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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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나? 딴 놈 만나보니 별거 있드나? 내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말을 아꼈지만서도 속은 새까맣게 다 탔다. 이 세상 언놈이 자기 여자가 딴 놈 좋다고 얼굴 시뻘개가 다니는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겠나 말이다. 고만해라. 여기서 더 가면 너만 또 아프다. 다 내 잘못이다. 내 못난 탓이다. 세상이 어쩌고저쩌고해도 다 내 탓이다. 나도 내가 이리 찌그러져 살지 몰랐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미안한 거 말하지 않아서 미안타. 다 내 탓이라 안하나.
그까짓 선수 바꿔봐야 별거 없다. 선수교체만 하면 당장 게임이 달라질 것 같지? 웃기지마라. 기본적으로 선수를 기용하는 방법과 게임의 룰이 파이다. 내가 항상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거, 그게 내 약점이란 거, 나도 안다. 널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나도 모른다. 널 도대체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건지 나는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할까? 나보다 니가 더 강하다. 난 가끔 니가 두렵다. 그래서 무서워서 피하게 된다. 깨갱하는기라.
남자가 강하다고? 아니다. 살아보니 남자는 약해빠졌다. 겉으로만 강한 척 하는기라. 정신 상태는 발육부진이라 유모차에나 앉아있으면 딱이지 싶다. 내가 지금껏 온 것도 어쩌면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는 이유 말고는 별다른 것도 없다. 만약에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찌 살았을까? 니처럼 악착바가지로 버텨냈을까? 나는 자신 없다. 요즘 여자들, 정말 잘났다. 비꼬는 거 절대로 아니다. 자식 챙겨가며 살림하고 일하고 우째 그래 정신없이 사노.
남자는 우유와 같단다. 그냥 놔두면 상한단다. 니가 만난 그 놈아 덕분에 내가 다시 신선해졌다. 정신 빠짝 났으니깐 여기서 고만해라. 사람은, 아니 남자는 이기적인 동물이라서 지 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여자의 바람은 고려하지 않는다. 누워서 침 뱉는 거 아이가. 그러니 그냥 묻자. 정신적인 외도든 육체적인 외도든 따지지 말자. 니도 다 넘겼는데 나라고 못하겠나.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그걸 못하겠나. 그러니 그만하고 와라. 그만하면 됐다.
니는 유부녀다. ‘유부녀’란 ‘남편이 있는 여자’가 아니나. 이 말은 ‘딴 남자가 없어야하는 여자’란 말이다. 내가 이런 말 시작하면 니가 싫어하는 줄 알지만 나는 그렇다. 나는 니가 딴 놈 아랑 있는 거 싫다. 일이든 뭐든 그건 정말 싫다. 고쳐볼라 했는데 안 된다. 물론 우리도 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애들 안 있나. 애들 생각하면 헤어지는 건 안 된다고 본다. 니가 참든 내가 참든 둘 중 하나는 참아야지. 아, 그래, 그동안 니가 다 참아온 거 내가 안다.
나도 늙는다. 여자가 안에 사는 모양이다. 몸도 점점 둥글둥글해지고 피부도 말랑말랑해지고 심지어 젖가슴도 봉긋 나온다. 가끔 돌아보면 기가 막힌다. 좋은 시절 다 갔지 싶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내 자리가 없어진다. 큰소리 뻥뻥 치던 호기는 다 어디로 가고 요즘은 자꾸만 찌그러진다. 진짜 죽을 맛이다. 이걸 어느 누구한테 말한다 말이가. 니한텐 더 말 못한다. 뭐 좋은 얘기라고 그걸 떠들어대. 그러다보니 할 말이 없는기라. 니 그거 모르지?
니도 뭐라고 한 마디 해도.
머라 쳐 씨부리 쌌노?

뜬금없이 샘이나서 남의 시 하나 옮겨다 놓습니다.
'사랑아, 길을 잃을지라도'
사랑아, 우리 사랑하자
너와 내 몸속에 피가 돌 듯
너와 나 사이
핏줄 같은 길이 나 있다
그 길에 어둠이 내릴지라도
사랑아, 울지 마라
하루의 절반은 어둠이다
어둠의 끝 에서 또 다른 아침이
우리를 위해 길을 내고 있다
사랑아, 두려워 마라
사랑도 때론 길을 잃는다
너와 나의 현기증 같은 가슴 을 확인하면
길은 슬며시 숨겨둔 길을 내어놓는다
사랑아, 우리 그 길을 가자
길에서 길을 잃을지라도
길이 끝나면 새길을 만들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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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신광철 소개 1957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1994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사람, 그래 도 아름다운 이름>과 장편소설 <땅의 아들>이 있다. 불교문예 삼오문학상, 세계 계관시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세계 PEN 클럽 한국지부와 문인협회 회원이며, <불교문예>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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