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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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단상
1.
서른 즈음이었을까. 어른들의 잔소리를 하나씩 귀담아 듣기 시작한 것이.
어머니가 늘 식사자리에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한 두 숟가락 정도가 남으면, “맨 밥 그릇 긁으면, 부모 속을 긁는다” 라시며 물을 부어 먹을 것을 권하곤 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 남매는 더 남은 말씀들이 이어지기 전에 ‘아, 네~’라는 말로 말씀을 삼켰다. 정신없이 시간이 쫒겨 먹는 둥 마는 둥 밥그릇을 비우는 처지에서 귀담아 담을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그 말씀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밥풀이 달라붙은 밥그릇은 바로 설거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라도 물에 불리면 한결 쉬운 걸, 서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설거지를 직접 해보면서 알게 되었다.
2.
아주 가끔씩 사무실 컵을 씻는 일이 있다. 몇 해 전 후배 하나가 “그런데 형은 왜 컵을 안씻어요?” 라고 다소 도발적으로 물어 왔을 때 무엇이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당시 만 해도 사무실에 고작 셋이서 일할 때였고, 나는 국장이고, 남자이고, 나이 차이도 많은 편이어서, 그냥 그려러니 했던 일이었다. 사실 굳이 내가 컵까지 씻어야 하나, 그럴 시간이면 다른 중요한 일들을 더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일테니까.
컵을 씻는 일은 주로 막내 격이었던 후배의 차지였다. 그런데, 녹차 티백의 실주머니를 컵고리에 묶어 두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컵 씻기가 사납단다. “알았다”고 매번 답을 하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는 그 후배도 그려러니 하고 포기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년이 지나고, 사무실 식구가 여섯으로 늘고, 손님들이 확 늘었고, 또한 손님들 대부분이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어서 전보다 더 자주 컵을 씻어야 할 일이 생겼다. 굳이 누구의 일이라고 미뤄둘 일만이 아니었다. 내키는 대로 한 번씩 컵을 씻으면서, 컵고리에 묶어 둔 실을 푸는 일이 생각보다 성가신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실로 행(行)하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할 일들이다.
3.
오늘 제65회 식목행사를 가졌다. 전주시의 각 부서에서 인원들이 차출되어 나왔고, 이러저러한 단체들에서도 회원들이 참여해서 한 2백명 정도가 함께 나무를 심었다. 풍치가 좋은 목백합 서른 한그루, 작살나무 오백그루, 그리고 나라꽃인 무궁화도 삼백그루 정도 준비를 했다. 시간 반 정도 지나자, 대략 심어야 할 곳의 나무들이 자리들을 잡았고, 수고했다는 인사들을 나누며, 저마다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나는 후배들과 함께 오늘 주관단체인 푸른전주운동본부 사무국 식구들과 함께 마지막 뒷마무리를 했다. 막 짐을 옮겨 심고, 차로 나누어 타려는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나무들을 묶었던 비닐 끈이었다. ‘어라?’ 한 두 그루가 아니었다. 세상에, 공무원들이 맡아 심었던 무궁화 삼백그루가 다 그런 상태였다. 이미 차에 올라탄 후배들을 다시 불러 내려서 가위와 칼을 나누어 들고 일일이 비닐 끈을 잘랐다. 부피생장을 하는 나무들에게 비닐 끈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목을 조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었다.
4.
비단 행정업무를 보는 공무원들에게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나 역시 군 생활을 할 때, 이런저런 대민지원에 자주 동원되어 나갔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우리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몇 시에 끝나는지, 간식은 언제 주는지, 선임하사의 눈치를 살피는 일 뿐이었다. 내가 심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내가 베는 벼를 누가 먹게 될 것인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5.
선사들은 말한다. 늘 깨어 있으라고.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있을 줄 아는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밖에 뛰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를 잘 닦아놓고, 행주를 빨아 널어 놓을 줄 아는 사람.
좌변기의 뚜껑을 올리고 일을 볼 줄 아는 남자.
눈, 비 오는 날 택시에 오르기 전에 신발을 털고, 우산접어 털고 탈 줄 아는 사람.
선사들은 그렇게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 이른 새벽에 비, 우십니다.
한달 전 매화는 이미 지천 이 지만
왜 꽃비는 오고 지랄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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