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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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놀이(깊은 인생, 책출간용) . 윤인희
주제: 깊은 인생, 나는 준비된 사람인가?
“나는 왜 신나고 흐뭇한 삶을 갈구하는가?” 나에게는 삶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다. ‘인생을 깊고 멀리 보면서 참지혜를 얻는 것’이다. 나이가 경쟁력이 되게 하는 것, 나이 들수록 더욱 신나고 흐뭇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힘들고 어려워도, 지금보다 나중에 더 큰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긴다.
3년 전, 병원에서 환자 간병을 한 적이 있다. 평범한 생활에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뭔가 특별한 삶을 원했다. 나름대로 ‘깊은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간병사 일 자체가 환자 곁에 붙어서 24시간 동안 동고동락을 하며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병상에 누워 고통과 좌절 속에 신음하고 있는 환자분들에게 ‘희망의 바이러스가 되고 싶었다. 그분들의 마음까지 섬세하게 이해하고 진정으로 어루만져 드리면서 ‘희망의 빛'이 되고 싶었다. 그들의 삶을, 병상에 눕기 이전보다 더 성공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자를 선택할 때도 간병협회에 특별 주문했다. 매우 힘들고 까다로운 환자분, 간병사들이 가장 꺼리는 환자분을 소개해 달라 한 것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 낸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그런 분을 위해 밤낮없이 치열하게 일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자간병사분들에게 찾아가 공헌을 했다. 나는 힘들어도 남들이 어려워하고 곤란해 하는 듯하면, 그것을 긍휼하게 여기는 성격이다 보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부분을 해결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그 일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흐뭇한 순간들이었다.
‘상처를 힘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자주적 힘이고, 사람의 품에 큰 숲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상처’ 란 말이 있다. 나도 한 동안 약간의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그 상처가 나를 많이 성숙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아마 간병일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참지혜를 얻어 가는 것 같다. 뭐를 하든지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을 자청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서 도전한다. 가장 힘든 환자분을 맡게 되면 협회장과 사무장 등 임원들은 물론, 그 분야에 오래도록 근무했던 노련한 선배들에게 관심과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맡은 환자분은 간병사분들 몇 백명이 거부한 환자분이었기에 우리 협회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주한 또 다른 협회들, 혹은 입주하지 않은 협회의 간병사들에게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너무도 유별난 환자(그분께 죄송)였기 때문에 많은 간병사들과 환자가족 분들에게서도 위로와 칭찬을 받았다.
어느 한 날은 사무장이 직접 병실을 방문하여, 하룻 밤을 함께 지새웠다. 그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몇 해 동안 터득한 거의 대부분의 노하우를 뱉어 낼 정도로 내게 코치를 했다. 또 가장 노련한 간병사 분들이 그렇게 나와 그 환자에게 다가왔다. 때문에 남들은 몇 년을 해서도 못 배울 것을 몇 개월 만에 터득할 정도였다. 더불어 짧은 기간에 노련한 많은 분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성격상 가장 기초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연의 원리를 기반으로 터득하고자 하는 것, 매사에 옳고 바른 것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면서 해당 직업 관련 이론을 항상 배우고 익혔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래소 지금은 약 10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경쟁력과 자신감이 강화되어 가는 것을 실감한다. 자연스럽게 가장 난제를 해결하는 요령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참지혜를 얻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어느 조직에든지 가장 잘하는 분에게서 본 받는 것이다. 그 분을 쫒아 다니면서, 섬기고 배운다. 예전에 삼성생명에서 영업할 때 그랬다. 어느 Life Consultant는, 고객을 ‘이리오시오, 저리오시오.’ 라 할 정도로, 자신의 스케줄에 맞추면서도 늘 영업왕이 된다. 그런데 그 분에게도 단점이라면 단점인, 약간의 거만함이 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고, 많은 분들은 그 때문에 그의 장점을 본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좀 달랐다. 그 분의 장점을 높이 사면서 그 장점을 내 것으로 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의 아버님이 돌아 가셨고, 업무를 끝낸 나는, 서울에서 차를 끌고 장례식장이 있는 경상도 김천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새벽 1시경이었다. 그곳에서 나름의 봉사를 했고, 조문객이 뜸한 시간에 그 분과 어머니, 그 분의 외삼촌, 그리고 내가 한 테이블에 앉았고, 거의 밤새우다시피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참으로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어느 한 날은 별도로 그 분의 스케쥴에 맞춰 약속을 잡았다. 내 차를 끌로 다니면서 운전비서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그 분이 하는 일거수일투족의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 보면서 배우고 익혔다.
