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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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6일 02시 02분 등록

카페는 추억이다! - 생의 공식적인 첫 미팅에서 만난 H 이야기


내가 체험하는 생활 속의 카페?

2010.05.22. 토요일 오후! 지하철을 타고 외출을 나가다가(동두천?에 갈 의향이었음^^) 애시의 발길을 돌려, 돌연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경복궁역 쪽으로 향해 본다. 언제 보아도 마음에 꼭 드는 동네가 있다. 청와대 주변이 그렇다. 다른 여러 지역이 있기도 하지만, 특히 그 곳이 마음에 드는 데에는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곳이기 때문이어서 일까?


"시골에 사시네요."

한적하고 깨끗한 그 거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약 30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마 고등학교 때 인 것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시절에 걸스카우트 단원 활동을 하였는데, 지금처럼 그 본부가 이 지역 근처인 안국동에 있었다.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 여러 기능장을 취득하게 되는데, 그러한 관계로 인해 나 같은 서울 촌뜨기(?)가 그 지역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던 까닭이다.

또한 사춘기라 할 그 시절 호기심어린 눈으로 경복궁 주변의 특별한 분위기와 그곳만의 문화를 기웃거린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집은 신대방동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늘 서울특별시 00구 **동 하며 집주소를 사용해 왔기에,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곧이 곧 대로 내가 교양을 갖춘 서울특별시의 보통수준에 해당하는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확 깨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그는 내가 엄밀히 말하면 서울이 아닌 그러니까 서울의 외곽에 위치한, 즉 변두리에 산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시켜 주었다.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내가 서울에 사는 것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지?" 속으로 나는 몹시 의아했지만 의외로 수줍음이 많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집 근에서 근거리인 안양유원지가 경기도에 속하니 그럴 법도 한 것이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서울 시민이라는 나의 자부심을 무참히 일축시켜버린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하게 대꾸할만한 꺼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긍할 수밖에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수려한 자태와 부티나 보이는 여유 앞에서 전에 없이 주눅이 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좌우당간 그렇게 분명한 어조로 서슴없이 말하는 남학생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내 생에 최초의 공식적인 첫 미팅 대상자 H다. 집이 어디냐고 묻길레 대답을 하였더니만, 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뜸 날더러 "시골에 사는 군요." 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 서울의 반경이란 4대 문 안쪽을 칭하는 것이라고 반듯하게 설명까지 곁들이면서, 진정한 서울이 아닌 곳에 살고 있는 것이란 걸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당시 시행되고 있던 우리나라 경제정책, 제4차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하나로 한참 강남 개발이 이루어져 급격한 지각변동이 일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곳의 4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 지역에 남아있는 것이 대단한 자부심이었을지 모른다. 그도 한 때에는 우리 집 근처인 대방동 어딘가에 살다가 그곳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란다. 당시에는 아마도 그곳과 우리 집의 동네가 대지 가격 상으로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이었을 터다. 다만 차이가 난다면 지역의 특성상 문화적 수준과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수준 정도가 달랐을 것이다.
 
4대문 안 가운데서도 H네가 산다는 곳은 동네 자체가 청와대를 끼고 둘러싸인 곳인데다가, 부근의 교동, 무교동 등엔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굴지의 기업체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명동 등의 대형백화점과 소공동 주변의 매머드급 호텔을 근거리에 두고 있는 곳이어서, 주변의 성북동이나 필동 등의 지역과 더불어 그 위치적 위세가 당당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TV연속극에도 이들 지역이 자주 등장하였는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부와 명성을 고루 갖춘 세도가들이 사는 지역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러한 시사성을 접하며 자란 나도 그래서 그런지 은연중 이 지역을 사모하곤 하였다. 그러한 특성을 지닌 곳이니 만큼 일반적인 잣대의 주택이나 토지 가격의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그 지역 특유의 고유한 문화성과 독특한 가치 및 의미로 인해, 절대 타 지역을 부러워하지 않을 자존심을 지닌 곳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곳이라고 해도 시장의 경제 원리와 신물결의 흐름이 시사하는 바의 속성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무시하지 못할 아성이 있는 강북의 중심지역이라고 해도 새롭게 급부상하는 강남 지역의 거센 소용돌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강남지역은 지속성장의 가도를 달리며 화려하게 떠올랐지만,  강북지역은 횡보 내지는 답보 상태로 상대적인 퇴보로 점철되듯 점차 존재의 명성을 잠재워 갔다. 급변화하는 사회 경제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들 지역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의 차이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후로 15년 가량이 지나서 IMF 때에 우연한 계기로 그곳의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탐방해 본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시절이나 대학 초년 시절의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의식도 바뀌어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괜찮은 곳이기는 하지만, 그저 여전히 탈바꿈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곳으로 낙인되어 있었다. 별로 경제적 가치의 매리트나 실용성이 부각되지 않는 지역의 하나로 남아있을 뿐인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대중이 편하게 접근 할 수 있는 지역이 좋은 곳이라는 인식을 가지며 역세권 혹은 편리성을 쫓아 다른 지역으로 향했다. 향후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일반의 선호지역으로 눈길을 돌리며 그러한 곳들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말인데,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그곳 주변과 우리 동네의 토지 가격 차이 자체는 크게 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놀랍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생각을 하였던 경험이 내게 있다.  이유인 즉 청와대와 너무 가까워 보안상을 이유로 개발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교통수단인 전철 등이 동네 안쪽이나 인근 지역으로 확대 또는 연결되지 않아, 퍽이나 살기 좋은 나름의 환경과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소위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곳으로 치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시 그러한 점들이 인정되어 가히 놀랄만한 수준으로 급등하는 추세다. 다른 곳들이 다 오르고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화된 것에 반해, 이곳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있는 점이 다시 부각되어,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을 살림살이를 하는 주거전용의 주택지역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용도의 활용성을 목적하며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타 지역의 토지 시세에 비하면 너무 오래 기다린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충분한 각광을 받고 있다. 다시 예전의 명성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지역이 아닌가. H의 주장대로 라면 역시 구관이 명관이요 나는 여전히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 고작 뛰어야 벼룩인 서민적 수준의 지역에 머물러 있음 에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강남일까, 강북일까?

