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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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마흔, 나는 내 나이가 너무 예뻤다. 문득, 이 예쁜 나이를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른다운 대화도 나누고 싶었고, 손상당한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었고, 숨어버린 자신감도 되찾고 싶었다. 뭘 봐도 무덤덤하고 뭘 해도 시큰둥한, 나에게 더 이상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남편과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내 나이가 예쁘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길 바랬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 맘이었다.
나는 대화가 고팠다.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 사람의 곁에 있을 때보다 더 잔인하게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은 없다. 대화가 사라진 우리의 관계는 죽어가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아내’와 ‘입 다물고 싶은 남편’의 만남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알면 행하라 했던가. 언젠가부터 결혼은 내 삶의 전부가 아닌, 살면서 일어난 사건의 하나였다. 다른 많은 일들이 결혼의 공허한 쳇바퀴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이 또한 예쁜 나이가 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은 사람을 묶어 놓는다. 찬란한 의무감으로. 만일 누군가를 억누르고 묶어 놓으려면 사슬의 한쪽 끝을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그 자신도 갇히는 셈이다. 누가 시킨 일이란 말인가? 나는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남편에게서 벗어난 사고는 날개를 펼쳐 훨훨 날기 시작했다. 세상엔 괜찮은 남자들이 널려 있었다. 물론 두 번째 남편을 얻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후회는 한명으로 충분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게 그저 좋을 뿐이었다.
결혼에서 행복은 우연한 사건이다. 나는 또 다른 행복을 꿈꿨다.
간절한 꿈은 이루어졌다. 어른다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시시콜콜 일상을 전하는 짧은 수다를 나누다보면 태산처럼 쌓인 피로와 밥벌이의 고단함은 저 멀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손상당한 자존심이 회복되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갑자기 사는 게 즐겁고 재밌기까지 했다. 밥 먹었냐는 문자에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고 잘 자라는 문자에 마냥 설레었다. 내 심장이 아직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가슴 벅차했다. 행복했다.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보면서, 내 눈을 마주하면서, 자주 웃었다. 그래, 내가 이랬었지, 내 표정이 이랬었어, 이제 내 얼굴이 기억나, 그랬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오래지않아 남편에게 들켰다. 무덤덤하고 시큰둥한, 나에게 조그마한 관심도 없어 보이던 그가,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뜨끔했지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침묵의 긍정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서 바람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았어?
니가 행복해 보여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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