이렇듯 내가 본 받고 싶은 분을 만나면 늘 비서 역할을 하는 등으로 그 분에게도 도움 되고, 나도 그 분의 노하우 익히기를 즐겼다. 황농문교수님의 ‘몰입’에 대한 강의를 듣고도 그랬고, 성공사관 학교장님의 강연 후에도 그랬다. 또한 TV에서 방영한 중요한 프로그램을 보면서는 관련된 분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 존경을 표하면서 더깊은
노하우를 얻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는 더 진득하게 했다. 대인관계 면에서 장점이 많은 형님과 의형제를 맺어 한 동안 친하게 지니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웠다. 특히 그 분 지인의 장례식장에는, 내 차에 모시며 가서 접대하는 것을 지켜본 후 새벽3~4시경에 귀가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덕분에 사교성이 많이 부족했던 내가, 사교성에 상당한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나를 낮추면서 배우고 익히는 것, 어떠한 조언이나 힐책도 마다하지 않고 겸허히 수용하는 것 등이 나에게 참지혜를 쌓는 것이다.
나는 왜 나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쁨을 더 중요시 할까? 생각해 봤다. 아마 ‘아니타 로딕’의 삶처럼, 영혼이 살아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를 생각해 봐도, 좀 특이한 체질과 성격을 가진 듯하다.
내 개인은 힘들어도 주위의 많은 분들이 흐뭇해 하면, 그 힘든 것이 결코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내 안의 기운을 솟구치게 하고, 더욱 신명나게 했다.
한 때는 병실 전체를 혼자 담당하는 공동간병을 하기도 했다. 8분의 어르신께서 입원해 생활하시는 병실에서, 그 분들의 대소변을 치우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았지만, 콧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늘 그렇듯이 무엇을 하면, 그것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성격 때문이다. 몸 전체의 관절이나 근육을 단련한다고 생각하며 즐기니, 나에게 있어 어려움이란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약이 되는 것이다.
‘깊은 인생’ 책 내용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188쪽). 자신을 스스로의 별로 만든 ‘아니타 로딕’의 이야기다.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위대해 질 수 없다. 모든 위대함은 나로 시작해서 나를 넘어선 우주에 다가가는 것에 있다. 위대하다는 것은 세속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넘어서는 더 커다란 것에 대한 그리움과 지향성을 갖지 못하면 우리의 정신은 고양될 수 없다. 평범함이 깨져야 위대함이 발아한다.
‘나를 넘어서는 더 커다란 것에 대한 그리움과 지향성’이, 나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타인의 기쁨과 흐뭇함을 통해, 내가 보람과 희열을 얻었던 것이다. 나 혼자 기쁘고 주변 분들이 기쁘지 않으면 진정한 기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나보다 주변을 많이 의식하는 성격 탓일 것이다. 진정한 기쁨이란 내 주위분들이 함께 기뻐하고 흐뭇해 할 때 일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의 기쁨보다 남들의 기쁨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는 것이다. 힘든 환경이 오히려 자신 안의 긍정의 에너지를 더욱 분출되도록 하고, 그 조직 전체가 신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발전되며, 결국 그 조직의 생산성이 더욱 극대화 되는 것이다.
나도 책 속에 있는 그들처럼, 특별한 순간은 없었는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의미있는 사건이 있었다. 강원도 모 부대에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참모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을 때이다.
부대 내에는 나보다 하급자인 준위들도 몇 분 있었는데, 그분들은 병과 특성상 우리 장교들보다 더욱 파워를 발휘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부대 내에서 회식을 하게 되었고, 그 분위기가 나에게 특별난 각성을 주었다. 나는 그 분들보다 접대의 우선순위가 밀려, 낮게 취급당하였고, 얕잡아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그 이전에 이런 저런 복합적인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모멸감이 치솟았다. 어느 순간, 나의 손은 어깨 위에 달려 있던 계급장으로 올라 갔고, 슬그머니 그것을 떼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당시에는 대위 진급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긍심이 강했기에 그런 광경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그렇게 한 듯하다. 물론 지금은 거의 대분의 것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내심으로 삭히고 긍정적 진취적 자극으로 삼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러한 자존심이 나를 더욱 성장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의지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내 스스로 더욱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예전에 MBC-TV에서 방영했던 ‘성공시대’, 성공학 강연 등 자기계발 프로그램들을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최근에는 ‘단군의 후예’라고,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작년 9월 5일부터 시작한 이래 하루도 지각하지 않고 의지를 굳게 하고 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5시 30분에 출석체크한다. 나의 개인적인 목표는 500일이다. 아마 1000일까지는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기상하는 습관은 예전에 환자간병을 하면서 어느정도 마스터했다. 원래 잠이 많았던 터라 예전부터 정복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기상후 새벽 활동을 습관화하여 나의 천복을 천직으로 발전하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2000년부터는 여러 모임이나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솔선수범하며 ‘서번트 리더십을 익혔다. 조직과 구성원들을 이해하고 인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총무를 자원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부설 부자특성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부자스쿨‘을 몇 개월 수강한 적이 있다. 부자들의 마인드와 그들의 노하우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다. 그곳에서 총무를 자원했고, 분위기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나 자신보다 모두가 잘 되도록 공헌한 것이다. 그 때 강의실 분위기는 참 흐뭇했고 즐거웠다.
