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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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막연한 생각은 늘 나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탁월하게 머리가 좋았던 것도, 예쁜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막연하고 근거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한 두 번씩 듣게 되는 똑똑하다는 칭찬, 생각이 깊고 조숙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또래보다 좀 많은 책을 읽으며 나 자신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런 환상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을 주기보다는 현실 속의 평범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더 강하게 했다. 현실 속에서 더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하고 즐거워지기 보다는 늘 책 속으로 도망가서 나를 잊어버리는 것이 더 편하고 행복했다.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보다는 ‘난 너희들과 좀 달라’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으로 늘 겉돌았다.
커가면서 그렇게 탁월하지 못한 자신을 점점 느끼게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항상 모범생이었지만 이런 괴리감은 나를 점점 힘들게 했고 나를 더욱 환상 속으로 도피하게 했다.
지금은 이런 마음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기도 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른이 되면서 평범한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생각이 숨어 있었던 듯하다. 무난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회사에 들어가 정신없는 20대를 보내면서도, 앞으로 무언가 새롭고 멋진 인생이 펼쳐지리라, 아니 펼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누구나 겪는 서른 살이 나에게 더 힘들었던 이유였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 이대로는 그냥 이름 없는 한 사람으로 살다가 없어져 버릴 거라는 생각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 회사생활을 통해 조직을 배웠고 일이란 무엇인지도 배웠지만 꽉 짜인 틀 안에 나를 꿰어 맞추기에 한계를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돌을 앞둔 아기가 있었지만 행복한 가정이 나를 현실에 눌러 앉히기엔 무언가가 부족했다. 오히려 가정이 평온할수록,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을수록 더 갈증을 느꼈다.
결국 나를 적셔줄 무엇을 찾아 만 7년의 회사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숨 돌릴 사이 없이 돌아가던 일상을 탈출한 그 순간부터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탈출’ 자체에 집착했으나 갈 곳을 고민하지 못했고 나 자신을 찾아가기보다는 더 화려하고 멋진 무엇을 찾았던 결과였다.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했던 나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늘어난 시간은 나를 더욱 헤매게 했다. 주어진 일상의 틀을 한 번도 깨보지 못했던 나에게 이런 상황은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나타나 손짓한 순간, 새로운 회사에서는 더 멋지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기 암시와 또 다른 환상을 그리며, 3개월간의 나의 방황은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나의 재량권도 넓었고 일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 일들에 파묻혀 한동안 시간가는 줄 몰랐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충족감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며, 겉으론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도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늘 있다는 칼 융의 말처럼 내 안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 심해지고 참기 어려워졌다.
짧은 방황을 겪고 다시 한 번 본질적으로 똑같은 회사생활을 하면서 드디어 나는 내 안의 갈증의 답을 밖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14년간의 길고 긴 방황의 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자의식과 나만의 껍질로 싸여있던 내가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는 간단한 진리를 온 몸으로 깨닫기 위해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두 번째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찬찬히 내 안을 들어다보면서 내가 그동안 탁월한 사회인으로 살아오면서도 괴리감을 느꼈던 이유와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힘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밖에서 어떻게 보던 관계없이, 스스로에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 안의 자화상과 나의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해 무엇이 부족한지도 알게 되었다.
또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맞부딪쳐야 하는 이유도 발견했다.
많고 많은 ‘부적응자’ 중 한 명이었던 내가 앞으로는 ‘창조적 부적응자’로 바뀔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가끔은 예전의 습관으로 돌아가 조급해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온전히, 온 몸으로 내 삶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내 인생의 목표이며, 이것이 내 안의 환상을 만족시키는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이 확신이 오늘도 나를 움직이는 나의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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