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혼민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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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잔디밭의 잡초를 뽑다 보면 잔디와 비슷한 잡초를 만나게 된다. 다 자라면 잔디와 다르지만 어렸을 때 잔디밭에 섞여 있으면 초보자의 눈에는 잘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사이비라 부른다. 벼 속에 섞여 있는 피 같은 것이다. 자연 속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어디에나 이런 사이비들이 있게 마련인데 생존의 목적은 똑같다. 비슷하게 보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무도회에서처럼 비슷하게 변장하는 것이다. 가면의 뒤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 있다.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구본형 p240>
어제도 모임이 있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니 갑자기 한 노래가 생각납니다. '새벽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싣고 떠나갑니다. ~~' 이제 갓 서른인데 서울 시스터즈의 노래가 생각나는 것도 웃기지만, 이 노래의 전체가사내용도 사실 오늘 드릴 말씀과는 별 상관도 없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좀 어이없기도 합니다.
전체 구절의 일부분이 제 상황에 비추어 떠오릅니다. 노래의 메시지는 달리는 첫차에 내 몸을 실은 이유를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라 하거든요. 하지만 서울행 버스를 타는 전, 그냥 달리는 첫차를 탄 모습만 떠올립니다. 노래 작자가 뭐라 하든, 그가 담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든, 전 그냥 일부 구절만 느끼고 재미있으면 그만입니다. 아련하고 슬픈 노래에서 황당하게도 저는 양심을 생각합니다. 내 것만 취하고 나머지 것은 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분노합니다. 정말 예민하고 성격 까칠합니다.
그 반대도 생각해봅니다. 마치 일부분이 전체인 듯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서울생활 2년, 강남에서 부동산전문가인 듯 행동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메일을 보내고 상담을 합니다. 이 땅을 사면 어떨까요? 부동산투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주택에 대한 투자경험이 전무한 제게 주택투자의 노하우를 묻습니다. 저는 다 대답합니다. 책에 나오거든요. 보고 말씀 드리면 됩니다. 사실 이메일 상담이라, 그들은 저의 표정과 말투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조언을 구하고 성취했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저는 거짓된 가면을 쓰고 조언을 합니다. 저는 진정 전문가가 아니기에 그것은 질문한 사람이 제게 보내는 신뢰에 대한 배반입니다.
사실 저는 2년간의 서울생활 이전에 6개월간 미친 듯이 땅을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자동차 트렁크에 텐트와 삽을 싣고 때로는 길 위에서 먹고 잤습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골읍내에서 노점을 하면서, 땅을 보고 시세와 환경을 조사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물건을 살펴보고, 그 중 몇 건은 제 명의로 낙찰을 받기도 했죠. 20대의 나이에 토지투자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년간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전부 투자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땅 구입에 들어간 비용 보다 교통비로 더 많이 들었죠.
그게 전부입니다. 그 6개월의 경험이 전부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6개월은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땅을 공부하러 다녔던 6개월의 경험 중 일부만 들려줘도 사람들은 저를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간혹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모르는 색다른 경험을 이야기하며 주제를 흐립니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오가며, 구본형 선생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 위와 같은 구절이 나오길래 밑줄을 긋고 수시로 저를 성찰하고 있는 중입니다. 비슷하게 보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사이비. 하지만 다행입니다. 상담자들에게 돈을 받지는 않았거든요. (웃음) 그래도 사이비는 사이비입니다.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이번 주말 저를 확 깨우네요. 서른살의 저, 다시 시작해도 충분하고도 남는 나이인지라 기쁩니다.
'새벽안개 헤치며 달려가는 첫차에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싣고 떠나갑니다.'
다음 구절은 '당신을 멀리 멀리~'입니다. 아마 화자는 아직도 그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의 '나'를 떠나보냅니다. 하지만 그때의 '나'도 사랑합니다.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2009.8.9.(일) 아침 9:23
민광동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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