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강 경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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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 지금 내가 서재로 쓰고 있는 방에는 오래된 책들과 이미 참조할 수 없는 논문, 학부 때의 노트들 까지 버리지 않고 가득 들어차 있다. 방의 중앙에 책상을 놓고, ㄷ자형으로 책장을 배치했는데도 새 책이 배달되어 오면 꽂을 공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서랍 속을 들여다보면 버리지 못한 온갖 잡동사니가 작은 박스들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서랍마다 가득하다. 심지어 40년 전에 달았던 노란색 유치원 명찰까지도 잘 보관되어 있다. 40년간 끌고 온 것이다. 안방의 장롱 속은 또 어떤가? 싱크대를 열어봐도 거기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이사를 그렇게 다녔음에도, 많이 버렸다고 했는데도 이 지경이다. 아마 이것들을 이고 지고 무덤에 들어갈 것 같다.
물건만 그러한가? 감정과 이성도 그러하다. 수십년 전의 사건이 야기한 감정적 동요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배웠던 교육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수해온 삶의 대응방식을 오늘 또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는 방식은 십중팔구 오래 전 습관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잘못된 것이 아주 많이 있다.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방식 때문에 내가 변화하기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변화를 갈구하는 것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를 거부하는 것 역시 생명체의 특성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낯선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반복하라는 것이다. 생명체가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매일 매일 반복하라는 것이다. 반복된 행위에 의해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고, 그 습관이 생명체의 한 부분과 기능이 되면 변화는 새로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그게 생명체의 특성이다. 그런데 반복할 수 없는 것도 가끔은 있다. 가령 처음 만난 사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김구를 가르친 고능선 선생이 백범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해주었다고 한다.
“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되
벼랑에서 잡은 가지 마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히 장부로다”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 구절이었다.
나는 벼랑에서 잡고 있던 가지를 놓아버릴 수 있는가?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스스로 낯선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한계 중 하나였다. 놓지 못함. 포기할 수 없음. 그래서 물건이 쌓였고 감정과 원한이 쌓였고, 지방층이 차츰 두터워졌던 것이 아닐까? 그 결과, 새로운 것도 갖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철봉에 매달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팔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왜 놓지를 못하는가? 포기할 수 없음이 나를 초죽음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는데도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의 한계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철봉을 놓을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퇴근 후에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 하루는 늘 바빴고 해야 할 의무들로 가득 들어차 있어서 여가를 전혀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살면서 나는 늘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이제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 결심을 하고 6월이 되면서 수영장에 등록했다. 나로서는 파격적인 행위였다. 퇴근 후 저녁식사를 하고 수영장에 갔다. 결혼 후 처음 가져보는 여유였다. 이런 여유가 없었기에 내 삶은 고달팠고 내 체중은 15킬로그램을 오버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영장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들 살고 있었다. 나만 갇혀 있었던 것이다. 직장인 위주로 편성된 클래스에 합류했다. 오랜만에 하는 수영이라 호흡이 딸려 기침이 계속 나오고, 물도 수차례 마셨으나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신선한 느낌을 계속 공급해 주었다.
또 하나 놓은 것이 있다. 6월 1일 핸드폰을 바꾸면서 약 15년 정도 사용한 번호를 버렸다. 30대 초반에 최초 마련한 모바일폰 번호를 나는 지금까지 계속 고수하고 있었다. 기계는 5-6번 정도 바뀌었으나 번호는 포기할 수 없었고, 2년전 영상통화가 되는 기기로 변경하는 탓에 010국을 써야했을 때도 자동 번호연결이 되도록 변경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 번호를 버렸다. 그냥 핸드폰을 해지했다. 그리고 신규 가입을 했다. 이젠 자동 번호 연결도 안 된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내게 연락하기가 번거로워질 것이다. 이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 지인들에 대한 만행이다.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신규가입을 하면서 파우치가 예뻐서 너무 갖고 싶었던 핑크색 클러치폰을 시가보다 훨씬 싼값에 가질 수 있었다. 내 지인들의 편리함을 포기시키고, 갖고 싶었던 핸드폰을 싸게 잡았다. 왜 그랬는가? 몇십만원 때문에? 핸드폰을 해지한 6월 1일 밤 생각해 보았다. 이 파격적인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내 무의식속에 있던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원하는 욕구가, 나를 이렇게 하도록 조종한 듯하다.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그러나 자유롭다. 오랫동안 놓지 못한 철봉을 놓아버린 듯하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새 번호를 알려드리면 된다. 번호를 알려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정리가 될 것이다. 마치 서랍 속의 물건들을 정리하듯, 해묵은 감정을 정리하듯, 그렇게 지인들도 정리를 하면 되는 것이다. 놓지 못했기에 팔이 아팠음을 깨달았다.
6월을 맞으며 나는 2가지의 선택을 했다. 남들에게는 식사메뉴 선택만큼이나 쉬운 일일지도 모를 일이, 내게는 15년, 10년의 습관을 버리는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퇴근 후 수영장에 간 것은 한시도 놓지 못한 내 10년의 의무를 한쪽으로 밀쳐낸 행위이다. 결혼 후에 처음으로 나만을 생각하고, 가족보다도 나를 더 소중히 여기겠다는 마음이 밖으로 표현된 행위이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가족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는 행복하다.
15년 된 모바일폰 번호를 버리면서 저지른 내 지인들에게 행한 만행은, 앞으로 나는 미래만 보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지난 일에는 가슴 한쪽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단의 상징이다. 이젠 선택당하지 않고 내가 선택하겠다는 자유의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이 2가지의 선택과 버림을 동시에 시행한 나는 지금, 행복하고 자유롭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할 수 있을 때 나는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해질 것이다. 변경연에 오고 나서 두 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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