H와 내가 처음 만나 우리 집의 지역을 두고 시골 운운하며 실강이를 벌이던 그 무렵이 바로 강남의 테헤란로가 확장되고 반포 등의 지역 일대에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잇는 좁합고속버스터미널 청사 등이 들어섰을 때였다. 그러니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H와 같은 사람들로서는 신경이 곤두선 듯 의당 그렇게 주장할 만 했다. 강남의 신개발로 인해 '구관이 명관' 이라는 속담을 단숨에 일축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를 전후한 기점으로 우리 나라 부동산의 가치 개념과 주택의 소유 목적이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집을 소유하는 목적과 가치가 생활을 하기 위함의 목적 이외에 투기적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하여 부동산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강남의 신시가지 지역은 자고나면 돈이 쑥쑥 올라가는 기현상을 초래했고, 그로인해 인플레이션 등 물가급등 현상으로 이어지며, 서민들의 생활상을 심각히 불안정하게 이끄는 등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급작스럽게 대거 졸부들이 등장하여 득세를 하는 과정에서 금전만능의 사회 풍토가 조성되는 등 매우 혼란스로운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러한 사태에 직면해 있었으니, 의식이 있는 지식인층에서나 남다른 의욕과 비전을 추구하며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사회현상이 매우 민감한 사안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지역적 특성이란 단지 지역을 구획짓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역의 상황과 특성에 대한 주장과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성과 사회 문화 현상에 대한 인식 정도 및 참여 수준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라는 지역사회나 가정들은 H가 사는 동네와는 달랐다. 대부분이 빠듯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인지, 이들에게는 먼 앞날에 대한 설계가 그리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사항이 아닌 것이다. 우리 가정은 늘 오빠들을 가르치는 일만으로도 버거워 하셨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턱이 없고, 따라서 설령 어디에 무엇이 개발 된다고 하더라도 감히 따라나설 주제가 못되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일상이 그려지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예 우리 부모님에게로부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사실상의 서울이 아니라, 그저 변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는 상황적 설명이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견해를 접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태평하게 지내며 개념조차 없이 자랐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대전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아버지의 덕택으로 근무지를 따라 대망의 서울이라는 곳으로 올라와 생활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양 하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소위 4대문 안 지역에 사는 이들의 생각과 생활상은 좀 달랐던가 보다. 지역의 특성상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아무래도 좀 다를 수밖에는 없었던 듯싶다. 게다가 H는 근방의 교회에 다니며 종교 생활 외에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귀동냥을 하거나, 여러 시사성 있는 사안들에 대하여 알게 모르게 관심과 참여도 의당 달랐으리라. 무엇으로 인해 그런 관점과 주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역사회가 그로 하여금 은연중 그러한 태도를 심어준 것이었을까? 나와 같은 동년배가 어떻게 그런 점에 관심을 두고 인지하며 사는지가 퍽이나 신기하고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그가 말을 하면서도 거만하게 구는 모습은 아니었기에 서운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밥맛이었을 텐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직시할 수 있도록 알려주려는 태도였기에 나는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나와 우리 집의 형편과 생활상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여태 H를 좋은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 서울 촌뜨기라는 말이 절로 수긍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래서 그랬는지 청년시절부터는 언젠가 나도 강남 지역에 살 정도의 능력과 생활의 기반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고교생활의 특별활동이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이어져

