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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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담그기
나는 그 때도 생각이 복잡한 아이였나 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성당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게 되었다.
서로에게 알리지 않은 채다른 한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 성탄을 준비하는 동안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다. 성탄절에는 마니또 알아맞히기와 함께 자신의 마니또에게 작은 메모와 선물을 주는 이벤트를 함께 하였다.
“ 하느님은 단순한 것을 좋아하시지.
그래서 단순한 사람을 좋아하시지.."
였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마니또가 선물과 함께 카드에 적어 준 글귀가 그랬다.
내 마니또는 그 때 내 마음을 설레게 한 잘생긴 남학생이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가 적어 준 글귀치고는 넘 성숙한 거 아닌가
난 또, 열 세 살 짜리가 얼마나 복잡한 인상들을 쓰고 살았길래 이런 소리를 다 들었는지..참내...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난 쭉~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간절히 바래왔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ㅜ.ㅜ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 그게 병이다.
마흔 해를 살면서 늘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끙끙거렸지만,
그 절정은 2003년 봄 5월이었다.
그 때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김치 담그기”였다.
그 전해 5월. 어린 조카의 느닷없는 죽음과 남편과의 불화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에게 닥쳐왔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는 언니로부터 주말농장을 분양만 받아놓고 돌보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좀 해 봐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해는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무척 많이 내렸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만 가도 심어놓은 작물들은 잘 자랐다.
무성하게 자라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열무를 거두어 와서 열무김치를 담궜다.
열무는 이리저리 손을 많이 데면 풀내가 나는 것이라 가능한 소금에 절일 때에도 많이 뒤적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열무 김치는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자주 담근 김치다.
장마철을 지나니 파아란 고추가 처치 곤란할 만큼 자랐다. 저걸 다 어찌하나 ...
그 시절에는 그걸 나눠 줄 이웃도 없었다. 그래서 그걸로 고추 장아찌를 담궜다.
배추김치는 물론, 오이지도 담궜고, 깻잎 김치도 담고, 무깍두기도 만들었다.
안 그래도 젓갈이 든 김치를 아예 손도 대지 않는 식구^^가 있어 신혼 때부터 친정집 김치도 갖다 먹지 못하고, 파는 김치는 아예 엄두도 못내 시어머니께서 김치를 안 주시면 꼼짝없이 담궈 먹어야 하는 신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퇴근하고 저녁에 돌아와 배추를 절여놓았다가
밤잠도 설쳐가면서 새벽에 김치를 담그는 수고로움.... 은 나를 도왔다.
시간이 필요해......
배추김치의 승패는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데 달려있다.
물과 소금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도 중요하다.
어떤 날은 배추를 빨리 절이겠다는 욕심에 소금을 아주 심하게 듬뿍 넣어 시간을 단축해 보기도 한다.
배추가 얼마나 괴로워 하는지......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노하우는 정말 그때그때 다르다.
그 날의 날씨가 더운가 찬가, 습도가 높은가 아닌가...또 배추는 어떤가...
누군가 그 시간과 소금의 양을 정확하게 계량해 달라고 했더니 한 전문가의 대답도 그랬다.
나는 그 절묘함이 좋았다. 그 그때그때 다름이 좋다. 그 기다림이 좋다.
그 적당한 때를 내가 가늠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맘에 든다.
한때 제빵에 잠시 빠져 보려한 적이 있었으나, 오로지 정확!한 계량만이 생명인 밀가루의 세계는 배추와 달라 나는 포기했다. 김치를 담글 때도 수없이 실패해 보았지만, 대충~ 과 어림짐작이 절대 통하지 않는 발효빵의 엄격함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ㅋ
나는 살림살이에 능통한 부지런한 아낙이 아니다.
그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는 가장 단순한 방법 하나가 있는데 그게 김치담그기다.
배추를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마늘을 까고, 풀을 쑤고, 양념을 만들고,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고... 하는 그 긴 과정이 내 복잡한 머릿속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는 기도가 되었다ㅎㅎㅎ
새벽 3시에 김치를 담그는 일...
의외로 재밌다.
그리고 다 담궈 놓은 김치통을 쭉 세워놓고 바라보는 뿌듯함이란^^*
아,
5월이라 슬프다......

그러고 보면 우리 생활이 기도이네요.
성당에 가지 않아도 절에 가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나경님은 해탈의 경지?
마음에 와닿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예전 대학시절에 잘, 아니 자주 불렀던 '기도'라는 노래 한곡 소개합니다.
노찾사가 부르기도 했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한가락 뽑겠습니다.ㅎㅎ
***
눈을 감고 잠잠히 기도 드리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 가실 안식을 더 하려고
반드시 도움의 손이 그대 위해 펼쳐지리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 저무는가
애처로운 인생이여 애꿎은 노래만 우네
명에는 괴롭고 짐은 무거워도
두드리던 문은 머지않아 네게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의 그 등잔을
부드런 예지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삶을 감사하는 높다란 가지
신앙의 고운 잔디
그대 영혼 감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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