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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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에 기가 흐르도록 하라"
어린 승업이 선비 김병문에 이끌려 처음으로 모신 스승이 해준 말이었다.
그림을 무엇으로 그릴까. 혹은 예술을 무엇으로 할까..에 대한 동양인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한 마디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삶을 표현하는 말일수도 있겠고..
19세기말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 장 승업.
그의 삶을 엿보자면 정규과정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
거리를 헤매던 어린 시절을 거쳐 다시 재회한 선비 김병문에 의해 그나마도 그림 세계의 언저리에서 어깨 너머로 혹은 귀동냥으로 보고 들으며 스스로 깨침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천재.
그에게 가정은 없었다.
욕망에 따르는 삶. 그 가운데 매향을 향해 따듯한 정을 품어는 봤지만 그 정도였다.
그에겐 예술이 사랑이나 가정생활보단 훨씬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저 터져나오는 욕망을 분출하는 것만 허락되었을 뿐.
권력 또한 거치장스럽다.
부잣집 사대부에게 그림을 팔아 술값을 마련하긴 하지만
임금님의 부름도 그에겐 거치장스러울 뿐이다.
"꼴려야 그리지!"
궁 안에서 낙옆을 쓰는 그를 끌고 들어가 그림이나 그리라는 상궁에게 내뱉는 그의 말이다.
붓에 기가 흘러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환쟁이의 삶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꼴려야 그린다"는 이 한 마디 또한 예술가들의 삶을 다 담고 있다 생각했다.
때론 밥을 벌기 위해 그려야 하고, 때론 명성을 얻기 위해 대중이 원하는 노래를 불러어 하고.
많은 예술가들도 꼴리는대로 살고 싶어 예술가의 길에 들어서고서도 그러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게 어딘 비단 예술가들만 그러할까. 우리 모두 똑같은 울타리, 똑같은 장벽 안에 있는건 아닐런지..
그조차 결국 장승업은 뛰어 넘었다. 궁궐을 박차고 나온게다.
그런 그가 가장 조심하던 게 무엇이었을까.
"그놈들의 말에 놀아나면 안되. 그럼 일생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하지."
자신의 작품을 칭송하는 사람들의 말을 대하는 승업의 태도이다.
사랑도 넘고, 권력도 넘어선 그에게 "당신 작품이 최고"라는 말은 어쩌면 사랑과 권력도 버렸기에 더더욱 유혹적일 수 있다. 자신의 전부를 걸다시피한 작품에의 칭송.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거없이 어찌 그가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에겐 외부 유혹보다 더 무섭게 내리치는 것이 있으니 다름아닌 내부에서 들려오는 말
"변해야 한다."
이 말이 그를 가장 미치게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이란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그건 그저 모사꾼이지 결코 예술가가 아니라 생각하는 천재.
술에 취해서 그린 자신의 자화상이 술 취한 원숭이라니..
그 때 그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은 다름아닌 매향이와의 재회.
신화에서 보면 영웅이 여신을 만나 드디어 온전한 삶을 이룩하는 여정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생 마음에 품고 그리워하던 매향이가 이제 그만 자기곁에서 좋아하는 그림이나 실컨 그리며 머무르라 한다.. 늙어가는 육신에 어찌 마음 촉촉히 젖어드는 말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매향이가 간직하고 있는 투박한 도자기 하나.
아..! 거기에 그가 넘어야 할 경계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매향이 곁을 떠나 홀로 천재의 삶을 완성하고, 끝내고, 새로운 경계를 시작하러 떠난다.
마지막 장면은 참 많은 걸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선지에서 도자기로 옮겨가 이제 예술의 경지를 넘어서는 천재.
복잡한 그림이 아니라 삶을 초월한듯한 연민의 단순함이 느껴지는 그림.
그리고 불로써 이 모든 것을 마감하고,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킴.
만드신 분들도 장인정신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 "취화선"
천재적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진정 예술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원함에 대해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한 영화.
그럼 나는..?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주인공 승업의 삶도 내게 해주는 말이 많았지만
승업의 제자, 재능에 있어 결코 승업을 쫓아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저 그가 좋아 따르고 모시던 그의 제자가 동학난에 가담하러 떠나며 승업에게 한 말이 귓전에 멤돈다.
"제가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쪽에 제 삶을 걸고 싶습니다.."
꼭 천재로만 살아야 하는건 아니지 않나.
역사에 이름이 남고 세상이 알아주고. 이런것이 중요한 건 아닐게다.
결국 장승업같은 천재도 권력이며 명성을 뛰어넘어 자신 안의 자신을 온전히 완성시킨 삶을 구현하려 했듯이, 나 역시 "나로서의 삶"을 살면 되는게다.
그런 내게 선비 김병문의 마지막 말은 무겁다.
우연히 승업과 마지막 재회를 한 그가 개화도, 동학난도 일장춘몽이라 말하며
"지긋이 힘을 길렀어야 했어.."라고 한다. 지긋이..
그렇지..
우리가 천재에게 배울 건, 바로 그거 아닐까..
천재들이 천재의 반열에 오를 때는 설익은 작품으로가 아니다.
천재의 재능을 타고 태어나도 이름없이 사라지는 별들 또한 무수히 많다.
그들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별이 되어 빛나는데, 그건 일생을 걸쳐 자신을 넘고 또 넘어서는 침묵의 노력 끝에 가능한 일이다.
조용히 그러나 묵묵히 "나로서의 삶"으로의 길이 걷고 싶다.
세상에 비바람이 치던, 강풍이 불어 나를 뒤흔들던
"자기실현"이라는 외길 하나쯤은 잃고싶지 않게 만드는 영화, 취화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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