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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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6일 카카오톡 대화 중에서
나: 관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해?
너: 공감이지, 공통된 관심사와 취향을 통해 대화하고 공감하는 거. 영혼을 치유하고 기대어 쉴 수 있는...
쓴다는 것은 아는 쪽과 알려지는 쪽을 분리하여 더욱더 분명히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과 완전히 구별되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뿐 아니라 객관적 세계와 대립되는 내면의 자아에 대해서도 영혼을 개방하는 행위이다.
-플라톤 서문 Preface to Plato-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자의식과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이들은 보았다. 이때 우애적 유대감을 만드는 수단이 바로 공감이다.
당신이 어떤 관계에 있다면 그 관계는 당신의 일부이다
–제레미 리프킨-
네가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이 책을 읽고서 생각했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너무나 간결하게 잘 전달해 준 것 같아. 여러모로 많이 배운다. 이렇게 쉽게 우리들의 의견을 나누고 또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미 우리들의 영혼이 서로 기대어 쉴 수 있는 바탕이 있고 또 글과 매체의 등장으로 더 손쉬워진 거겠지. 요즘에는 스마트 폰이 있어서 그 공감의 속도와 나눔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는 거겠고 말야. 늘 관계라는 말을 떠올리면 난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라. 네가 나를 불러주었을 때에 비로소 내가 꽃이 될 수 있다는 시 말야. 내가 나이게 하고 또 너와 나의 사이의 간극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것 즉 관계가 생기게 하는 것이 바로 사회라고 말이지. 그 에너지의 파장이 요즘에는 더욱 확장되고 또 더욱 촘촘해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 세대들의 관계 형성이 예전과 좀 달라진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해. 에너지의 파동도 더욱 빨라지고 있고 말야. 예전에는 공감의 표현에 걸리는 시간적 제약 공간적 제약이 심했다고 한다면 예를들어 러브레터만해도 우체부 아저씨의 실수로 몇 년을 사모하는 이의 소식을 기다린 연인들도 있다고 하잖아. 요즘에는 페이스북에 친구 신청 했는데 왜 아직도 답이 없냐고 바로바로 연락이 오거나 또 언제 어디서든 서로의 활동에 생각에 공감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페이스북이나 기타 포털 사이트의 좋아요 또는 공감하기 버튼이 바로 그런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거겠지)가 온 것이지. 심지어 내가 아프리카에 있던 오스트리아에 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이 통하였느냐 하는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겠지.
사실 어떤 측면으로는 이렇게 쉽게 관계 형성이 되고 빠르게 공감의 속도가 이루어지면서 정서적으로 강하게 묶이게 되는 관계는 매일 집에서 마주하는 가족 보다도 더 많은 친밀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탄탄함이 피를 넘어설 때도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마음을 열게 되고 또 그러면서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어린왕자가 얘기했듯이 수 많은 장미 중에서 왜 하필 그 장미였냐 하는 것이지 다른 장미와는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 장미와는 대화도 나누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서로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겠지. 지금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장단점은 하나라고 하듯이 그렇기에 더욱 외로워지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쉬워지는 것 같아. 쉽게 연결된 관계가 쉽게 끊어질 수도 있고 또 그 관계에 깊은 공감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다면 그건 프로이트가 말한 이기적 접근이거나 공격성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이거든.
내가 작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쓰고 있는 ‘사샤의 모닝페이지’ 너도 아침마다 잘 받고 있지? 종종 난 그렇게 글쓰기 작업을 하면서 매우 외롭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벽에 대고 소리치는 느낌이랄까 순수히 고독한 작업이니까. 그런데 문득 어느 날 한 독자에게서 답글이 오면 그것이 한 줄이건 두 줄이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내게 또 다른 존재로 각인이 되고 우리 사이에는 새로운 공감대 형성과 더불어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너도 바쁘겠지만 가끔씩 답글을 써주면 넘 고맙겠다. 누군가 내게 물어 본 적이 있어 왜 글을 쓰냐고, 그 때 난 아마도 나에게 글 쓰기는 치유라고 했었던 것 같아 그런데 플라톤의 서문을 읽다가 보니 또 제레미 리프킨의 책을 읽고나서 나의 행위를 돌아보니 그 저변에는 함께나누고픈 공감에 대한 갈증이자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내면의 탐색을 통한 영혼의 개방이 아니였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려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러한 사랑에 대한 갈증과 나눔에 대한 의지가 상처에 대한 벽의 높이를 낮출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너도 시간이 된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봐 관계에 대한 네 답변을 봤을 때에 너도 제레미 리프킨의 말에 매우 공감하게 될거란 확신이 들었거든. 결국 심리학과 철학, 신학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면서 저술한 이 책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인간 관계의 형성이 결국 공감을 바탕으로한 사랑이라는 점인 것 같아. 프로이트를 통해서 한 동안 많이 왜곡되어 있던 인간성에 대해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지. 그건 1장의 유아발달과정을 보면 너도 아마 깜짝 놀랄거야 우리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지구라는 별 이 아름다운 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모습안에 얼마나 놀라운 상호관계가 펼쳐지고 있는지 말야. 문득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나며 하신 모든 것이 결국 사랑이다라는 말이 새삼 깊이 있게 다가온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들의 이 소중한 관계 역시 눈에 보이지않는 그 무엇을 바탕을 살아 움직이고 있고 그 에너지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서로 너와 나의 노력이 늘 필요하다는 걸 말야.
그래서 난 이렇게 수첩에 적어 놓았어. 관계란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의 에너지라고. 결국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고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고 말야. 이것을 통해 사회가 탄생하고 또 관계 형성을 통해 나를 재조명하는거지. 그래서 종국에는 다시 우리 모두가 하나인 상태로 인식하게 되고 변하지 않는 에너지 속에서 어떻게 함께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공감하고 나누는 것이 생명체들의 숙제가 아닌가 하고 말야. 처음부터 너와 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안에 같인 자폐증이지만 자타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사이의 에너지를 느낀 후 다시 자타불이를 실천하고 또 역지사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면 이 거대한 지구라는 노아의 방주안에서 삶의 조화와 평화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