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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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무심히 가을이 와 버렸다.
온다고, 온다고 귀뜸 한 번 없이 그렇게 가을이 왔다.
여름이라는 녀석도, 다정한 작별 인사 한 마디 안 남기고 훌쩍 떠났다.
매앰 맴, 매앰 맴 자정 넘어까지 귀 따갑게 들리던 매미 소리가
스르륵 스르륵 귀뚜리 소리로 바뀐 것을 얼마 전에야 눈치챘다.
너무 더워 새벽 한 두시까지 씩씩거리며 잠을 들척이던 내가
창문으로 불어오는 소슬바람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잠이 든다.
내 침대에 가을이, 이렇게 왔다.
나의 오래된 싱글 침대는 자세를 바꿀 때마다 삐걱거린다.
마음 내킬때면, 뱃살을 빼 준다는 누워서 자전거 타기를 시도해 보는데
허공에서 서너번 공중 발차기를 하자면 금방이라도 침대가 무너져 내릴까 와락 겁이 나기 일쑤다.
삐걱삐걱, 꿀렁꿀렁-그래, 운동은 헬스장에서 하는 거야.
머리맡에 항상 놓여 있는 몇 권의 책은 잠들기 전 수면제로 쓰인다.
되도록이면 진지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좋다.
감정의 동요없이 읽을 수 있는 경제 경영, 과학 인문 분야가 제격이다.
또 조금은 두꺼울 필요가 있다.
잠은 안 오고 밤은 깊어갈 때, 베게 위에 몇 권 책을 고이고 TV를 켠다.
자정이 넘으면 '잠 못드는(어떤 이유에서건) 성인'들을 위한 다양한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몇 권의 책으로 높이와 각도를 조절, 최상의 자세를 만들면 나만의 골드 클래스가 만들어 진다.
그 작은 침대에서 이처럼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다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렇게 여러 과정을 거치고 나면 어느새 새벽 두 세시가 넘어 버린다.
귀뚜리들도 잠들어 적막하기만 한 가을 밤,
달님은 어디 갔는지 고운 얼굴 찾아 볼 수가 없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이제 조금 서늘하기까지 하다.
딱히 할 것은 생각나지 않고 괜히 일어났다 앉았다 책을 펼쳤다 덮었다......
몇 번이나 봐서 다음 대사가 그대로 생각나는 '세렌디피티'나 '라 붐'을 돌려 본다.
그러다.
벌떡! 일어난다!
성큼성큼 방문을 열고 거실로 주방으로.
냉장고를 열면 달빛보다 뽀오얀 나의 포천 막걸리 한 병이.
꼴꼴꼴 작은 사발에 막걸리 한 잔을 채워 시원하게 쭈욱 들이킨다.
달달하고 쌉쌀한 막걸리 한 잔으로 가을밤의 모든 의례가 끝이 난다.
알싸한 기운에 기분좋은 졸음이 몰려오고 한껏 분위기는 무르익어
몸은 나긋나긋히 침대에 들러 붙는다.
그래, 이대로, 잠든다.
막걸리에 취했는지 가을밤에 취했는지 알 수 없는 이 밤.
바람도, 달빛도 조용히 나를 덮어
가만히 가만히 재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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