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김미영
  • 조회 수 2589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0년 1월 25일 03시 31분 등록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상상했던 어린 시절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사는 것이 전부였다. 어떤 남편을 만날지 아이는 몇 명을 낳을지 그건 그저 부끄러움으로 간직한 채로 말이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될 막연한 숙제였다. 나의 첫 꿈은, 그러니까, 실체가 없었다.


사회적 시간표에 따라 10대와 20대를 보낸 서른 살의 나는, 숙제가 모두 끝나 있었다. 딸 둘이란 것이 조금 문제가 되어 셋째(아들) 낳으라는 얘길 듣긴 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일 뿐이었다. 실체가 없는 첫 번째 꿈은 이루어짐과 동시에 사라졌고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30대의 나는 아주 많이 흔들렸다. 다른 꿈을 꾸어야했기에.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빈둥거리며 머뭇거렸다. 아무런 꿈도 없이 일상에 흥미를 잃고 지루함 속에서 살아갔다. 사는 게 참 재미없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며 정작 어른이 되기를 피하며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나에게 다가갈 줄 모르던 그때는. 내가 누군지 물을 줄 모르던 그때의 나는, 그랬다.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

-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


***


엄마, 이 책 재밌어. 엄마도 읽어봐.

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안학교 진학을 앞둔 둘째 녀석이 내민 책의 제목은 <작은 거인들의 학교> (전병국, 토네이도, 2008).

‘위대한 나를 찾는 비밀을 배우는 곳’이라는 부제에 맞게 잘 짜인 이야기였다.

얇은 자기계발서를 재밌게 읽었다는 딸에게 ‘너의 씨앗은 뭔 거 같아?’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모른다고 답했다.


“입학 신청서입니다. 입학 자격이 되는지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모두 ‘아니오’인 경우만 입학이 가능합니다.”

교장이 내민 종이에는 4가지 질문이 씌어 있었다.

1. 부모님의 재산이 매우 많거나 명망 있는 집안인가?

2. 외모가 출중한가?

3.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는가?

4. 지금 일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가?

“이게 입학 조건이라는 말인가요?”

“네. 이곳은 자신이 작고 약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게 위대한 변화의 시작이니까요.”

나는 얼떨결에 4가지 질문 모두에 ‘아니오’라고 표시했다. 웃음은 사라졌다. 잔인한 질문들이었다.

―‘이상한 학교’ 중에서


작은 거인들만 가는 이상한 학교의 수업을 나도 읽었다. 두 번쯤 울컥하게 했던 이 책을 내 딸은 어떻게 읽었을까? 나이 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의 에너지로 읽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걸 슬퍼하는 일이고 그래서 아픈 일인데. 아직 어린 내 딸은 그 고통을 알까? 잘 도망 다닐 수 있을까? 잘 아플 수 있을까? 그 아픔을 추억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귀띔해 주는 얘기들은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수업시간에 충실했다’는 대입 수석 입학자의 말처럼 공허할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무엇인가 하기 마련인 본능을 믿고 매일매일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시간에게 미루고 기다려야지. 요 며칠 내내 아침에 일어나면 이리 와보라며 또 큰 거 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엄마가 원래 이렇게 작았냐고 자꾸만 쳐다보며 참 작다고 놀려대니 말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것만 같은 삶인데 큰아이에 이어서 둘째까지 나의 눈높이를 넘어섰다. 얼마 전엔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휴대폰 화면에 ‘아장아장’이라 적고 빨간 하트를 그렸다. 내가 ‘아장아장’ 걷는다는 큰아이를 올려다보며 그만 웃고 말았다. 아이들이 내 키를 넘는 걸 지켜보는 일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것보다 더 신기한 일은 어른도 아닌 내가, 10대인 두 딸의 엄마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지만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P *.210.111.178

프로필 이미지
우종헌
2010.01.27 12:21:08 *.110.156.201
그냥 일기장 보다가 있어서 다시 전면에 나선 건 아닌 듯 하온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얼굴을 제대로 못봤는데 이렇게라도 만나볼 수 있게 해주니 좋네요... 어떻든 좋은 변화 같사옵니다.
그리고 한가지만... 어른이 된다는게 꼭 슬프고 아픈 일인가요? 엄마가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게 즐거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치 미영씨가 여기를 만나서 신났던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보지요...
아주 오랫만에 들어와봤다가 반가운 글을 발견했네요. 자주 다시 드나들어야할 듯...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1.30 01:49:14 *.210.111.178
emoticon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59 나만의 북리뷰 #8 [아빠 구본형과 함께] 2 정승훈 2019.08.12 2586
958 직관 [2] J 2003.03.16 2587
957 위대한 리더, 평범한 리더 [1] 이활 2008.08.06 2587
956 다른 나라에 비해 열심히 일하는데 급여는 작을까? [2] 빠르미 2008.05.05 2588
955 칠순 아버지께 받은 댓글 자랑*^^* [3] 김나경 2009.01.23 2589
954 [영원의 시 한편]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정야 2014.11.03 2589
953 -->[re]작은 변화의 바람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1] 유민자 2003.07.08 2590
» [오리날다] 어른이 된다는 것 [2] 김미영 2010.01.25 2589
951 지난 일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1] 김신웅 2009.09.16 2591
950 [8기 예비 2주차 세린신] 나는 누구인가? file [8] 세린 2012.02.27 2591
949 성공 star 2003.05.11 2592
948 천안 마실을 다녀와서 [1] 숲기원 2006.05.07 2592
947 서방을 서방님으로 하세요(국화와 칼을 읽고) [3] [2] 이수 2008.12.18 2593
946 신사업인가? 신기루인가? - 신사업 추진의 성공비결 [1] 오병곤 2005.07.27 2594
945 [잡담]그녀를 만난지 15년 그리고 5479일 [5] 햇빛처럼 2011.12.21 2595
944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달님. 2004.06.26 2596
943 딸기밭 사진편지 35 / 사이 file [1] 지금 2010.06.02 2596
942 공인으로 산다는 것 - 우즈 & 이병헌 [1] 이기찬 2009.12.14 2597
941 우리 세째에게 남친이 생겼습니다. [5] 소은 2009.02.02 2599
940 면접여행 또 다른 이야기 file [4] id: 문윤정 2012.03.26 2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