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신진철
  • 조회 수 2575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0년 5월 14일 19시 47분 등록

연필을 깎으면서

 

5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연필을 깎는다. 깎아 주겠다는 아비의 사정을 무슨 극성이냐는듯 눈을 흘깃하고는, 반짝거리는 샤파에 하나씩 물리고 ‘드르르륵’ 돌린다. 두어 바퀴 만에 뱉어져 나오는 연필은 모두 똑같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뚝딱, 채 1분도 안 걸린다. 굳이 신문지 종이 깔고, 쭈그려 앉아 청승 떨 틈도 주지 않는다.

 

새 학기가 되면, 아버지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시곤 했다. 새로 받은 책들을 훑어보시고, 지난 달력과 누런 횟부대 겉봉지를 적당히 잘라 책을 싸 주셨다.

‘국 어’

‘5-2’

‘신 진 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과목과 학년학기 이름을 써주시고는, 마지막으로 필통을 확인하셨다. 검정색 네모난 칼로 한 자루 한 자루를 깎아 주셨고, 몽당연필이 된 것은 볼펜 깍지를 반으로 잘라 끼워서 목숨을 늘려주셨다. 저녁 먹고 시작한 이 의례는 10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삼남매 각자의 책가방들을 꾸리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당신의 큰 아들이 5학년이 되도록 일 년에 두 번씩 이 연례행사를 직접 주관하셨던 당신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월사금 낼 돈이 없어서, 머리 깎을 돈마저 없었던 아버지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다. 가방대신 책보가 편했다고 하시지만, 얼마나 부러웠을까. 점심시간이면, 물 한바가지 퍼 먹고 학교 뒷산 묘지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때우다가 종소리 맞춰 교실로 들곤 했단다. 공책은 있는 집 자식들 사치였고, 신문지, 달력, 횟부대 종이 걸리는 대로 엮어 만든 딱 한권의 공책에 침을 묻혀 가며 쓰던 글씨.
'국어' '산수' '자연' 
'기영아 학교가자'
'영희야 놀자' 
아버지는 글씨 한 자 한 자를 새기면서 눈물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학교가고 싶고, 놀고 싶고. 하얀 와이셔츠, 자전거타고 출퇴근 하는 면서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학교 교문을 피해 울타리 넘어 교실로 도망쳐 들어가곤 했지만, 결국 교실까지 쳐들어 온 훈육주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잔인한 바리깡은 어제는 남-북통일, 오늘은 동-서화합. 십자대로가 났지만,

“나 말고도 한 놈이 더 있었어”

“그렇게 깎이다 보면, 공짜로 빡빡머리가 됐어. 머리감기도 좋았지.. 암만..”

이렇게 회상하시던 아버지의 웃음. 배고픔이 만든 오기였을까. 어린 가슴에 맺힌.

 

친구들이 오학년에 오를 때, 아버지는 작은 매형을 따라 여수로 돌을 실어 나르는 배를 탔다. 돈을 벌어야 했다. 술 좋아하는 무지랭이 할아버지와 병약한 할머니를 먹여 살려야 했다.

12살 뱃놈, 초딩 5학년 대신 얻은 아버지의 첫 직업이었다.

15살, 버스 차장질로 시작한 기름밥 청춘이 아버지 인생의 꽃시절이었다.

 

큰 아들이 6학년이 되면서부터 이 의례는 없어졌다. 젊은 시절 험하게 부렸던 육신은 솔직한 복수를 했다. 결국 교통사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위암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기차모양을 한 은빛 하이샤파’가 어린이날 선물로 주어졌다. 신나게 돌리기만 하면 뱉어내는 그 작은 기계는 병든 아버지의 손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생들은 샤프를 좋아했고, 중학생이 된 큰아들은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연필 깎을 일이 없어졌다. 덩달아 책표지를 쌀 일도 없어졌다. 50원만 주면 예쁜 고양이가 그려진 비닐 커버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연필깎기가.

