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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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서나 만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그러다 우연히 글 쓰고 강연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인지 정체를 잘 모르는 식물이 자라나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잎만 가지고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구본형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중에서
나는 평범하게 살아 왔다. 대학은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인 줄 알았고, 대학을 졸업했으니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서 여러 번 전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결혼은 해야 하는 줄 알았고 결혼을 했으니 애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애를 둘 낳았다. 살 집 한 칸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대출을 받아 집을 샀고 직장에서는 남들보다 출세하고 싶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했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 나도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기력한 날들이 나를 찾아와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일상의 짐을 벗고 새로운 짐을 꾸려 새로운 삶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지금껏 살아보지 않았던, 특별한 삶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14년만의 안식년 휴가. 그것이 나를 특별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하루를 일군다. 누군가 말했다. 영혼의 빛을 되찾으려면 전혀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라고.
나는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글씨를 쓰며 마음을 닦는다. 마음을 닦으며 글씨에 몰입하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생각과 손끝이 하나가 되도록 주문을 걸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쓴다. 나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가사시간에 뜨개질이며 바느질은 내가 제일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하고 싶어졌다. 이제 바느질은 내가 제일 즐기는 일상이 되었다. ‘돈 주고 사면 된다’ 생각했던 내가 딸 아이 결혼할 때는 장미무늬 퀼트 이불을 해주고 싶어 언제 시작하는 게 좋을까 궁리를 하곤 한다. 나는 안락하고 편안함을 주던 대형마트를 버리고 큰 장바구니를 들고 재래시장에 간다. 야채와 채소를 한 짐 사 날라 건강한 식탁을 차린다. 먹는 것이 나를 가꾼다 생각하니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미용가위 한 세트를 샀다. 그것으로 아이들의 앞머리를 잘라준다. 미용실에서 잡지책을 뒤적이던 내가 이젠 미용사가 되어 이리저리 가위를 놀린다. 아이들 앞머리는 점점 짧아지지만 나는 이것이 참 재미있다. 이것들이 나의 특별한 삶을 일구는 방법이다.
안식년 휴가가 끝나면 하고 싶은 특별한 일들도 구상 중이다. 나는 여자들이 행복한 삶의 주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돕고 싶다. 30대 중반을 넘기니 직장 경력은 어느덧 10년을 넘어서고 중간관리자의 자리를 꿰차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정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이들은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엄마의 손이 점점 더 필요해진다. 상사는 회사 일에 올인하길 바라고 아이들은 엄마 손을 기다리는데 그 균형이란 것을 찾기가 참으로 얄궂다. 체력은 급강하하는데 해야 할 일은 점점 많아지고 일상의 기쁨과 슬픔이 메말라 마음은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리려 한다. 직장동료 이외에는 친구들과도 소원해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여력도 없다. 불같이 연애해 결혼한 남편과도 마음의 불꽃은 사그라진 지 오래이고 갑자기 성큼 자라 어색한 남매처럼 산다. 남편 혼자 벌어서는 먹고 살기 빠듯하고 벌 수 있을 때 벌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위안하지만 김빠진 콜라처럼 일상은 시금털털하기만 하다. 새로운 일, 새로운 직장을 찾자니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는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 동안 해온 일이 그것이 아닐까 까마득한 마음이 든다.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은 여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특별 프로젝트 ‘The 나비’는 이런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과 취향, 능력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참여 여성은 각종 검사와 더불어 워크샵에 참여해 자신과의 파워인터뷰 하고 나만의 길을 모색한다. The 나비는 건강/관계/경제/육아 등 특정 테마에 대한 알짜 정보를 제공하고 탄탄한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세계를 찾은 사람은 헤드헌팅 서비스를 통해 관련된 직장을 알선해 주거나 1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또한 자신의 꿈을 찾아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 있도록 멘토를 연결해 진행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기운을 북돋아준다. 또한 직장 생활 10년 이상의 특정 경력이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쉬고 있는 여성들이 한시적으로 모여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알선해준다. All or Nothing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었으면. 그것이 나의 특별 프로젝트의 바람이다. 여성들이 지루한 애벌레의 시간을 보내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각자의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갔으면. 그것이 나의 특별 프로젝트의 이미지다.
나는 나의 특별 프로젝트를 위해 나의 첫 책을 구상 중이다. 내가 마흔 고개를 앞두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도움이 필요했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넘었는지에 대해서 쓰고 싶다. 또한 안식년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아주 발랄한 문체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름하여 한국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주인공 리즈 길버트는 남편과 이혼하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1년을 보내며 자신에게 꼭 맞는 인생을 찾아간다. 하지만 아이가 둘이나 딸린 한국에 사는 아줌마들에게 그런 인생은 멀게만 느껴진다. 나를 찾기 위해 꼭 남편과 헤어질 필요는 없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면서 나를 찾으면 될 것이 아닌가?) 벌써 나의 일상에는 기막히게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보험설계사 모집 세미나에 끌려 갔다 왔고 전 직장 동료 둘과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처럼 이태원 클럽도 다녀왔다. 내 인생에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까?
특별한 삶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알려면 내 안에 있는 씨앗을 물에 불리고 싹을 틔우고 뿌리와 줄기를 만들어가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꽃이 진 후에야 내가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것이 특별한 삶을 일구는 과정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특별한 삶을 꾸리면서 특별해지고 싶다. 아니 나는 이미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 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다. 삶 자체가 특별한 거니까. 나는 이미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