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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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상상했던 어린 시절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사는 것이 전부였다. 어떤 남편을 만날지 아이는 몇 명을 낳을지 그건 그저 부끄러움으로 간직한 채로 말이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될 막연한 숙제였다. 나의 첫 꿈은, 그러니까, 실체가 없었다.
사회적 시간표에 따라 10대와 20대를 보낸 서른 살의 나는, 숙제가 모두 끝나 있었다. 딸 둘이란 것이 조금 문제가 되어 셋째(아들) 낳으라는 얘길 듣긴 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일 뿐이었다. 실체가 없는 첫 번째 꿈은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라졌고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30대의 나는 아주 많이 흔들렸다. 다른 꿈을 꾸어야했기에.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빈둥거리며 머뭇거렸다. 아무런 꿈도 없이 일상에 흥미를 잃고 지루함 속에서 살아갔다. 사는 게 참 재미없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며 정작 어른이 되기를 피하며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나에게 다가갈 줄 모르던 그때는. 내가 누군지 물을 줄 모르던 그때의 나는, 그랬다.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
-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
***
엄마, 이 책 재밌어. 엄마도 읽어봐.
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안학교 진학을 앞둔 둘째 녀석이 내민 책의 제목은 <작은 거인들의 학교> (전병국, 토네이도, 2008).
‘위대한 나를 찾는 비밀을 배우는 곳’이라는 부제에 맞게 잘 짜인 이야기였다.
얇은 자기계발서를 재밌게 읽었다는 딸에게 ‘너의 씨앗은 뭔 거 같아?’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모른다고 답했다.
“입학 신청서입니다. 입학 자격이 되는지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모두 ‘아니오’인 경우만 입학이 가능합니다.”
교장이 내민 종이에는 4가지 질문이 씌어 있었다.
1. 부모님의 재산이 매우 많거나 명망 있는 집안인가?
2. 외모가 출중한가?
3.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는가?
4. 지금 일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가?
“이게 입학 조건이라는 말인가요?”
“네. 이곳은 자신이 작고 약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게 위대한 변화의 시작이니까요.”
나는 얼떨결에 4가지 질문 모두에 ‘아니오’라고 표시했다. 웃음은 사라졌다. 잔인한 질문들이었다.
―‘이상한 학교’ 중에서
작은 거인들만 가는 이상한 학교의 수업을 나도 읽었다. 두 번쯤 울컥하게 했던 이 책을 내 딸은 어떻게 읽었을까? 나이 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로 읽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걸 슬퍼하는 일이고 그래서 아픈 일인데. 아직 어린 내 딸은 그 고통을 알까? 잘 도망 다닐 수 있을까? 잘 아플 수 있을까? 그 아픔을 추억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귀띔해 주는 얘기들은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수업시간에 충실했다’는 대입 수석 입학자의 말처럼 공허할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무엇인가 하기 마련인 본능을 믿고 매일매일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시간에게 미루고 기다려야지. 요 며칠 내내 아침에 일어나면 이리 와보라며 또 큰 거 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엄마가 원래 이렇게 작았냐고 자꾸만 쳐다보며 참 작다고 놀려대니 말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것만 같은 삶인데 큰아이에 이어서 둘째까지 나의 눈높이를 넘어섰다. 얼마 전엔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휴대폰 화면에 ‘아장아장’이라 적고 빨간 하트를 그렸다. 내가 ‘아장아장’ 걷는다는 큰아이를 올려다보며 그만 웃고 말았다. 아이들이 내 키를 넘는 걸 지켜보는 일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것보다 더 신기한 일은 어른도 아닌 내가, 10대인 두 딸의 엄마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지만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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