종친회에서도 근 10년 동안 참여하였다. 젊은 나이에 무슨 종친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친께서 평생을 양자종손이라는 멍에를 안고 가문의 몇 분에게 많은 수모를 당하셨다. 또한 그 몇 분의 어르신이 종토를 이리저리 빼돌리기도 했다. 효자라면 효자고, 불의를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
니 자연스레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부친의 명예회복과 종토의 원상복귀라는 사명을 위한 나의 운명이었다. 총무를 약 5년간 맡으면서 위의 두 가지를 모두를 달성했다. 거의 7~80의 고령자 분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40대의 젊은이가 총무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혼나기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신임을 받았고, 낮은 자세로 섬겼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나의 행위들이 미래에 꼭 필요한 ‘서번트 리더십’을 체질화하는 긍정의 효과까지 본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면서 배우고 익혀, 성장하려는 자존감과 심층적인 연습들이, 어느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성장시켰다. 그러한 노력과 함께 ‘인사성과 진정어린 관심’이 더욱 나를 발전시켰다. 누구를 만나든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만나는 사람 관계 속에서 무관심하다. 뭔가 어색하게 생각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관계에서 인사를 안하면 오히려 뭔가 어색하고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니 몇 번 만나는 관계라면 거의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편이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이 없다. 상대방이 순수 건전하고 긍정적이라면 금방이라도 친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수많은 강연이나 컨퍼런스 등에 참여하여 폭넓은 지식을 섭렵했다. 특히 미래는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미래포럼, 인재양성 HRD포럼 등에 즐겨 다녔다. 강연이나 포럼 등이 끝나면 그대로 있지 않았다. 관련 분께 다가가 대화를 나누웠고, 때로는 뒷풀이를 요청하기도 했다. 함께 참여한 분들 몇 명에게 동석하자고 하여 그들의 의견도 함께 흡수하며 객관적이며 균형잡힌 지식을 습득하려 했다.
군 전역 직후에는 나의 성격인 전방위적 사고를 깊게 하기 위해 애썼다. 발명가가 되고자, 거의 1년 정도 관련 강의를 듣고 책을 사서 읽었으며, 발명가를 찾아 다니며, 나의 유연함과 창의적인 성격을 키웠다. 또한 약 5년 동안 고3 학생들의 학습지도(280여명, 고교자습실)를 하면서 학습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했다. 뇌과학에 관심이 높아 여러 강의와 심포지엄 등을 즐겨 찾아 다녔고, 책을 읽었다.
이렇 듯, 환자간병을 하면서 EQ를, 여러 모임에서 솔선수범하면서는 NQ와 SQ를, 발명과 뇌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CQ를, 각종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면서는 AQ를 구축해 온 것이다. 입체적인 균형감각과 사리분별력을 키우며, 생각의 크기를 확장시켰다. 고군분투하면서 절차탁마했다. 나 스스로를 ‘톱으로 자른 듯하고 줄로 썬 듯하며 끌로 쫀 듯하고, 숫돌에 간 듯하게 단련했다. 온몸으로 각종체험을 하면서 옥돌을 다듬듯, 사골을 푹 고와 진국을 만들 듯 학문과 덕행에 힘써 왔던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책을 통해 머리도 지식을 습득한 것들과 비교되는 것이기에 가치가 남다르다.
