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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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임치료를 받으며 어렵게 임신을 한 동생네 부부가 다녀갔다. 입덧이 심해서 잘 먹지 못한다고, 마침 우리 동네 맛집이 TV에 방송되는 걸 보고 겸사겸사 들렀다고 했다. 다행히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제부가 더 좋아했다. 또 뭐가 먹고 싶은지를 물으며 행복을 나누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 들러 차를 마시다가 제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 책…, 왜 읽으세요?” 천 페이지가 넘는 러셀의 ‘서양철학사’였다. 난 버릇처럼 어리바리가 되었다. 결국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동생네 부부가 다녀간 날, 내 글을 사는 곳에서 피드백을 주었다. 드라마작가처럼 써 보라고 했다. 솔깃했다. 부부갈등을 좀 더 강조해서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길게 쓰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싸움이 흥미로운 주제인가? 막장 드라마에 중독된 탓인가? 순간 나는 멍했다. 내 글이 거기서 거기인 일상을 다루는 한계인 까닭이다. 주사위 같은 나는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면이 제한되어 있다. 나름 다양하지만 ‘싸움’은 내 분야가 아니다. 게다가 부부싸움은 더더욱 젬병이다. 오히려 피하기 대장이다. 나는 싸울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돌아보기도 싫은 걸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기 싫었다. 동생네 부부처럼 서로 행복을 나누는 거라면 모를까, 둘이 같이 싸우고서, 아니 툭하면 일방적으로 당하고서 왜 허구한 날 나만 들여다보나. 나는 이제 그 짓거리 멈추고 싶다. 덕분에 내 글은 또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다시 보내달라는 그 글, 나는 아직도 쓰지 못했다. 삶이 따라가지 못하는 글쓰기, 글쓰기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책읽기 앞에서 나는 또 제자리걸음이다. 읽으면 뭐하나 하면서 머리를 처박고 무거운 눈꺼풀과 싸우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싸울 줄 모르는 내가 그나마 선택한 자신과의 싸움, 나의 일상은 우끼고 자빠졌다. 먹고 자고 싸고 섹스 하는, 소나 말도 하는 것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찾는, 어쩌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매일 지친다. 물 위에선 고고한 척 우아 떨지만 물 밑에선 오두방정을 떨며 발을 젓는 백조처럼, 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만 꼭꼭 숨고 싶어진다. 그래서 숨는다. 엉덩이를 다 까놓은 채 대가리를 처박고 숨은 척을 하는 토끼처럼, 내 안으로 머리만 숨긴다. 그러다 잠이 든다. 이런 젠장.
‘꿈꾸기’가 꿈인가. 어쩌면 내가 찾는 나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뭔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알려질 수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알려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엔 질 것이 뻔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 다 나의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면 쉽게 살아갈 수 있으련만, 난 오늘도 내 안에 머리를 처박고 숨어서 잠이 든다. 꿈속에서는 제부의 물음이 여전히 계속된다. “그런데 이 책…, 왜 읽으세요?” 나는 언제쯤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싶기는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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