이 없더냐? 네가 흑인이 아니라고 기뻐한 적이 없더냐?’ 집주인에 대한 내 분노와 증오가 녹아내렸다. 나는 그 집주인과 다르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더 나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모두 죄인이다.” 이는 <아웃라이어>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 어머니의 자전적 책에 서술된 내용이다. 영국으로 유학을 오기까지 했지만, 피부색에 대한 차별을 받으며 슬퍼하고 기도할 때, 남들보다 조금 밝은 피부톤을 가졌다며 자메이카에서 자신이 무시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하는 이 대목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두 번째 짚어볼 것은 나의 불관용, 쇄국정책이었다. 나 역시 관용에서는 거리가 멀다는 걸 새삼 느낀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어두운 밤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릴 때,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지 못한다. 나의 딸이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피부색이 다르면? 나 역시 끙끙 싸맬지 모른다. 내 신앙을 드러내면서 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대로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더할 수 없는 폭력이라고 공지영씨가 책에서 말했던가. 나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지켜보았는지를 돌아보니 내 삶의 발자국이 부끄러움으로 점철된다.
그 동안 나의 마음을 꽁꽁 묶고 깊이 침잠해 들어갔던 수년의 세월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한 발짝 물러서 ‘잠수 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부족한 나 자신을 키우고 더 기본이 단단한 사람으로 나서고 싶어 택한 길이었지만, 소통의 부재에 답답해했고, 세상이 멀어지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그런 시기였기에, 이번 2차 레이스를 거치면서 나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오랜만에 실명으로 나의 글을 공개했다. 큰맘 먹고 한 일인데, 막상 열고 보니 우려했던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기대치 못했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번 과정을 통해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할 때, 내가 참 나이며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와 진정 즐거워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단지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를 할 때 괴로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렇게 즐기며 행복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이 더 놀라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힘겹게 찾은 길이니, 계속 이 길을 가야겠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끝까지 지켜가야겠다.
이 자리를 빌어 함께 경주를 펼쳐 주신 여러분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간 알게 모르게 글 좀 쓴다고 어깨에 힘들어갔던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 훌륭한 분들이었다. 독특한 시각과 노력, 필력으로 어느 한 분도 만만하지 않았다. 나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물론이다. 부족한 나의 이야기를 읽고 이런 좋은 기회를 열어주신 구본형 소장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꼭 얼굴 뵙고 인사드릴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