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있는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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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슬림 맨솔. 가로수길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숨어있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무지 태연한 척 담배갑을 잡고 계산을 하려는데 아줌마가 피식.
"그거 전시용 빈갑이예요. 이거 드려요?"
"예~에'
갑자기 목소리가 꺽여 기어들어가고 만다. 무신 죽을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라이타있죠?"
가게아줌마가 우습다는 듯 연신 힐끔거린다. 느낌탓인가?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하면서 도서관 대신 까페에서 읽고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몬가에 빠지면 옆에서 굿을 해도 모르는 타고난 몰입형인지라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흐르는 도서관보다는 의자 편하고 커피 맛있는 까페가 더 낫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 봐서도 5분도 안걸리는 까페촌을 놔두고 차비들여가며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3천원대의 아메리카노 하나 들고 자리를 잡으면 짧게는 서너시간 길게는 하루종일도 버틸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책읽다 지치면 잠시 주파수를 돌려 옆테이블 어린것들의 대화에 가상으로 참여하거나 천장에 난 출입구를 통해 나만의 4차원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추운 2월이 가고 날이 좋아지면서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고나는 오픈형 테라스와 거기에 앉아 남의 시선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배를 피워대는 여인들이 바로 그것. 날이 따뜻해지자 본능적으로 테라스쪽에 자리를 잡으려다 머리위에 데롱거리는 '흡연석' 표지에 깜짝 놀라 안쪽자리로 들어가기를 수차례. 유럽형 까페의 개방감이 흡연자들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뭔가 억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 억울한 것은 담배를 물고 테라스에 앉아있는 여인들의 표정이었다. 분명 자유로워 보였다. (딴지 걸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로 창을 닫으면 될 일이니까.)
꽃다운 여인들의 흡연표정에서 시대의 변화를 운운하다니 참 표피적인 감상이라는 생각을 나 역시 지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녀들의 표정이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녀들과 너무나 달랐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라는 라벨이 얼마나 판에 박힌 오해들을 몰고다니는지를 알고도 저럴 수 있을까? 그녀들과 나사이의 10년이 이렇게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들의 10년후는 나의 지금과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되고..이런저런 이유들을 접수하고 나니 나에겐 더이상 선택이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누가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재고 따져서 나에게 가장 이로울 것 같은 길을 골라 스스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내 앞에 펼쳐진 너무나도 안전하기만 한 길. 그 길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길을 따르는 시간이 즐겁기는 하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나 고집스럽게 이 길에 매달리는가?
담배를 피워물고 대기를 향해 연기를 뿜었다. 폐속으로 파고 든 매캐한 연기에 호흡은 가빠지고 담배에게 자리를 빼앗겨 왼손으로 옮겨진 연필질도 형편없이 서툴다. 서둘러 연필과 담배의 위치를 바꾸고 다시한번 불을 붙여보지만 여전히 흡연행동은 독서활동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한모금 넘어가자 마자 텁텁하게 고인 침은 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당황한 손놀림에 물잔이 엎어지고 순식간에 테이블은 난장판. 이게 무슨 자유야?
2010.5.12 흡연이 그녀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리라는 가설은 기각하기로 한다. (자유가 그녀들에게 흡연을 준 거라면 자유를 기각해야 할 판이니..이건 훨씬 뒤로 넘겨 놓기로 하구! @@)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구? 이렇게 싱겁게 끝낼거면 무슨 사설이 그렇게도 길었던 거냐구?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앞으로 가슴속에만 품고 살았던 수많은 가설의 검증을 시도할 것이다. 어떤 가설은 채택될 것이도 또 많은 가설은 폐기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겠지? 내가 이 길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를. 혹은 내가 정말로 있어야할 새로운 길의 의미를.
이로써 나는 내 운명적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를 대신하고자 한다..gif)
IP *.53.82.120
"그거 전시용 빈갑이예요. 이거 드려요?"
"예~에'
갑자기 목소리가 꺽여 기어들어가고 만다. 무신 죽을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라이타있죠?"
가게아줌마가 우습다는 듯 연신 힐끔거린다. 느낌탓인가?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하면서 도서관 대신 까페에서 읽고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몬가에 빠지면 옆에서 굿을 해도 모르는 타고난 몰입형인지라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흐르는 도서관보다는 의자 편하고 커피 맛있는 까페가 더 낫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 봐서도 5분도 안걸리는 까페촌을 놔두고 차비들여가며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3천원대의 아메리카노 하나 들고 자리를 잡으면 짧게는 서너시간 길게는 하루종일도 버틸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책읽다 지치면 잠시 주파수를 돌려 옆테이블 어린것들의 대화에 가상으로 참여하거나 천장에 난 출입구를 통해 나만의 4차원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추운 2월이 가고 날이 좋아지면서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고나는 오픈형 테라스와 거기에 앉아 남의 시선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배를 피워대는 여인들이 바로 그것. 날이 따뜻해지자 본능적으로 테라스쪽에 자리를 잡으려다 머리위에 데롱거리는 '흡연석' 표지에 깜짝 놀라 안쪽자리로 들어가기를 수차례. 유럽형 까페의 개방감이 흡연자들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뭔가 억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 억울한 것은 담배를 물고 테라스에 앉아있는 여인들의 표정이었다. 분명 자유로워 보였다. (딴지 걸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로 창을 닫으면 될 일이니까.)
꽃다운 여인들의 흡연표정에서 시대의 변화를 운운하다니 참 표피적인 감상이라는 생각을 나 역시 지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녀들의 표정이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녀들과 너무나 달랐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라는 라벨이 얼마나 판에 박힌 오해들을 몰고다니는지를 알고도 저럴 수 있을까? 그녀들과 나사이의 10년이 이렇게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고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들의 10년후는 나의 지금과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되고..이런저런 이유들을 접수하고 나니 나에겐 더이상 선택이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누가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재고 따져서 나에게 가장 이로울 것 같은 길을 골라 스스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내 앞에 펼쳐진 너무나도 안전하기만 한 길. 그 길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길을 따르는 시간이 즐겁기는 하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나 고집스럽게 이 길에 매달리는가?
담배를 피워물고 대기를 향해 연기를 뿜었다. 폐속으로 파고 든 매캐한 연기에 호흡은 가빠지고 담배에게 자리를 빼앗겨 왼손으로 옮겨진 연필질도 형편없이 서툴다. 서둘러 연필과 담배의 위치를 바꾸고 다시한번 불을 붙여보지만 여전히 흡연행동은 독서활동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한모금 넘어가자 마자 텁텁하게 고인 침은 또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당황한 손놀림에 물잔이 엎어지고 순식간에 테이블은 난장판. 이게 무슨 자유야?
2010.5.12 흡연이 그녀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리라는 가설은 기각하기로 한다. (자유가 그녀들에게 흡연을 준 거라면 자유를 기각해야 할 판이니..이건 훨씬 뒤로 넘겨 놓기로 하구! @@)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구? 이렇게 싱겁게 끝낼거면 무슨 사설이 그렇게도 길었던 거냐구?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앞으로 가슴속에만 품고 살았던 수많은 가설의 검증을 시도할 것이다. 어떤 가설은 채택될 것이도 또 많은 가설은 폐기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겠지? 내가 이 길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를. 혹은 내가 정말로 있어야할 새로운 길의 의미를.
이로써 나는 내 운명적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를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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