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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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두고 딴 여자를 만났던 건 말이지. 그냥 우연이었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 였다구. 빌어먹을 시간들이었지. 늪에 빠지면 그 모양이었을까. 나오려고 할수록 자꾸만 더 깊이 빠져드는. 그런 기분 첨이었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한편으론 쾌감이 느껴지는 거야. 싫지 않았지. 내 맘대로 되는 게 있더라구. 사랑이 아닌 건 알겠는데, 그렇고 그런 관계인 줄은 알겠는데, 그런 개떡 같은 관계를 즐기게 되더라구. 비밀처럼, 아주 은밀하게. 살짝 미쳤다고 생각하자 하면서 진짜로 미쳤었던 거지. 알면서도 그랬어.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할 말 없어. 개새끼라고 해도 들어야지 어쩌겠어.
지난여름에 만났어. 물론 그 전에도 가끔씩 연락이 오곤 해서 술 마시러 가선 몇 번 봤었지. 근데 그 여름부터는 이 여자가 자꾸만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하는데 귀찮단 생각이 안 드는 거야. 장사하는 건 줄 알면서도 그 전화가, 그 문자가, 기다려지더라구. 그러다가 따로 만났고, 술 취해서는 같이 잤어. 그랬더니 그때부턴 날 사랑한다는 거야.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면 약국에서 약 사다가 챙겨주기까지 하는데 진짜 기분이 묘하더라. 사랑 받는 느낌이었어. 아,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날 원하는 여자가 있구나, 아직은 내 물건도 쓸 만하구나, 그랬어.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좋았고, 약간은 즐기기까지 했어.
그래, 그 순간은 그 여자를 사랑했을 거야.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만 나기도 했으니까. 나한테 정말 잘 해 주더군. 그러니 어떻게 받기만 해. 난 그런 거 잘 못하잖아. 마침 뭘 자꾸 원하더라구. 다 사줬지. 날 사랑한다는데. 내가 죽여준다는데. 그 여자한테만은 멋진 놈으로 남고 싶어서 나도 잘 해줬어.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시작됐어. 그땐 내가 더 그 여자를 찾게 됐지. 일하느라 바쁜 거 알면서도 만나주지 않으면 미치겠는 거야. 새벽까지 기다렸지. 그리곤 멋진 나를 확인시켜 줬어. 그런 겨울을 보내다가 당신이 알게 된 거야. 어떻게든 넘겨볼까 했는데 정신을 놓는 당신을 보면서 내 정신이 돌아 왔나봐.
솔직히 난 당신이 그 정도로 반응할 줄 몰랐어. 뭔들 예상할 수 있었겠어만 암튼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 아, 내가 미쳤었지 싶었어.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 엎어진 물인 거 알면서 다시 주워 담고만 싶었어. 깨진 쪽박이란 거 알면서도 다시 붙여놓고 싶었어. 당신이 이혼하자고 하는데 눈앞이 깜깜하더라구. 난 이혼을 작정하고 그 여자를 만나진 않았었거든. 그냥 즐긴 것뿐이었어. 그 여자를 떠올리면 아랫도리가 묵직해 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잘못된 거란 건 알고 있었다구. 언젠가는 끝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끝은 당신이 알게 되는 날이겠구나 했으니까. 뭐, 결국은 그렇게 됐구.
그 여자는 진짜 그렇게 끝났어. 당신과 만나서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 한동안 연락하더니 포기했나 보더라구.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메시지 답장도 안했거든. 지금은 나도 잊었어. 솔직히 말하면 좀 쪽팔려. 술집 여자가 날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했겠어.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거기에 혹해서 빠져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참 한심한 놈이지 싶어. 그런데 그거 알아. 내가 정말 원한 건 당신이었다는 거. 개소리한다고 욕해도 할 수 없어. 그땐 분명히 그런 오기도 있었어. 아니 얘가 날 뭘로 보고 외박을 해도 신경을 안 쓰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아무튼 미안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당신은 내 말을 별로 믿는 거 같진 않지만 난 진짜 맹세했다구. 그땐 보이지도 않던 애들도 이젠 보이고 내 나이도 생각하게 되구. 나 늙나봐.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살아봐야지 싶어. 남편노릇, 아빠노릇, 아들노릇, 사위노릇, 차례차례 노력해 볼게. 나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잖아. 그래, 알았어. 나쁜 놈 맞아. 그러니깐 기회를 한 번만 줘 보라구. 진짜 한 번만. 또 그러면 그땐 내가 알아서 이혼해줄게. 아, 이건 취소다.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거니까 날 위해서 아파도 안 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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