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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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으면서
5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연필을 깎는다. 깎아 주겠다는 아비의 사정을 무슨 극성이냐는듯 눈을 흘깃하고는, 반짝거리는 샤파에 하나씩 물리고 ‘드르르륵’ 돌린다. 두어 바퀴 만에 뱉어져 나오는 연필은 모두 똑같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뚝딱, 채 1분도 안 걸린다. 굳이 신문지 종이 깔고, 쭈그려 앉아 청승 떨 틈도 주지 않는다.
새 학기가 되면, 아버지는 우리들을 불러 앉히시곤 했다. 새로 받은 책들을 훑어보시고, 지난 달력과 누런 횟부대 겉봉지를 적당히 잘라 책을 싸 주셨다.
‘국 어’
‘5-2’
‘신 진 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과목과 학년학기 이름을 써주시고는, 마지막으로 필통을 확인하셨다. 검정색 네모난 칼로 한 자루 한 자루를 깎아 주셨고, 몽당연필이 된 것은 볼펜 깍지를 반으로 잘라 끼워서 목숨을 늘려주셨다. 저녁 먹고 시작한 이 의례는 10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삼남매 각자의 책가방들을 꾸리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당신의 큰 아들이 5학년이 되도록 일 년에 두 번씩 이 연례행사를 직접 주관하셨던 당신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월사금 낼 돈이 없어서, 머리 깎을 돈마저 없었던 아버지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다. 가방대신 책보가 편했다고 하시지만, 얼마나 부러웠을까. 점심시간이면, 물 한바가지 퍼 먹고 학교 뒷산 묘지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때우다가 종소리 맞춰 교실로 들곤 했단다. 공책은 있는 집 자식들 사치였고, 신문지, 달력, 횟부대 종이 걸리는 대로 엮어 만든 딱 한권의 공책에 침을 묻혀 가며 쓰던 글씨.
'국어' '산수' '자연'
'기영아 학교가자'
'영희야 놀자'
아버지는 글씨 한 자 한 자를 새기면서 눈물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학교가고 싶고, 놀고 싶고. 하얀 와이셔츠, 자전거타고 출퇴근 하는 면서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학교 교문을 피해 울타리 넘어 교실로 도망쳐 들어가곤 했지만, 결국 교실까지 쳐들어 온 훈육주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잔인한 바리깡은 어제는 남-북통일, 오늘은 동-서화합. 십자대로가 났지만,
“나 말고도 한 놈이 더 있었어”
“그렇게 깎이다 보면, 공짜로 빡빡머리가 됐어. 머리감기도 좋았지.. 암만..”
이렇게 회상하시던 아버지의 웃음. 배고픔이 만든 오기였을까. 어린 가슴에 맺힌.
친구들이 오학년에 오를 때, 아버지는 작은 매형을 따라 여수로 돌을 실어 나르는 배를 탔다. 돈을 벌어야 했다. 술 좋아하는 무지랭이 할아버지와 병약한 할머니를 먹여 살려야 했다.
12살 뱃놈, 초딩 5학년 대신 얻은 아버지의 첫 직업이었다.
15살, 버스 차장질로 시작한 기름밥 청춘이 아버지 인생의 꽃시절이었다.
큰 아들이 6학년이 되면서부터 이 의례는 없어졌다. 젊은 시절 험하게 부렸던 육신은 솔직한 복수를 했다. 결국 교통사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위암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기차모양을 한 은빛 하이샤파’가 어린이날 선물로 주어졌다. 신나게 돌리기만 하면 뱉어내는 그 작은 기계는 병든 아버지의 손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동생들은 샤프를 좋아했고, 중학생이 된 큰아들은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연필 깎을 일이 없어졌다. 덩달아 책표지를 쌀 일도 없어졌다. 50원만 주면 예쁜 고양이가 그려진 비닐 커버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연필깎기가.
그런데, 나이가 마흔을 넘기고, 글을 쓰겠다면서 나는 지금 연필을 깎고 있다. 그렇게 지루해하던 일, 제 아비가 하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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