오늘날 격변하는 새시대를 ‘꿀벌의 시대’라고 재정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영국의 영파운데이션 상임이사인 ‘제프 멀건’이다. 그는 “창의력과 아이디어로 나무사이를 날아다니며 어떻게 연결시키고 꽃을 피워낼 것인가를 고민한다.”라고 하면서, 이제 더 이상 한 가지 해법으로 명료하게 규명하고, 또 해결할 수 있는 사회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경계를 쉴 새 없이 넘나들며 소통하고 매개하고 촉진하는 ‘꿀벌’과 같은 중간자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무성히 우거진 나무와 숲속 생태계에서는 수많은 돌발변수와 복잡한 관계들이 얽히고 설켜 사회문제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꿀벌 같은 존재’로 유연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였고, 준비되었다. 사회각계 각층,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없이 모두를 아우를 정도도 갖췄기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도요타 자동차의 철학처럼, 1분의 시간도, 1원의 비용도 아끼며 더욱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도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개인 혼자서만 너무 심하게 하면 그 주위 분들이 힘들어 할 수 있다. 때문에 그 분위기에 나를 맞추는 요령까지도 터득했다. 성공의 제1요소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사회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PQ를 조절하는 능력까지 터득한 것이다. 강하면서 유연하고 유연하면서도 강하게 만들어 왔다.
누구든 마음과 마인드만 맞으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나의 것에 맞추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와 그분보다 더 나은 방법이 늘 있기 때문에 더욱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넓고 깊게 그리고 멀리 보고, 나 자신을 낮추며 발전시킨 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감을 더욱 높아진 것이다.
20년 전, 결혼식을 할 때는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서 거행하고자 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고, 내가 존경하던 황필호 철학교수님을 주례선생님으로 모시며 식을 올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기념관측으로부터 그런 관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고, 결국 무산되어 평범한 예식장에서 식을 치뤘다. 이렇듯 나의 마음과 마인드는 젊었을때부터 평범하지 않았던 것 같다.
2009년 말에는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에 들어가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관련 특보(당시 김덕룡, 그 때는 못 만났지만, 추후 그 분이 강연하는 곳에 찾아가 결국 만나 대화를 나눴다.)를 만나러 청와대에 방문하였으나, 응해 주지 않아서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그 때의 답변(문자메시지, 2009.8.5일: 대통령님과의 면담은 곤란하오나 하고 싶은 내용을 우편으로 보내주시면...)을 휴대폰에서 삭제하지 않고 수시로 의지를 확인하며 가다듬고 있다.
지금의 꿈은 그 사회통합위원회에 들어 가든지, 민간기업의 유사부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만의 준비된 강점인, 통합경쟁력 촉진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과 역량을 진정으로 아우르고 통합하여 선의의 경쟁력을 키워 나갈 것이다. 낮은 자세로 섬기면서 나보다 모두가 서로 잘 되도록 공헌할 것이다. 물론 구성원 중에는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진정으로 다가서려는 마음과 마인드를 갖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큰 문제가 안된다. 함께 할 기회와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그곳에 맞는 나의 역할을 찾아낼 것이고, 현재의 성과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창출해 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뭐를 하든 동고동락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하지만, 거의 그런 경우는 없을 것이고, 그 차선책으로 회의나 세미나 등에 참관하면서 섬세하고 전방위적으로 관찰하며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 퍼실리테이터 역할 등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특별한 능력이 내게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포부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에, 개인 혼자의 노력으로는 역부족임을 실토한다. 그래서 나의 재능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지금 내게 남은 가장 소중한 과제의 하나이다. 내 개인을 넘어서는 것은 거의 끝났기에,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지막 넘어섬을 위해, 스승님을 만나는 것, 이것이 이제 나에게 남은 마지막 소명인 것이다.

중책 직책 맡은 사람을 만나거나, 가장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나는 어느 모임이나 조직에 가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 즉 총무나 간사 유사 등을 만난다.
그들의 노고를 잘 알기에 그들에게 뭔가 도움드릴 만한 것이 없나 살피고, 소소한 것에서 부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우고 익힐 것을 찾는다.
또한 회장이나 부회장 등이나, 가장 어려움 속에 있는 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그 조직이나 모임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짧은 시간에 많이 배우게 된다.
이것은 나만의 방법이다. 다름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늘 그것이 궁금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시간과 나이가 경쟁력이 되게 하자' 라는 나의 모토가 개인의 단순한 경쟁력이 아니라
개인 인격의 경쟁력이고, 그 조직 격의 경쟁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엔이 설정한 인간개발지수(HDI) 즉, 소득은 물론, 건강 교육을 포함해 젠더평등 생물의 다양성 등을 평가척도로 삼는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한 생산과 소득만 가지고 얘기하는 경제발전 개념보다 유용한 것이다.
군사력 등 하드파워 뿐만 아니라, 문화와 인권이라는 소프트파워도 함께 높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혹은 조직이 될 수도)가 지닌 강점과 약점 등 세부항목에 주목해 정책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미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는 신문 매일경제, '매경의 창'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근 10년간 해온 것이 나 개인의 강약을 분석하면서 소프트파워도 함께 높여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깨달은 진정한 경쟁력이 바로 그런 경쟁력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