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서영
- 조회 수 225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심오하고도 잡히지 않는 물음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 문득 신랑에게 질문하였다.
“살면서 새로 태어났다고 느꼈을 때가 있나요?”
그는 망설임없이 대답하였다.
“그럼. 늘 느끼곤 하지.”
귀가 번쩍 뜨였다. 이렇듯 심오한 진리에 대하여 단번에 대답하다니. 어쩌면 나의 반쪽은 내가 알아온 것 이상으로 영적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질문하였다.
“응? 정말 언제 새로 태어났다고 느끼는데?”
“음….내가 새로 태어남을 느끼는 것은 말이야.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야. 내 안의 것을 모두 비우고 났을 때 무언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느낌이랄까?”
자신있게 대답하는 그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난 또 뭐라고. 난 정말 심각하단 말이야.”
허무함을 느끼며 한바탕 웃고 돌아서려는 찰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버리지 않고 가지려고만 하지 않았나. 꽉 움켜진 주먹을 펴지 못한 채 무언가를 얻으려 달려들진 않았나. 늘 새로 태어남을 추구하면서도 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 아닌가.’
문득 배출하지 못하고 먹으려고만 욕심부리다가 병들어가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러한 엉뚱한 화장실 철학으로부터 ‘새로 태어남’에 대한 성찰이 계속하여 이어졌다.
조셉 캠벨의 심화의 힘에서는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살고자 할 때 그 삶은 성숙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무엇인가? 문득 언젠가 요가를 하던 중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 쏟아내세요. 아끼지 말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세요. 기진맥진해져 움직이기조차 힘든 순간에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죽음이라 함은 내 안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냄을 의미한다.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 온전히 쏟아내지 못 할 때면 빈 자리가 새롭게 채워지지 못한다. 두려움 없이 온전히 쏟아냈을 때 어디에선가 우주로부터 신선한 에너지가 내 안으로 들어와 충만해지는 신비는 경험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다시 내게 물었다. ‘지금 이렇게 칠흙 같은 어둠을 헤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불안한가?’
이어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답변이 들려왔다. ‘욕심때문이다.’ 그렇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가지지 못한 것을 탐욕하고 질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던 시절에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이 내 안을 벗어나 저 위에 있는 자들을 바라 보았을 때 내 마음에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욕심은 지금의 나를 자책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욕심은 탐욕으로써 더욱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내면의 탐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새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자기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미가 명확해진 다음에는 내 안의 것을 모두 쏟아내는 단계, 즉 죽음이 따른다. 이대로 죽으면 어쩌나 염려할 필요 없다. 다 쏟아내지 않고서는 텅 빈 육체에 흘러들어오는 우주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죽음의 의례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고, 죽음으로써 태어날 수 있는 것, 이것이 단순하고도 진실한 삶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