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양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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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 Q :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 : 긴 겨울을 버텨낸 나무가 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
<통도사, 사진/양경수>
1.
2002년 겨울날 땅끝 해남 미황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주지를 맡고 계신 금강스님과 산책을 할 때였다.
"윤회輪廻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라고 물었던 듯하다. 나의 질문에 스님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싱거운 대답이라고 여겼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신선한 충격이었다. 윤회를 종교적인 교리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삶과 죽음은 분명한 자연 법칙이 아니냐는 반문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죽음이 있으면 다시 삶이 오는 것이 아닐까. 자연의 모든 것들이 돌고 도는데 나또한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윤회는 믿음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 아닐까.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 끝이라 생각했던 그 경계점이 다시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한 그루의 나무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직까지 죽음을 겪지 않은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2.
사실 미황사에서의 깨달음을 실제 체험하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미황사에서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도시에서 살아온 나였지만 내 안의 생태와 자연에 대한 끌림을 발견하였고, 그 끌림을 따라 나무공부를 시작했었다. 일주일에 한번 퇴근 후 나무와 생태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고 주말엔 도감을 들고 산을 다녔다.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함께 공부하는 지인들과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느라 산 정상은 커녕 초입에서 시간이 다되어 내려오기 일수였다. 공부가 계속되자 그냥 나무로만 알던 것들의 이름을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쪽동백, 느티나무, 싸리나무 등으로 구분하여 불러줄 수 있었다.다행히 남산 근처에 직장이 있어 매일 매일 산책로를 걸었다. 나무들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계절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 부터다.긴 겨울을 나고 얼음이 녹고 햇살이 따사롭다 느껴지는 어느날, 갑자기 푸른디 푸른 잎들을 내놓는 나무들의 향연에 난생 처음 '아~!'하며 감동했었다. 그러다 짓푸른 여름 한철이 되면 온갖 생명체들은 살아 춤을 추었다. 다시 모든 것을 내놓는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천천히 벌거벗은 몸이 되고, 그 많던 생명체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겨울이 되고, 숲은 죽음의 느낌처럼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그렇게 길고 어둡고 추운 시간을 버텨내면 언젠가는 결국 새 잎을 내고, 꽃망울을 터뜨렸다. 글로 쓰면 이렇듯 단순하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숲 가까이에서 생생히 바라보았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금강스님이 말씀하신 '변화하는 나무'를 생각으로가 아닌 실제로 바라본 것이었다.
3.
그대의 인생이란 여정 중 봄, 여름, 가을 아니면 겨울의 문턱 어디에 있던지, 그대의 주어진 순간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새로 태어남을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내 믿음만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름 한철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은 혹독한 겨울을 버텨낼 수 없을지 모른다.
혹독한 겨울에 꼭 해야할 것들을 하지 않고,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느라 바쁠테니까 말이다.운 좋게 벼텨 냈다 해도 찾아온 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없으리라.'목적'이나 '의미'라는 함정에 빠져 사느라 '삶이 주는 생생한 체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의미다.
모이어스가 캠벨에게 "당신 작업의 주제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인가요?" 라고 묻자 ,캠벨은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라고 말했다. (신화의 힘, 15p)여기서 '삶의 의미'는 지적인 앎을 지시하는 말이다. 관념이란 말이다. '살아있음의 경험'이란 말도 이 자체로는 단어에 불과한 관념이지만이 단어가 지시하는 것은 '삶' 자체인 것 같다. 이것이 지시하는 곳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애매한 문장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4.
지금까지 말한 겨울이 꼭 육체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어떤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도 있겠다. 세상과 잠시 떨어져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갖거나, 과거의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삶에 대한 순수한 욕망만을 키우는 시기이거나, 집착을 버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도 버리는 시기를 '겨울'이라 말 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나무가 그랬듯이 우리는 길고, 어둡고, 추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바라보고, 직면해야 할 것이다.
길게만 느껴지던 올 해 겨울도 지나가고 있다. 학생들의 졸업식도 끝났고 새 학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 계절이다.'새로움'을 뜻한다는 '설'도 지났고 농삿일이 '시작'된다는 정월대보름도 지났다.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쌀쌀하지만 왠지 모를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우내 숲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죽음의 공포를 온 몸으로 느끼며 끊임없이 깨어있으려고 노력했을 겨울 나무를 느껴 본다. 올해도 다시 태어나는 나무들의 향연을 만끽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새로 태어날 나무들이 애타게 기다려진다.
그리고 7기 연구원에 도전하는 지금을 내 인생의 '겨울'이라 여기며 충분히 체험하며 살아낼 것이다. 새로 태어날 그 날의 감동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