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강경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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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에 내 이름을 이곳 홈피 댓글 어딘가에서 보고 낯설지만 그러나 그리운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빨리 은혜처럼 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의 부름에 내가 충성할 수 있을 최초이자 마지막일수도 있을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이미 남편과 치매로 편찮은 시아버님을 방문하기로 한 약속은 두 번째로 밀리면서 나는 외조로서의 동행이 아닌 억지춘향을 납치하듯 가족을 끌고 정신없이 속초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웬만해선 긴장하지 않는 나도 그들이 모여 있는 세미나실로 들어섰을 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격의 없이 웃고 모임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이런 자유는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그들은 자유로웠으나 공유하는 목표가 있어 보였고,
사부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이 배여 나오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주었지만
그들 자신이 각각 내뿜는 포스도 만만찮았다.
다를 것이라 예측은 했지만 나는 역시 이방인이었다.
밤늦은 시각에 술 마시고 얘기하고 노래하는 그런 곳에 던져진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대학 졸업 후엔 그런 삶이 있음을 한 25년은 잊고 산 듯했다.
사람과 분위기 모든 것에 낯설어 어리버리한 내게 구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재미있게 즐기다 가세요”라고.....
정말이지 나는 청강생의 자격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할 수가 없었고
그런 내가 정말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
6기 연구원과 선배님들이 선생님과 어울려 격의 없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그 곁을
청강생 주제에 우두커니 서 있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원래부터 저렇게 자유로운 사람들 이었을꺼야” 라고 편리하게 생각해버렸다.
그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듯 보였고 자신의 모든 내면의 모습을 어떠한 억압없이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이드 에너지가 막강한 사람들 일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가고 공기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대학 때 형들과 어울려 나이트가고 축제 때 술 마시고 토의하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참 자유로웠는데 ....
너무 오래동안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문제에 오래동안 갇혀 있었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 무관심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기 연구원 합격자들의 장례식을 보면서 나도 내 장례식장이 떠올랐고
거기서 내 문제에 억압되어 이 땅을 지옥처럼 살다간 내가 유령처럼 보였다.
자유는 오래동안 갈망한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껍질은 벗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지구 한 귀퉁이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나?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내 문제가 가장 무겁고 풀기 어려운 문제일거라고 생각하며
어린아이같이 징징대며 산 것이 아니었을까?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자만이 힘을 가질 것이고
변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들도 원래부터 자유로웠던게 아니고
애써 노력해서 변화된 결과 저렇게 할 수 있게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 역시 내가 오래동안 배웠고 습득하여 마치 원래 내것이었던처럼 가지게 된
나의 포기할 수 없는 초자아를 벗어야만
내가 정말 얻기를 갈망하는 자유를 하나씩 가질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았지만 내게는 긴 시간이었다. 배움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내게 권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10년 6개월 동안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교수님 한곡하세요” 라고 학생들이 조르면 마지못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듯 나가서 노래를 부르던 내가....
내 존재에 아무도 관심없고 그들간의 자유를 만끽하는 그곳에서
내 껍질을 벗고 무대에 올라가 내가 가장 갖기를 원하는 그것 “열정”을 불렀다.
그것은 나로서는 크나큰 변신이었다.
그리고 내가 변경연을 통해 수없이 죽어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암시하는,
나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무대로 오르는 그 길에 죽은 내 자아가 무참히 내 발에 밟히고 있었다.

그때 그때에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제는 허투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해요. 때때로 자기다운 주장과 격렬한 싸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지 않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살아있음의 표현이고 존재방식이기도 할테지요. 각자의 취향이란 상황에서의 나타남, 다만 마음을 어디에 두고 가느냐 일테지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자연스러움은 아니겠는지요.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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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둘이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네. 다만 분위기가 나이 많은 신참에게 너무 머쓱해 보여 동질의 아줌마 같은 수다로다가 끼어들긴 했지. 재미로 넘기자는 뜻에서. 대강 넘어가리라 믿으며.
재엽. 이런 이야기 할 때는 한참 연장자의 이름이기도 한 명칭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지. 그 정도 예의는 지켜가며 따져야 지성인이지. 몇 몇이 이런 일들을 아주 밥 먹듯이 해대는데 앞으로 절대 자제하게!!! 메롱~
2010.04.13 18:25:58 (*.216.38.10)
※ 때때로 어떤 이들은 의견을 제시할 때에도 이름을 바꿔가며 전부를 속이듯 이상한 덧글을 달기도 하는데 그런 행위 역시 예의에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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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내가 한 살 위라는 이의 호를 나 딴엔 친금감으로 불렀다가 저녁을 먹고 나온 여러 사람이 있는 앞에서 정강이가 발로 채이듯 공개적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너, 이리와. 내가 니 친구야? 어디서 까불고 있어?" 그날 난 즐거운 모임 자리라 상대에게 술잔을 건네고 나온 직후였다. 어안만이 벙벙했다. 하지만 뒤 돌아선 그의 행동은 그랬다. 왜 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을까. 마흔 중반도 넘은 40대가 고작 2,30대 후배들 앞에서. 가슴 아프게 지켜본 이도 있었다. 모른 척 하고는 있지만. 그래, 나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참 많이도 울면서... 지금도 그 부류에게는 그렇게 비치면서. 하지만 그대 같은 또 다른 한참의 연하에게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다. 제발 함부로 까불지들 마시라. 인생 다 산 것도 아닌데. 죽은 이후에도 어떻게 판명날지 아무도 모르는데.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사람 나오시라. 역시 메롱.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배우고 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오늘도.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다만 씩씩하게! ^-^*

정말이지 나는 청강생의 자격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할 수가 없었고
그런 내가 정말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
6기 연구원과 선배님들이 선생님과 어울려 격의 없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그 곁을
청강생 주제에 우두커니 서 있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10년 6개월 동안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교수님 한곡하세요” 라고 학생들이 조르면 마지못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듯 나가서 노래를 부르던 내가....
내 존재에 아무도 관심없고 그들간의 자유를 만끽하는 그곳에서 .....
여전히 저는 백일하에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 허물없이 어울리는 여기 연구원님들이 낯설고 어쩌면 외계인 같습니다. ^^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질적이게도 동경합니다.
과감히 깨어버리고 한발짝 나아가신 청강생님께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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