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에 대한 의미를 얻어내려면 그가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와 그가 공유하는 많은 관계를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과거에 인간은 개인적 속성의 총합이다. 새로운 도식에서 그는 그가 참여하는 활동의 순간적 단면이다. – 제레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중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의 책장을 보라는 말이 있지만 관계 또한 그 사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키워드다. 누구를 만나고 그들과 무엇을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 가치관, 삶의 방식과 지향점을 알 수 있다. 프로필에 적혀 있는 그의 이름, 나이, 성별, 주소, 학력 등은 그의 과거일 뿐이다. 그가 공유하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면 그의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 관계가 우리의 삶을 일구어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철저히 회사형 인간이었다. 회사에서의 성공을 위해 개인적인 가치들은 당연히 희생되어야 한다고 믿는 냉혹한 인간이 바로 나였다. 그 시절 나의 관계라는 것은 당연히 직장에서의 상사, 동료, 팀원과 관련된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간혹 전 직장 선후배나 학교 동창, 친구와의 접촉은 있었지만 그것들에 대한 우선 순위는 항상 밀려있었다. 나의 시간의 대부분은 회사에서 소비되었고 회사 사람들과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회사에서 더 빨리 승진하고 더 효과적으로 일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 때 나에게 관계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만들어야 하는 안전망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내가 작년 초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고 새로 태어난 후 변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과 가족을 최우선에 두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 대해서 고민하는 2박 3일의 시간을 보낸 후에는 새로운 목표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도 놓지 못한 미련으로 근근이 버텨가던 회사 생활도 결국은 마침표를 찍었다. 글을 쓰겠다고 모인 사람들 속에서 위로 받고 성장해 가면서 잃었던 유머와 활력을 되찾았다. 가족과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며 아늑한 행복감에 출렁이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붓글씨를 쓰고 바느질을 하면서 또 다른 세계를 체험한다. 이제 관계가 나를 만들어간다. 누구와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내가 선택했지만 이후 내가 만들어 놓은 관계들이 나를 이루어갔다.

태어날 때 결정지어진 관계는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안식처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벗을 수 없는 굴레일 수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 친정 부모님은 지치면 날아들어가 쉴 수 있는 둥지 같은 존재다. 반대하던 결혼을 허락 하던 날 아버지가 했던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우리 부부가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갈 때면 아버지는 우리 부부의 등을 밀어 주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시댁 식구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희생해야만 돌볼 수 있는 어깨의 짐 같은 존재다. 대학시절, 친구들은 방학 동안 해외여행에 필요한 돈을 벌었지만 그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취직하자 마자 자신의 연봉을 담보로 빌린 돈으로 그의 가족은 겨우 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게 태생적 관계는 가끔은 눈 딱 감고 외면하고 싶은 것임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관계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 무촌이라는 부부관계에서도 일촌이라는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안타까운 시댁과의 관계에서도 조금은 쿨하고 싶다. 내가 해준만큼 무언가를 받아 내려는 계산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있나 생각하기 보다는 그럴 수 있다 여기고 싶다. 내가 해주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나는 내가 만든 관계 속에서도 조금은 무심하고 조금은 냉정하고 싶다. 어떤 사람 때문에 그 관계를 마감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선택한 관계이건 나에게 주어진 관계이건 결국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 관계 속에서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고 싶다. 타인과의 관계가 무너지더라도 여전히 우뚝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싶다. 나만의 세계가 확고히 구축되어 있으면 관계가 무너지더라도 나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나는 또 하나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는 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관계는 또 나의 삶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꾸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