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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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 칼럼 - 관계란 무엇인가?
[부제: 관심이 아닌, 관계]
연인 ‘관계’, 친구 ‘관계’, 부부 ‘관계’, 형제 ‘관계’, 가족 ‘관계’. 각 관계마다 개인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있고, 사람들은 사회화 초기 단계에 예외 없이 이러한 관계에 적응하는 훈련을 거친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개인은 조금씩 자신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모아나가고, 이는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 관계 맺기를 학습한 개인에게는, 복수의 사회적 역할이 요구된다. 여러 역할이 촘촘하게 엮여 있는 현실 속에서, 그 관계들의 경중이 다르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행동양식도 다르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준과, 자신의 성격 및 기호를 조화시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작업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개인의 인품이나 성장의 폭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성인이 되면서 관계 맺기에 보다 많은 선택의 자유가 생기고,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지만, 관계는 각 자아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개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관계 속에서 보내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관계의 기계적 합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굳이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본인은 개인이 관계에 우선한다는 입장이고, 관계는 각 개인의 자아를 고양시키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계를 개인의 사회화 혹은 생존의 도구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건강한 관계, 상호작용이 활발한 관계 속에서 조차도 개인은 혼란을 겪거나 방황을 할 가능성이 높다. 성인이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를 성장시키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공감의 시대>에서 제러미 리프킨이 희망차게 이야기했듯,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이전에 비해 현대인에게는 관계의 폭을 비약적으로 넓힐 기회가 있다. 그는 이러한 관계의 넓어짐에서 공감의 확산과 그에 따른 변화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말하고 있다. 조금은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리프킨만큼 희망적이지 못하다. 공감의 가능성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관계 맺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각기 다른 자아가 만나게 되는 관계의 지점에서 각 개인은 자신과 다른 자아를 보며 안정적으로 배우거나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다른 자아의 모습을 보며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는 힘든 과정을 거쳐 변화를 일궈내야 한다. 두 자아가 만나는 관계의 지점은 따라서 결코 아름답고 포근하기만 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가장 최근의 연애경험을 떠올려보시길).
내가 생각하는 관계를 요약하자면, ‘각 개인이 세상과 소통하고, 이를 통해 느낀 바대로 행동하는 방식’이라고 하겠다. 나는 관계에서 공감만큼이나 그에 따른 행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는 관계는, 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현 시대는 관심은 많지만 진정한 관계는 적은 세상이다. 굳이 자아를 위험에 빠뜨려가면서까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공감의 시대>를 읽으면서 리프킨이 (지나친)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공간적 제약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 실은 환경 문제나 빈곤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을 슬쩍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해법이 공감의 수준에서 애매하게 끝나버리는 것이 조금은 불편했다. 제대로 된 공감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쿨함, 차가운 도시 남/여성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서 우리는 관심을 관계로 착각하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게 마음을 쓰고, ~ 생각을 하는 것’, 그러나 나의 변화까지는 일으킬 생각은 없는 것이 관계라고.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회화 초기에 교육체계로서의 관계 맺기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관계에서 상상력이나 선택의 자유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미미할지라도, 관계 속에서 용감해질 수 있길, 그리고 ‘나를 지키려고 용을 쓰지 않는 것’이 나의 관계를-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는 것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