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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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3월. 꿈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공간을 상상했다. 그때의 상상을 조심스레 옮겨 본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성공 박물관을 오픈 했다. 변화와 혁신 그리고 성공에 대해 틈틈이 모아온 자료와 생각들이 바탕이 되어, 직접 체험하며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서양의 성공과 동양적 성공 접근의 다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 이곳은 청소년들의 상상력 발전소이다. 이 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탐색에 몰두해 있다. 상상의 에너지를 최고조로 만들기 위해 박물관은 강원도(충청도)의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다. 워크숍, 컨퍼런스 등 모임이 활발히 열리는 왁자지껄한 나눔의 공간, 생명의 공간이었다. 나는 1년에 2번은 해외에 나갔다. 각국의 희귀 박물관 탐방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이들 콘텐트는 새로운 이야기로 버무려지고 구성되어 청소년들의 삶을 더 알차고 활기 있게 만드는 거름으로 쓰여졌다. 어떤 사람의 현재는 누군가의 미래다. 나는 그 미래를 현재로 가져다 주는 전령사였다.”
[남해의 '해오름 예술촌' 모습. 2006년 8월]
지금 생각해보니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머쓱하다. 창피스럽기도 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자유로운 상상이었다. 넓은 마당이 있고, 전망이 확 트인 그 곳을 생각할 때마다 현실적으로 기웃거린 곳이 바로 ‘폐교’다. 영월에서 폐교를 이용한 박물관을 많이 보았다. 곤충 박물관, 책 박물관, 지리 박물관 그리고 남해의 해오름 예술촌 … 꿈이 현실이 된 곳을 보았으나 나의 꿈은 아직 멀리 있었다. 이 꿈을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이룰지 아직은 잘 모른다. 가슴 한 곳에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조금씩 조금씩 곁가지를 쳐나가며 다듬는다.
# 지난 해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는 H사장님을 만났다.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이 벌써 10여 년을 넘고 있다. 그는 책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고객을 사랑한다. 시인의 마음을 가진 넉넉한 사람이다. 점심 식사를 하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먹고 사는 문제에까지 이르렀다. 나의 고민이었다. 슬쩍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 했다. 군산이면 회가 유명하니 횟집을 하라신다. 뜬금없이 왠 횟집이냐는 눈빛을 비추니, 횟집도 다른 횟집을 하라 말씀하신다. ‘숭어 회 한 접시’를 팔라 하신다. 숭어 회 한접시라 …
“눈이 오면, 애인 없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 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이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 있을 거라”
(후략)
안도현 시인의 ‘숭어회 한 접시’를 인용하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숭어회 한 접시’라는 선술집. 그저 술만 팔 것이 아니고, 시 속에 담긴 군산의 이미지를 품고, 문학을 담으라 했다. 소설과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새로운 관광자원이자 문화가 될 수 있을 거라 했다. 귀가 번쩍 띄였다. 그렇구나. 또 ‘바닷가 우체국’ 같은 펜션은 어떠하냐고 하신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중략)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후략)
# 하루를 조용히 보내며 자기에게 편지를 쓰고, 사랑하는 연인,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그런 곳이면 멀리서도 찾지 않겠나. 그러면서 사무실 책상에 놓인 안도현 시인의 ‘바닷가 우체국’ 시집을 내민다. 지금 생각하니 ‘숭어회 한 접시’ 같은, ‘바닷가 우체국’ 같은 카페도 좋아 보인다. 충분하다. 카페를 시인의 마음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마음을 끌어당기는 시인의 섬세함을 만날 수 있고, 스스로의 애절함을 찾을 수 있고, 편안한 휴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한 편의 시가 경영이 되고, 혁신이 되어, 사람을 모여들게 하는 마케팅이 될 수 있다는 발칙한 상상을 갖게 되었다.
카페는 사람과 공간이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커피가 될 수도 있고, 문학이 될 수도 있고, 음악, 영화, 공예, 책,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자기가 매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며 만드는 공간. 그 곳에는 늘 사람이 있다. 내가 매일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박물관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나는 숭어회 한 접시를 뜰 재간도,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내릴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