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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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필름이 끊기다.
변경연에서 공저엠티를 갔다. 평창군의 단골펜션이라 벌써 세 번째 오는 곳이다. 우리 말고는 와인동호회 한 팀이 와 있을 뿐이다. 홍대앞에서 카페를 오래 했다는 주인장은 아는 사람들만 받는다고 하더니 와인동호회 멤버들과도 아주 친근해 보인다. 아직 일행이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그쪽에서 싱싱한 회가 한 접시 넘어 왔다. 방금 주문진까지 가서 떠 왔다는 회가 맛깔스러웠다. 광어는 쫄깃했고, 가늘게 썬 한치는 혀에 착착 감겨왔으며, 의외로 고등어도 뒷맛이 고소했다. 최상급의 안주에 맞춰 소주 몇 잔을 맛있게 했나 보다.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며 말이 막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시장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회의를 하기 전에 바비큐를 먼저 하기로 했다. 여흥이 도드라지며 보기드문 화합의 장이 이루어졌다. 우리 팀의 목삼겹살 구이가 넘어가고, 저쪽에서는 시음을 하고 남은 와인이 자꾸 건네져왔다. 우리 팀이 준비한 와인도 좋아서 홀짝홀짝 몇 잔을 맛있게 마셨나 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섞여 담소가 한창인데 신명이 고조된 내가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추는 모습이 좋아보였나 저쪽 팀의 여자 한 명이 자꾸 술을 건네며 말을 붙여왔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번에는 좀전까지 정점으로 차오르던 흥에서 곧두박질쳐 나이든다는 서러움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 아침에 이층방에서 눈을 뜨니 죽을 맛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게 어떻게 인생이냐며, 너무나 빨랐던 세월을 한탄하며 엉엉 운 것까지만 생각나고,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 덩치 큰 몸을 누가 떠메고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더 이상 추태는 없었는지 불안했다. 겉옷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설마 토악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놀랍게도 나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고 한다. 바비큐를 끝내고 회의를 할 때도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내 발로 이층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휴유! 정말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충격이 컸다. 말로만 듣던 ‘필름이 끊긴다’는 경험은 두려움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가 활개치고 다니고, 나는 기억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게다가 한 번 끊어져본 필름은 앞으로는 작은 자극으로도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닐까?
황당해하고 있는 내게 구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는 최근에 차를 타다가 차문에 코를 부딪쳤다. 코뼈 부분이라 아프기도 했지만 왜 차문에 부딪쳤는지가 더 의아했다. 자기 몸이 생각처럼 통제가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매사에 천천히 반응해야 하겠구나” 그렇게 마음에 새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내게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격급하게 불쑥불쑥 발언하곤 하는 나를 몇 년이나 지켜본 뒤에 하는 말씀이라 생각하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10월 31일, 미탄에 가다.
평창에 온 김에 벼르고 벼르던 미탄에 갔다. 여기저기 표지판 속에 ‘미탄’이라는 지명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대학졸업 즈음 농활나갔던, 젊은 날의 열정이 동화처럼 순수하게 각인된 곳이다. 삼십년 동안 닉네임으로 쓰고 있을 정도로 그 곳에서의 기억은 내게 그리움의 원형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얼굴은 죽고 없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술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십대 초반의 그 순하고 자존심강한 모습 어디에 이런 생애가 숨어 있었던 것일까? 불과 10여년 세월에 술이 한 사람의 숨통을 옥죄려면 얼마나 많이 마셨던 것일까? 이렇게 마시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될대로 되라지’ 하는 자포자기가 강했을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요행심이 더 강했을까.
완만한 자살행위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신 한 사람을 떠올리다 아차 싶었다. 나역시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과식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여자들이 수다로 스트레스를 푸는데 비해 나는 먹는 것으로 기분을 전환한다. 절식해야지, 운동해야지 생각뿐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채로 오늘 아침에도 한 숟갈을 더 먹었다. 과식하는 습관이 쌓여 돌이키지 못할 병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나또한 누구처럼 속절없이 초라한 생애를 마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인생의 복병은 어디에나 숨어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난생처음 삶이 두려웠다. 내 나이가 인생전반전의 성적표를 받아들 나이라는 것이 비로소 실감났다. 의욕이 넘쳐서 젊은 기분으로 사느라 좀처럼 느끼지 못하던 기분이었다.
11월 2일, 과거를 태우다
나는 정신이 번쩍 나서 묵은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몇 십년동안 똑같은 문제, 똑같은 자괴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똑같은 희망조차 넋두리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그 많은 기회를 다 놓치고, 그 많은 세월을 다 허비하고 이제 내가 가진 패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보였다. 나는 기어이 그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고 일기장을 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이 커지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조금씩 찢어 던지며, 이 한 장에 나태를, 이 한 장에 시간 허비하는 못된 습관을, 이 한 장에 대책없는 과잉낙관주의를 담아 태울 수 있기를 갈구했다. 내 삶도 아무런 의미 없는 에피소드, 그저 남루하기 그지없는 삽화에서 정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거다. 이제 더 이상 응석도 자만도 없다. 내 힘으로 일구어낸 것, 내가 쓴 책,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네트워킹, 통장잔고... 내 것만이 내 것이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피터팬에서 비로소 어른이 된 느낌이다. 이 가을에.


우리도 자주 같은 오류를 범하듯이,
눈 앞의 일에 좀 더 마음이 쏠려있었을 뿐이겠지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우리는 위로를 원하는 그 한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보듬을 수 있을까요?^^
작년에 맑은님 글을 보고 반하여 내쪽에서 먼저 연락을 했었지요.
평소 내 스타일에 비추어 백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일인데요^^
너무 다재다능하고 다방면으로 촉수가 뻗어있어
글 한 편에 너무 많은 갈래와 참조가 들어가는 폐단만 극복하면
얼마든지 좋은 저자가 될 수 있을꺼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요즘 글을 보니,
바로 그 점이 정리가 되어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만한 파워를 뿜고 있는 것을 보네요.
연구원 과정이 직효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만땅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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