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강경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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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역사다‘ 라고 카를융은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으로 자신의 생애를 표현했다. 나에게는 무의식이 무엇인가? 나의 말년에 나는 내 인생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 나는 미리 당겨서 나의 무의식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무의식이 내게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일부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나를 미는 어떤 거대한 동력이 나의 마음 밑바닥 또는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며,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해준 것 같다. 그것이 무의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것의 정체를 몰랐으므로 나는 그것을 운, 축복, 우연, 은혜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었다.
나는 30대 초반에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이 되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그것도 성인이 되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 속으로 노출되는 사건임을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었다.
개종하기 전, 나는 누군가가 나를 돕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태몽으로 이야기해 주신 것, 간혹 운명을 볼 줄 안다는 사람에게서 듣고 오셔서 해주시는 이야기, 나의 성장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종합해 볼 때, 나를 돕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고, 그 존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해 간다는 그런 암시를 계속해서 받고 있었던것 같다. 실제로 그 믿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운이 억세게 좋은 편에 속했다.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기막힌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때론 기대한 일이 예고 없이 내 앞에 닥치거나, 무서운 직관력이 갑자기 생겨 모르는 것을 알아버리는 사건, 세미나 준비를 못했을 때 휴강되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정말 중요한 시험에서 이미 본 것이 그대로 나와 버리거나, 교통사고가 비켜가는 등등..... 나는 운이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일 때 나는 행복했었다.
어느날 나는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되었다’라는 표현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종의 의사가 없는 나를 순전히 ‘그분’의 의지로 한날 갑자기 개종의 사건이 닥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내게 일어나던 행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꿔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더 많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분’이 섭리하셔서 자신의 자녀를 곤경에서 건져주거나 우리를 잘 인도해 주신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교신자였을 때 내 운은 축복이었고 내 삶은 기대해볼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되고 나서 그분의 은혜가 오히려 재앙이 되는 재앙이 닥쳐버렸다.
기독교를 안 믿었을 때, 하나님을 몰랐을 때 나는 내게 일어나는 기막힌 우연한 사건들을 행운으로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 나를 뒤에서 돕는 존재가 있음을 확증해주는 기쁜 사건이라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 마다 너무 행복했었다. 개종 후 최초 몇 년은 나는 실존하는 하나님 때문에 늘 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발생하는 행운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은혜가 당연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당연하므로 내게 일어나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 이상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누구나 축복해주신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축복은 당연한 사건이고, 행운으로 이해할 사건이 발생해도 그전처럼 기뻐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행운이 일어나지 않는 때에 발생한다. 조금이라도 나쁜 일이 발생하면 나는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심은 나를 벌주기 위함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야단치기 시작한다. 물론 하나님이 욥의 고난도 허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고난이 닥치면 나는 오래 참지 못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난한 것처럼 나 자신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인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운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불운은 하나님의 정죄의 결과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나의 무의식’이 있었음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의 배후에 내가 알지 못한 강력한 음모가 있었음을 약간 알 듯하다. 그건 나의 ‘무의식의 층’들과 내 부모와 선조가 만들어 놓은 ‘집단무의식’이 협력하여 만든 보이지 않는 적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얼굴로 드러나며 내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군이었다. 나는 가족 중 기독교인이 한명도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내가 교류했던 우리 집안 전체에서 기독교인은 내가 거의 최초이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따라서 최초 개종될 때에 무한한 사랑이시던 하나님의 존재가 시간이 자나면서 ‘내 육신의 아버지’가 내게 하신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고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아버지는 내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징벌의 심판관’이 되어 버티고 있었다. 나는 늘 심판관에게 yes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고, 내 삶은 고달팠다. 문제는 항상 ok를 받지 못한다는데 있었고, 많은 no를 받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종교가 바뀐 댓가였다. 아니 무지의 결과였다.
실제로 성격의 변화도 일어났다. 기독교 이전에 나는 ENTJ였는데 개종후 정신적인 환란을 겪으며 INTJ로 바뀌어 있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외향성을 내향성으로 바뀌게 했을까? 그냥 ‘성격이 좀 바뀌었네요’ 라고 하기에 내가 겪은 심리적 고통은 정말 엄청났었다. 무엇이 나를 이리 만들었을까? 그 모든 것이 그분의 허락 하에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았다.
이것을 눈치 채고 난 지금 나는 오히려 편안하다. 주일에 교회를 빼먹어도 더 이상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 나의 불행은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여러 음모들에 내가 말리었기 때문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것도 내가 신에게 가까워지는 하나의 시험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나는 혼란을 겪지 않고 있다. 융은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내가 나의 무의식의 음모를 미리 알고 내 무의식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무의식의 횡포로 부터 자기를 구한 거룩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이라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밤의 깜깜한 운동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때 후레쉬를 비추면 그곳이 보인다. 우리가 후래쉬를 비춰서 볼 수 있는 곳이 ‘의식’이다. 무언가에 가려져 있어서 안 보이는 곳이 ‘무의식’이다. 예를 들어 신문지에 덮여있거나 돌멩이 밑에 숨어있는 것은 그것들이 치워져야 보인다. 이 부분이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후래쉬를 비추는 부분만 보이고 나머지는 안 보인다. 후래쉬가 방향이 바뀌어서 다른 곳을 비추면 그곳이 보인다. 이것이 ‘전의식’ 이다. 숨어있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이다. 이렇게 후래쉬를 움직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손이 ‘자아’이다. 자아는 행동대장이다. 그리고 후래쉬에 동력으로 공급되는 힘이 ‘이드’이다. 집단무의식, 우주의 어떤 지점에 아카이브가 있어서 그곳에 접속만 하면 우리 선조들이 모아둔 모든 정보가 무의식에 의해 다운받아 내가 지금 그것을 나의 자기실현에 활용할 수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정말이지 이 모두를 알아야 한다.
앞에서 나는 ‘나의 무의식’을 ‘음모’라고 했었다. 이 음모가 나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한 의도로 나를 인도하는 인도자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알던 ‘행운’의 정체였을지 모른다. 뒤에서 행운을 준다는 그분은 나의 ‘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의 복합체’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에야 보니, 여태까지 줄곧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 같다. 내 무의식은 지속적으로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의미없는 사건은 내게 완전 무의미했고, 나는 의미가 있는 것만을 골라서 기억하려 했다. 그리고 의미가 있는 사건만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의미를 찾아갈 것이고, 그것이 신이든 무의식이든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들이 모여서 내 인생을 꾸려갈 것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명확히 알 것 같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말년쯤에 나는, ‘내 생애가 무의식이 의미를 찾아내 자아를 실현하는 실험의 장 이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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