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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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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7일 13시 33분 등록

1. 도장

 

출근하자마자 도장을 찍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도장을 찍는다

 

제대로 찍어야 해서

찍어놓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돌이키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실수없이

도장 찍는 연습을 한다.

 

2. 새벽강에서

 

‘새벽강에 왔다네’

‘섬진강 소년이 악양에서 왔다네’

 

집 짓는 목수

시 짓는 사연

몸 지어내는 요가선생

장승깍는 빙산선생이

한 자리에 모였다네

 

오뉴월 차농사가 한물지나고

바쁜 걸음 잠시 쉬어

벗들과 취하려고 왔다네

그리운 이름

얼굴 보고픈

시인은 그렇게 그립고

시인은 그렇게 정고파서

큰 비오는 날

술 생각 핑계삼아

산을 내려왔다네

새벽 강가에 나왔다네

 

3. 둘이는 닮았다

 

10년만이다

그새 그녀의 머리에도

세월이 앉았다

 

10년만인데도

어제보고, 오늘 보는 사람처럼

우리는 말을 섞고

잔을 나누었다

그녀의 맑은 소주잔과

나의 시금털털한 맥주잔이 부딪힌다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춘다

 

그 사이 남편이 바뀌었다

딸 셋에 아들 하나까지 낳고서도

잘 나가는 한의사가 아니라

장승 깎고, 볏짚 꼬는

수염쟁이 빙산선생이

삼년 째 그녀의 새 ‘여보’다

 

눈빛이 행복을 말하지만,

깊은 아픔이 목소리에 베어 나온다

함께 데리고 산다는

고 1인 셋째 딸,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때를

지금도 넘기지 못하고 있단다

 

겉으론 멀쩡해보이던

그녀의 행복이 깨어진 때는

마흔을 앞둔 서른 중반, 그녀보다는

열 살 된 딸 아이의 나이로 기억한다

 

내게 묻는다

이제 1학년인 딸 아이가

최소한 5~6학년은 되어야

할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웃긴다.

나보다

그녀가 먼저 울었다.

 

따질 것이 있다며

취한 척하는 오학년짜리 시인을 사이에 두고

건강하란 말을

인사로 남겼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패달을

밟을 수 있었다

새벽 강을 잠시 뒤로 하고...

 

4. 시인, 풀 뜯어 먹는 소리

 

진철아...

오랜만에 만난 그가 술을 권한다

어깨 위로 차를 볶던 손이 얹혀진다

아직도 따뜻하다

여전히

그는 레종 블루

나는 레종 블랙

시작과 끝이 다르지만

사는 동안 우리는 서로 닮았다는 걸 안다

 

그도 풀을 뜯고

나도 풀만 먹고

그도 총각이고

나도 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한 양푼 가득

상추 씹어 먹는데

혼자서는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다 먹어져서 울컥 서러웠단다

자고 싶어서

쑥-갓은 빼고

된장에 상추만 먹었더니

되려 밤이 길어지더란다

 

꽃비 오려는

지랄 같은 밤이다

 

5. 언제나 그 자리

 

그가 새벽 강가에 나오면

앉는 자리가 있다

대학에서 교수를 한다는

그의 씨발 놈이 맞은 편에 앉고

늘 달고 다니는 불알들 대신

오늘은 집 짓는 목수들이

옆에 앉았지만,

장승 깎는 그는 지난 번 그 자리다

몸 짓는 요가선생 자리는

삼 년 전부터, 시인소개로 만났다는

장승쟁이의 옆 자리다

그녀가 새로 선택한 자리다

나는...

늦게 온 나는 정해진 자리가 따로 없다

시인 옆 자리도 앉았다가

요가 선생 마주도 보았다가

목수 옆에 머물기도 했다

무슨 상관이랴

어딘들

마음 가는 자리가 내 자리다

 

6. 새벽강

 

강이 보고 싶었던 걸까

그 이른 새벽부터

떠돌던 걸음들이

결국 강으로 모였다

 

누구는 김밥생각에 배가 고프고

더러는 술 생각에 때를 넘기고

굳이 오라하지 않았어도

그리운 것들은 모두

강으로 흘러든다

 

술을 핑계 삼고

안주를 입에 올리지만

결국 그리움이다

외로움이다

강이 보고 싶은 이유는

 

그 이른 새벽에 조차

잠 이루지 못하고서

강에 나온 것은

강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강에 몸 던지고픈 마음 탓이다

 

7. 그가 답장 안한 말뜻은

 

그가 문자를 씹은 이유는

껌이 없어서가 아니란다

굳이 와도

안 말리겠다는 말이란다

기다리지 않겠지만,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뜻이란다

 

소심한 사람...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바보...

마음은 말보다는

침묵으로 하는 건데

나는 아직도 말꼬리를 잡고 있다

 

‘아새끼’만 놓고 오란다

7월 중순즈음

장마 사이에 잠깐

차를 한 번 더 내려나 보다

 

8.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

 

막 세상에 나온

그녀를 위해,

 

여럿이 모여 밥을 비비기로 했다.

비밀로 하기로 했다.

 

쓸 것이 많은 그녀

지워야 할 기억들

끊어야 할 인연들

접어야 할 일들

도움을 불러야 할 때를 잊지 말라고

 

노란 연필을 통째로 한 다스

일년 열 두달 내내 열 두 자루

지우개, 칼, 포스트 잇, 호루라기

그리고 모두 담아서

자주색 퀼트 수제 필통

 

아참, 잘 써지는 리필용 볼펜 심 한 자루도.

 

9. 거짓말 선수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녀

넘 봐서도 안되고

넘 봐선 안되는 그녀

거짓말 선수다

내 뺨칠 정도다

사람 놀래키려고

그녀는 서슴없이

거짓말을 해댄다

따라잡지 못한다

우리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런 그녀도

표정은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문자를 한다

이제 나이 먹어

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제 나도 선수다

아직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나보다 백배만큼 낫다

 

10. 몸에 새긴 약속

 

여덟 살 딸래미가

그림 그릴 종이가 필요하단다.

사무실 나가는 길이면

사무실에서 좀 가져오란다.

아주

맡겨 논 A4 용지 내노라는 듯

부하직원 업무지시 하듯

명령을 하고

못 미더운 듯 자꾸 다짐을 받는다.

 

그래서 손 등에 써 보였다.

 

'A4' 라고

 

아빠가 어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걱정마, 너 잊지 않을게

 

집 나가는

현관 앞에서

꼬옥 안아주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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