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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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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1일 11시 36분 등록
 


기온이 뚝 떨어져 한파가 몰아쳤던 지난 주, 수업 끝나고 귀가 하는 길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나오는 남편을 만났다. 순간, 알 수 없는 텔레파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번호키를 누르며 현관문을 열면서도, 옷을 갈아입고 씻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던 남편의 한 마디. 한잔 할까? 바로 손잡고 촌닭 숯불바베큐 집으로 갔다. 시뻘건 불닭에 뚝배기 계란탕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참이슬 빨강 뚜껑 3번 땄다. 둘다 수다쟁이로 돌변하는 순간, 나도 몰래 툭 튀어나온 말. “같이 좀 자자!”


결혼하고 나서 나는 참, 더할 수 없이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이벤트를 준비하며 뭘 먹고 싶은지 물었을 때, 빛의 속도로 답했더랬다. 보신탕! (그때 내 눈동자는 하트 모양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작은 눈은 황소 눈이 되어서 감길 줄을 몰랐다. 군대 가서 몇 번 맛봤단다. 다른 건 없냐고 물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난 이미 군침만 꿀꺽거렸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결혼기념일 보신탕은 전골, 수육을 아이들과 나눠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냄비에 눌린 볶음밥까지 챙겨먹고 나면, 난 정말 뿅간다.


남편은 가끔(날 배려하고 싶을 때, 혹은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그걸 기억해내곤 한다. 지난 주말, 내 눈이 하트가 됐다. 게다가 스파 시설 장난 아닌 호텔 같은 모텔도 갔다. 세상엔 정말 별천지가 존재한다. 우리 집 리모콘 채널 수보다 많은 은은한 조명과 하얗고 뽀송뽀송한 시트의 커다란 침대는 더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벽면에 박힌 책상만한 TV는 컴퓨터에 저장된 영화를 꺼내 볼 수 있었다. 남편이 잠든 사이에 난 스파도 또 하고 DVD영화도 보고 다양한 채널을 돌려가며 보고 또 봤다. 아~ 정말 별천지 아닌가?


우리 부부는 술 마시면 진짜 친하다. 하지만 슬픈 일은 술이 없으면 국물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이런 사이가 됐을까?


서른의 나는 남편이 매일 마시는 그 술이 싫었다. 육아도 함께 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혼을 결심하고 몇 차례의 별거도 감행했다. 아이들과 셋이서 살 계획도 세웠다. 남편은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그땐 아이들과 마주앉아 앞으로는 우리 셋이서 살 거란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번번이 ‘금주’를 약속하는 남편의 각서를 핑계로 도돌이표가 되었다. 남편을 믿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이 자꾸만 걸린 것이 컸다. 작은 녀석이 아빠를 어찌나 좋아하던지… .


내 사랑이 저 멀리 떠나간 남편은 어지간히 외로웠던 모양이다. 다른 언니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잠을 자고 그랬단다. 나는 두 계절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돌이킬 수 있었다. 가정을 버릴 생각은 없다는 이유였다. ‘결혼’이란 게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요상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선택이란 것이 글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당연히 화가 났다. 그래서 다른 남자를 만나보기도 했다. 거기까지였다.


내 사랑은 아이들이었을까? 불안해하는 아이들 앞에 난 다시 마주앉아 이야기했다. 너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아빠랑 같이 살게. 그때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갈 테니까 엄마아빠 걱정일랑 하지 말고 너희들 일 챙겨. 그리고 남편에게도 전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그 사이 남편은 음주운전 경력 쌓아주시고. 내 피같은 첫 연봉 날려주시고. 나는 정말이지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혼은, 내 사랑은, 나를 또 다른 나로 변하게 했다. 이걸 쿨하다고 하나?


돌아보면, 지난 시간의 나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혼은 물 건너 간 듯하다. 타이밍이란 게 있다면 놓친 것 같다. 대신, 다른 결혼을 시도할 생각이다. 예쁜 별천지 모텔을 차례로 돌아볼 상상만으로도 재미가 솟아나니 말이다. 모텔에서 혼자 놀아봤나? (물론 남편이 잠든 사이였지만) 난 정말 그게 재밌었다.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혼자 씨익 웃으며 입꼬리 올라가준다. 그걸 보는 남편은 뭣도 모르고 괜히 만족해한다. 것두 나쁘지 않다. 이제 시작된 나의 또 다른 결혼. 아직까지 이건, 딴 남자보단 남편이 경쟁력이 있다!



나, 쉬운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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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1.31 18:08:36 *.251.229.87
'쉬운 여자'!  타이틀 좋네요.
'같이 좀 자자'도 좋구요.^^
요즘 미영씨가 올려주는 글들을 읽으며 세 가지 컨셉이 생각났어요.

하나, '살어? 말어?' 하는 중년부부가 어느 쪽으로든 결정하는데 지표가 되는 책, 일상의 단면을 사례화하여 독자에게  준거의 틀이 되게 도와주기.
둘, 그래도 다시 한 번 살아보기로 결정한 부부에게 '무늬만' 부부가 아니라, 진정한 일심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탐구.
셋, 위 글의 장면을 포함한 몇몇 장면을 좀 더 자세하고 리얼하게 소설식으로 재구성한 소설모음집.

이 중에 딱히 땡기는 것이 없다해도 충분히 컨셉을 잡을 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이 씨앗글이 될 테니
하고 싶은 대로 맘껏 쏟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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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2.05 12:11:10 *.210.11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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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10.02.01 09:28:18 *.123.215.74
솔직하면서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전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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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2.05 12:14:07 *.210.11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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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10.02.02 21:04:26 *.244.218.8
언니!
오랫만에 왔더니 언니글이 잔뜩 ㅎㅎ 반갑네요 ~~
가까이 살면서 매번 술한잔 하자 그러면서 맨날 못하고~!!
언니 한가해지시면 함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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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2.05 12:17:28 *.210.11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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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5 23:42:03 *.186.67.29
삶의 포스가 느껴지네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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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2.07 16:04:31 *.210.11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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