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루미
- 조회 수 2464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8년 8월 4일
새벽부터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한 내가 있다. 무거운 몸이었지만 움직여야 할 것 같았고 움직이면 힘이 들어 어쩔 줄 모르던 내가 있다. 이럴 줄 몰랐다며 슬슬 주변의 사람들까지 미워지기 시작했다. ‘수술할걸. 수술할걸. 수술할걸.’ 이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 눈치 없는 엄마는 옆에 와서 “네가 순산하는 꿈을 꿨어. 잘 할 수 있을꺼야.” 라고 말을 한다. 지금도 죽겠는데 이건 끝까지 해보라는 말이잖아.
11시경, “엄마, 소리 지르지 말고 힘을 줘요.”간호사가 이런다. “아픈데 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 악에 받쳐 나도 한 마디 한다. 드라마에서 보면 소리 지르면서 아이를 낳더만, 현실에서는 아닌가보다. 옆을 맴돌아 주던 간호사들이 시간이 걸리겠다며 자리를 뜬다. 경황없는 순간이지만 생각이 든다. ‘이런, 간호사들이 가버리면 안되잖아.’ 시키는 대로 한다.
아픈 나한테 옆 침대로 옮기라는 말까지 한다. 어기적어기적 기어갔더니 분만실로 옮겨준다. 마지막 통증과 찾아오는 편안함. 11시 37분 하은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2.56kg의 작은 몸으로. 회색빛을 띤 채 비쩍 마른 팔다리를 휘저으며 운다. 간호사가 아이를 안겨준다. 떨리는 팔로 아이를 안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엄마가 되는 순간이다.
아이를 낳으면 몸무게가 6-7kg은 줄어들꺼라고 했는데 체중계 바늘은 이전과 별다름이 없다. 하다못해 3kg이라도 빠져야 하는 거잖아. 당연히 옷들은 맞지 않는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보면 화가 난다.
아이는 운다. 엄마가 안아주면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아지는게 아니다. 내가 안아도 아이는 운다. 3시간 4시간 마다 깨서 잠도 부족해 죽겠는데 아이는 안아줘도 운다. 흔들어 줘도 운다. 결국 아이를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이래도 저래도 울거라면 나라도 편하게 있자고.
2011년 2월. 새벽에 깬 아이가 “엄마”하고 나를 부른다. 이젠 화가 나지 않는다. “왜? 우리 공주가 깼어?”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베고 잠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고통을 겪었으니 엄마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나도 우리 엄마처럼 자애롭고 현명한 엄마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아이에 대해서 참을성이 강해지고 한 없이 너그러운 엄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되지 않았다. 나의 밑바닥에는 예전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는 내가 있었다. 아가씨로의 나의 모습을 버리고 싶지 않은 내가 있었다. 편안하게 밥을 먹고 싫증날 때까지 뒹굴거리고 싶은 내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미니스커트에 작은 가방을 메고 힐을 신고 싶었다. 많은 상황이 변했음에도 나는 변하고 싶지 않다고 버텼다.
나는 단순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되지 위해서 아가씨였을 때의 습관을 버릴 필요가 있었음에도 나는 그리 하지 않고 있었다.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내가 엄마의 모습을 갖추길 바랬다. 옛날의 습관을 간직하면서 남들이 엄마라고 인정해주기를 바랬다. 양손 가득 움켜쥔 채로 다른 하나를 더 잡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꾸역꾸역 내 안으로 밀어 넣기만 했다. 결국 그것은 소화불량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변해갔다. 높은 구두 굽은 낮아지고 가방은 커져가고 내 가방 안에는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채워졌다. 내 화장품은 못 챙겨도 아이의 크림은 챙기고 내 칫솔은 못 챙겨도 아이의 치약과 칫솔은 챙겼다. 그렇게 나는 아가씨의 나를 버리고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할 줄 알게 되었고, 어디에서든 쭈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뽀로로와 짱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가씨로의 내가 사라지면 나의 매력을 잃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줌마가 되어 갈까봐 걱정이 되어 그것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버렸더니 엄마로의 내가 찾아왔다. 엄마로의 나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예전의 모습은 죽어서 사라져버릴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어려 보이던 아가씨는 이제 어려보이는 엄마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그 모습에 안녕을 고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모습에 안녕을 고하고 그것을 떠나 보낸 순간 그 자리는 새로운 무언가가 채워지면서 나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태어난 존재가 새로운 모습을 맞이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성형이라 부르는 것으로도 가능은 하겠지만 성형 역시 그 변화한 외향적인 부분으로 인해서 새로운 자신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면 그 역시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를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 넣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오늘 지금 당장 가능하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버리는 순간 새로운 것을 밀어 넣을 자리가 생길 것이며,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밀어 넣은 순간 이미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이다. 아니, 밀어 넣지 않더라도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는 세상도 예전에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 같지 않다. 작은 변화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내 안에서 가능하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당신 오늘 지금 당장 당신은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가짐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이 버릴 모습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