 

그런데,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글을 쓰겠다면서 나는 지금 연필을 깎고 있다. 그렇게 지루해하던 일, 제 아비가 하던 일을 하고 있다.

 

IP *.221.232.14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10.05.14 20:37:12 *.36.210.60
아들의 손끝에 매달리신 아버지의 情恨이로구나. 마디마디 분질리고 깎이어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까만 심지로 들이대는 연필심처럼. 네 아들일랑은 아니, 내 손자일랑은 시시한 저잣거리로 함부로 내둘리지 말라 하는 피철철 유언일까?

까만색: 불빛이 전혀 없는 밤하늘과 같이 밝고 짙은 검은색. 色아, 너는 무엇이 밝고 짙다는 것이냐?  ^-^*
프로필 이미지
신진철
2010.05.15 09:18:07 *.221.232.14
아버지는 재작년 11월 18일 새벽에 돌아가셨지요. 참 힘들게 살다 가셨지요. 그 날 새벽에 첫눈이 왔습니다. 참 서럽게도 왔습니다. 많이도 왔지요. ... 교통사고, 위궤양, 위암, 췌장염, 췌장암, 자식먼저 보내고, 알콜 중독에 결국 치매까지... 참 힘들게도 사셨지요. 아니 사셨다기 보다는 버티셨다는 말이 맞겠네요. .. 39kg 몸무게로. 자식 셋 짊어지기에도 너무 무거우셨겠지요.  가볍게 삼배옷 하나만 걸치고 가셨습니다. 추운날이었지만, 가볍게 가시라고. 당신이 평생 보고싶어라 하던 엄마...찾으러. 엄마 보고싶다고..하시면서...
프로필 이미지
이수
2010.05.15 09:47:28 *.163.78.249
아버지를 그르워 하시는 사부곡입니다. 한가지 테마로 차근 차근 엮어간
얘기가 잔잔한 마음의 울림을 줍니다.
그 정이 다시 자식에게 내려가서 그 뿌리가 든든해 지기를 빕니다.
프로필 이미지
신진철
2010.05.16 00:20:09 *.186.58.4
고맙습니다. 많이 많이...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59 ---->[re]3 월의 주제 - 논점이 빗나간 글일 수 있지만 중대한 고민 [1] 구본형 2003.04.03 2582
958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권유하는 구선생님께 감사드리며 [6] 섬옥 2005.03.19 2582
957 [91] 자신과의 대화 (2) [2] 써니 2008.07.08 2583
956 [노래]어쩌다 마주친 그대(출처:pops8090/유튜브) 김지현 2010.04.29 2583
955 돌아가야할 시간입니다. [4] 백산 2011.08.30 2583
954 신사업인가? 신기루인가? - 신사업 추진의 성공비결 [1] 오병곤 2005.07.27 2585
953 [오리날다] 어른이 된다는 것 [2] 김미영 2010.01.25 2585
952 위대한 리더, 평범한 리더 [1] 이활 2008.08.06 2586
951 [영원의 시 한편]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정야 2014.11.03 2586
950 우리 세째에게 남친이 생겼습니다. [5] 소은 2009.02.02 2588
949 [8기 예비 2주차 세린신] 나는 누구인가? file [8] 세린 2012.02.27 2588
948 천안 마실을 다녀와서 [1] 숲기원 2006.05.07 2589
947 칠순 아버지께 받은 댓글 자랑*^^* [3] 김나경 2009.01.23 2589
946 [잡담]그녀를 만난지 15년 그리고 5479일 [5] 햇빛처럼 2011.12.21 2589
945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달님. 2004.06.26 2590
944 지난 일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1] 김신웅 2009.09.16 2591
943 서방을 서방님으로 하세요(국화와 칼을 읽고) [3] [2] 이수 2008.12.18 2592
942 100세에도 글쓰기/ 신문기사를 보다가 [1] 써니 2012.04.25 2593
941 공인으로 산다는 것 - 우즈 & 이병헌 [1] 이기찬 2009.12.14 2596
940 딸기밭 사진편지 35 / 사이 file [1] 지금 2010.06.02 2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