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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4일 08시 53분 등록

정서적 허기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정신과--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전철을 내려 걸어가다

눈앞에 분식집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 때가 있다.

갑자기, 라면과 김밥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며 배가 고파오기 때문이다

칼로리 생각을 하면서 망설이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라면 한 그릇을 먹게 된다.

어떤 분은 불편한 술자리를 끝내고 나면 포장마차에 가서 우동 한드릇을 꼭 먹고 나와야 집에 갈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냥 입이 심심한 게 아니라 정말 공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술도 칼로리가 만만치 않고 안주도 칼로리가 높은 음식인데 왜 도리어 공복감이 오는 것일까?

나는 그걸 '정서적 허기' 라고 생각했다. 미국학자 로저 굴드가 설명하기를 기분이 좋지 않거나 외로울때 후회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 배가 고프고, 반대로 누군가 와 친밀한 감정을 느끼거나 믿음이 생겼을 때는 공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몸통 안의 위장 말고 정서와 관련한 '유령위장'이 따로 있다고 한다.
원래 위장이 비었을 때 배고픈 신호가 와야 하는데 이 유령 위장이 가짜 신호를 보내 뇌에서 '배가 고프다'고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먹게 하는데 몸의 위장은 채워져도 유령 위장은 만족이 안 되니 포만감은 잘 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허기를 느끼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살아가면서 정서적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뭐라도 입에 넣어 그 허기를 채우려는 그 부질없는 노력을 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서 떠들고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지만 헤어지고 나면 도리어 외로움과 헛헛한 마음만 차올라 올 때 우리는 공복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정작 고픈 주체는 밥통이 아니라 마음인데도 뇌에서는 '배가 고프다' 는 신호를 보내 음식을 찾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 외롭다는 감정을 인식하는게 불편하니 물질적이고 해결 가능한 문제로 돌려 버리는 방어적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술을 마셔도 배가 고프고, 라면을 먹는다고 해도 잠깐 기분이 좋아질 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혼자 지내는 여성들이 야식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현대 사회에서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지만 아주 가깝고 믿을 만하다고,
의지해도 될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인연을 만들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서로 적당히 쿨한 거리를 유지하는 좋은 게 좋은 관계만 늘어난다.

관계의 양은 늘지만 헛헛험은 더해지니. 본능적으로 더 많은 만남을 만든다.

 그러나 피상적인 만남은 관계의 배고픔만 더헐 뿐이다.
아스파탐이 설탕을 흉내 낼 뿐 대신할 수 없듯이 이런 실체를 모른채 그냥 배가 고픈 걸로만 아는 술꾼들은 오늘도 귀갓길에 야식을 먹고 배만 불룩 튀어나오는 후유증을 겪고 있다.

 

정서적 허기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한 밤에 배가 고프면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를 하거나 가족들과 대화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유령 위장이 정서적 포만감을 느껴야 이 허기는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IP *.131.1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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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6.05 09:18:28 *.131.127.50

심리 공부를 하면서 내가 느낀 것 중 한 가지가
 자기 실제적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너무 자주 뭔가 뒤 바뀌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진짜가 가짜에게 자리를 내 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정상처럼 되어서 당연한 것이 되는...

유령 위장이 아니라 진짜 존재의 실존적 요구는 아닐까요?

장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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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10.06.06 08:35:47 *.131.0.84

예 백산님
은유의 차이겠지요
그리 싶습니다

나비이야기는 아직 어렵네요
언제되면 가능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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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2010.06.05 09:45:01 *.131.41.34
학교를 마치고 저에게로 오는 1학년 꼬맹이 녀석하나
학교서 막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부터
"배고파요"
노래를 합니다.

오후 간식을 먹고 돌아서면
또  "배고파요"...

그녀석 얼굴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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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10.06.06 08:36:38 *.131.0.84

지금은 진짜로 배고파요
밥먹으러 나갑니다

나경님
오프라인에서 만나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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