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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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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6일 01시 02분 등록
  외부의 충격에 대한 자아의 유지 수단을 프로이트는 방어기제라고 정의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많은 심리증상을 명쾌히 설명해 준다. 인간의 존엄성은 세계 유일성에서 나오고 그 유니크함이 존재의 근거가 된다. 유니크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작동하는 심리작용의 원천이 무의식이고 모든 심리의 출발점은 성욕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이 유니크함을 정상인이라고 부른다. 자의식은 그 정상인으로도 욕구불만이어서 자아를 더 강화시켜나간 것이 아닐까한다.

  대부분의 서양성공학 책들은 무의식을 의식이 통제할 수 있도록하는 기교들이다. 삭티 거웨인도 무의식을 '아이'라고 칭하고 의식화하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융의 입장에서보면 본말이 전도된 모양이다.  방향성을 떠나 무의식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더라고 그리 바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무의식과 의식, 진아와 자아는 나에게 개념혼동으로 다가온다. 마치 융의 표현처럼 '나는 그가 말하는 지혜가 하나의 고유한 깨달음인지, 수천 년 이래 저잣거리를 돌고돌던 격언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심정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의식이든 비의식이든 잠재의식이든 서양학자의 정의대로 나를 개념잡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무의식을 眞我 또는 佛性으로 치환하고 自我는 그 진아 또는 불성을 가리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이런 이해가 지금까지의 나의 기본 개념이다. 문제는 무의식과 자아와의 관계이다. 이부분은 아직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가끔, 포말한 파티에 참석하기를 좋아한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구두를 깨끗이하여 가슴을 펴고 시선을 주기도하고 시선을 받기도하는 긴장이 즐겁다. 그러나 나의 감성은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대화가 없고 서로가 피곤한 모습. 이 모습이 내가 자의식하면 떠 올려지는 이미지이다. 정작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해 보임으로써 스스로 행복하다고 의식하는것. 끝임없이 행복하다고 되뇌이면, 무의식이 행복하지 않다고 신호주면 본체가 미칠것 같아 진짜 행복한 느낌이 들게 하는걸까? 예수를 간절히 고대하면, 그 의념이 예수를 발현시키는 많은 수도승과 수녀의 경우와 다를까? 도에 가까이 가면 자아가 사라지므로 자아가 도을 깨달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는 또 다른 경우일까?

  그러나, 무의식을 습관이나 성격으로 이해한다면 할말이 제법 된다. 두 딸이 있다. 기질은 어느 부분 많이 비슷하다. 나의 경우 성격상 결함의 시원이 사춘기라는 결론을 내린터라 큰 딸의 현재 사춘기가 예사롭지 않다. 늘 집중한다. 하지만 많은 독서 많은 생각 속에서도 성격상 결함을 대물림 하지 않을 어떠한 방법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끔 나타나는 나의 싫은 모습을 딸에게서 볼 때 정말 무력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을 책임을 물어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연구원으로 지망하게 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연장이다. 역방향의 습관이나 성격을 나다움의 순방향하고자하는 동기이다.

  무의식은 나에게 敬而遠之의 대상이다. 신성성과 요악성이 함께 느껴진다. 언제가는 탐험해야 할 숙제이지만 두려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융의 이야기는 한결 그 요악성을 걷어준다. 하지만 여전히 무의식에의 여행을 위해서는 두려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아직 이 두려움의 뚜렷한 발원을 모른다. 평생을 안고 산 두려움이다. 그래서 현재까지의 삶이 남들이 다니는 길만, 그것도 다른 사람의 뒤만 따라 다니는 격이었다. 융을 읽으며 이글을 적어가며 나는 무의식을 적기위해 제2의 인격을 만나기 위해 두려움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된다.

  (그리고 후기...)
  지난 3주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1주 일찍 마무리 지은 것은 4권의 책을 읽어가며 예전에 읽다만 많은 책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휴게소에 들러 그 책들을 마저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들 중에는 박현의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도 있고,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있고, 기세춘의 '노자'도, 서대원의 '주역'도 있습니다.  내 글이 아직은 일상 속에 파고 들지 못한다는 얻음도 있었고, 글로 풀어 낼만한,하고 싶은 말의 절실함도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내 속의 고민이 드러내면 작아질 수 있다는 것도, 전체시간이 아니라 집중된 시간의 중요성도 새삼 배웁니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됩니다만 그 동안 정리할 것들이 선명하여 또한 즐겁습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배우고 때때로 시험치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농담도 싱그럽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만인가하는 감격이 제일 큽니다. 항상 읽기만 하던, 부모님, 아내 운운하는 그 헌정사에 대한 욕심도 조금은 생깁니다. 부족함을 너그럽게 봐 주신 제현들께 감사드립니다.
IP *.151.7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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