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곤
- 조회 수 257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안방을 아이들에게 내 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책상 두 개와 이층 침대를 작은 방에 배치하는 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냉큼 안방을 아이들보고 쓰라고 한 것이다. 나는 아내와 작은 방에서 가끔 자거나 아니면 마루에 이불을 깔고 잤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있는 코딱지 만한 집이지만 누가 방 빼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엄연한 내 집인데도 아이들이 덩치가 커갈수록 ‘좁다’라는 느낌이 커져간다. 그런데 큰 애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혼자 조용히 공부할 방이 필요하단다. 그 전에는 작은 아이와 한 방을 썼는데 혼자 있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사춘기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 2층 침대를 분해하여 작은 방에 하나 옮겨놓고 책상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안방으로 다시 입성하기로 했다. 작은 놈은 엄마, 아빠랑 같이 자는 걸 워낙 좋아하여 쾌재를 부른다.
“짜샤~ 속도 모르고…..”
덕분에 아내와 분위기 잡기는 더 힘들어졌다.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은 코곤다고 마루로 쫓겨나기 일쑤다. 내 모습이 서울역 앞 노숙자의 수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자로 뻗고 잘 수 있어서 몸은 편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왠지 휑하다. 그래도 내가 이 집의 가장인데 기러기 아빠만큼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요즘처럼 아빠들이 핍박 받는 시대도 없다. 한참 벌어야 할 시기가 회사에서 쫓겨 나는 시기다. 집에서는 마누라와 아이들이 집에 신경 안 쓴다고 타박이다. 술 마신다고 잔소리, 담배 핀다고 잔소리, 어디 놀러 안 간다고 잔소리…. 잔소리만 먹고도 배부른 그런 세상이 제발 왔으면 좋겠다. 가장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건 논외로 치더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점점 아빠들을 무시하는 거는 아닌 지 두 분 부릅뜨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제일 먼저 월급을 온라인으로 입금하지 않고 봉투라든가 오프라인으로 전달하도록 제도를 만들 것이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은 월급을 어찌 그렇게 허망하게, 무정하게 전달해야 하는가? 월급은 밥이다. 밥은 숭고한 것이다. 그 거룩한 의미를 되새기는 상징적인 의식이 필요하다.
“부쳤어?”
전화 한 통에 오늘이 월급날임을 확인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내 옆에서 일하는 직원의 전화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아니, 이번 달은 왜 이거 밖에 안돼? 어디 다른 데 비자금 조성한 거 아냐?” 라는 심문에 그의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다.
“지금 몇 시야? 오늘 동두천에 가기로 했잖아?”
그 날도 혼자 마루에서 자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10시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깨운 것이 아쉽다. 꿈 속에서는 비가 내렸다. 아내는 빨간 부침개를 만들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내 잔에 막걸리를 두 손으로 곱게 따라주고 있었다. 큰 아이는 부침개를 찢어 내 입에 넣어주던 찰나였다. 입 맛을 다시며 눈 앞에 있는 책 한 권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함민복 시인은 힘주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쥐가 꼬리로 계단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허공을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삼십 분 육십 분 구십 분 -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사람들은 샐러리맨들의 월급을 쥐꼬리만 하다고 격하하여 말하지만 그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쥐꼬리처럼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내는 그네들의 삶은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가.
쪼까 위로가 된다.
그나저나, 빼앗긴 안방은 언제 되찾을 수 있을까? 정녕 봄은 오는가?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949 | [칼럼 13]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3] | 신진철 | 2010.05.31 | 2345 |
2948 |
[오리날다] 니 잘못은 없었어 ![]() | 김미영 | 2010.05.30 | 2382 |
2947 |
딸기밭 사진편지 34 / 소풍 ![]() | 지금 | 2010.05.29 | 2392 |
2946 |
딸기밭 사진편지 33 / 관계 ![]() | 지금 | 2010.05.27 | 2386 |
2945 | 봄의 아이들에게 [1] | 김나경 | 2010.05.27 | 2384 |
2944 |
마주 앉은 거리만큼 일 때가 행복입니다 ![]() | 지금 | 2010.05.26 | 2453 |
2943 |
엉덩이 ![]() | 진현주 | 2010.05.25 | 2877 |
2942 |
딸기밭 사진편지 32 / 2일 하늘 ![]() | 지금 | 2010.05.25 | 2468 |
2941 | 칼럼따라하기12<절박할 때 비로소 글이 써지는가?> [7] | 청강 경수기 | 2010.05.24 | 2227 |
2940 | [칼럼 12]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2] | 신진철 | 2010.05.24 | 3662 |
2939 | 5-4칼럼 나의 주제 파악하기 [2] | 윤인희 | 2010.05.23 | 2741 |
» | [펭귄잡다] 빼앗긴 안방에도 봄은 오는가? [1] | 오병곤 | 2010.05.23 | 2577 |
2937 |
[오리날다] 내공? 그런 거 없다! ![]() | 김미영 | 2010.05.23 | 2375 |
2936 | 체스를 통해 살펴본 인생(청소년을 위한 글) [1] | Real | 2010.05.22 | 3290 |
2935 | 김치 담그기,라는 기도 [1] | 김나경 | 2010.05.22 | 2670 |
2934 |
딸기밭 사진편지 31 / 부처님 오신 날 ![]() | 지금 | 2010.05.22 | 3039 |
2933 | 장보기의 즐거움 [1] | 김나경 | 2010.05.19 | 2402 |
2932 |
봄비오는 아침 시를 받았습니다 ![]() | 지금 | 2010.05.18 | 3216 |
2931 | 칼럼따라하기-11<영웅의 인자> [2] | 청강 경수기 | 2010.05.17 | 2249 |
2930 | 5-3칼럼 진지하기만 하다면 최고다. [2] | 윤인희 | 2010.05.16 | 2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