H와는 우연히 만났다. 그러니까 그때에 막 대학입시 연합고사를 치르고 난 직후, 비교적 한가로을 때였다. 예비대학생들을 위한 사전 교육의 일환으로 걸스카우트 회관에서 행사가 하나 주관되었는데,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한 전혀 뜻밖의 남학생들과 합동으로 하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서였다. 어려서부터 뭇 오빠들 틈에 자라서 그런지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이성에 대해 그다지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각 학교에서 대표자 한 명씩이 참석하는 형태로 선발이 되어 추천을 받아 나갔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교내 걸스카우트 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되어 첫 미팅의 행운을 얻게 되었던 듯싶다. 누구 소개로 왜 가게 되었는지가 지금은 정확히 잘 기억에 나지는 않는데, 선배가 알려주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당시에 나는 윗대의 제법 오래된 선배들과 매우 각별히 지냈다. 유선 언니와 정길 언니는 교내 생활 중에 만난 것이 아니라, 고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우리들과 유대를 해나가는 대선배라 할만 했다. 한참 선배지만 졸업이후에도 매우 성실히 걸스카우트의 아름다운 소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과 대학생활 동안에도 걸스카우트 정신을 전파하는 식의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농활 따위를 하듯 우리는 걸스카우트 활동과 정신을 서울 위성 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스카우트활동에서 소외된 지역사회에 매우 성실히 전파해 나갔다. 대상 지역은 남양주 마석의 수동면 내방리 물골 안 이라는 마을이었고, 마장동까지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며 자비로 활동하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성의를 가지고 임하였던 것이다. 용돈의 상당 부분을 그곳에 투입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 대를 잇는 애경 언니가 내가 고1 때에 고3 이었고, 소희 언니가 바로 위 기수 선배였다. 우리들의 규율은 나름 매우 엄격하고 돈독했다. 유선 언니와 정길 언니에게는 일체 반말로는 대화하지 못하는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언니들은 내게 무척 잘해주었다. 한동안 제각각 살기에 바빠 연락이 끊기기도 했었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일방적인 내 사정에 의해 제법 긴 세월을 뜸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요즘에도 가끔 연락을 취하며 지내는 의리 좋은 사이인걸 보면 그때의 추억이 한몫을 단단히 하기 때문이리라.



대학생활보다 더 기억에 남는 하루 동안의 낭만적 예비 대학생활 체험

그때 나는 같은 단원인 지연이보다 선화와 함께 행사에 참여했다. 왜 그랬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혼자 가기가 쑥스러워 단짝의 내 친구를 꼬드겨 함께 나갔던 것일 게다. 방송국에서 그 행사에 취재도 나왔었는데, 당시에도 유명했고 직후에 TV방송에서 더 대단하게 인기몰이를 했던, 개그맨 강석과 배추머리 김병조씨가 탐방을 나와 녹화를 했다. 그곳에 모인 꽤 많은 학생들과 종일 함께하며 취재한 후, 편집되어 방송된 인터뷰에는 신기하게도 내 이야기만 주로 전파를 탔다.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은 나를 우쭐한 기분이 들도록 추켜세워 주었다. 그로써 나는 재학 중에 생의 두 번째 라디오 방송을 타는 흔치 않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초등학교 때에 KBS 라디오 어린이프로그램에 합창반의 일원으로 참여해 인터뷰에 응한 것이었고, 그 후 두 번째가 된 셈이다. 아마 MBC라디오 지역문화탐방인가 하는 프로에 가요와 함께 우리들과의 현장취재 내용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그때 여러 학교의 대표로 모여, 처음으로 시도하는 예비대학생을 위한 다양한 모색들을 간접 체험하고 나누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학생활 시범을 위한 초청 오리엔테이션 정도에 해당할 것인데 소수로 구성하여 진행하다 보니 내용이 꾀나 알찼다. 두발 자유화 첫 세대인 우리들에게 처음 시도된 열린 대학생활의 사전 문화활동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걸스카우트 출신으로서 싱어 송 라이터로 활약하던 여가수 아무개(누구더라 ?)씨도 시종일관 우리들에게 분위기를 맞추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이끌었다. 적성검사와 심리검사도 거치고 외국의 민속무용인 흥겨운 포크댄스도 배웠다. 바로 직전까지는 금기로만 여겼던 미팅을 남녀학생이 마주하여 공식적으로 즐기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고, 그들과 손을 잡고 부르스며 탱고와 지르박을 익히는 것도 이채로웠다. 점심 식사를 할 때에도 매너 있게 대화를 나누거나 교양과 예절을 익혔다. 경양식 및 뷔페 음식을 먹는 과정과 절차도 배우는 등 꽤나 구체적이고 섬세하며 기품있게 기획되었다. 전체시간이 다 유용하게 어우러져 종일에 걸쳐 매우 유익하고 다양하게 여러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꽤나 알찬 경험이었다. 마치 상류사회층과 어울리는 경험을 한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폭소를 자아내며 기억에 나는 장면이 있는데, H의 친구 가운데 한 명인 G가 유독이 떨던 모습이다. 어찌나 덜덜 떨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자기소개를 하는가 하면, 포크댄스를 출 때에는 그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자동차가 붕붕대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릴 정도여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데 나중에 그는 가장 의젓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몇 명을 자기네 집으로까지 초대하는 등, 꽤나 담담하고 늠름한 태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서 놀라웠다. 여담이지만 그때 테헤란로 근처에 위치한 G의 집은 저택처럼 커다란 개와 잔디 정원이 있는 곳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동네의 아주머니들과는 다른 차림을 한, 마치 연속극에 등장하는 마담과 같은 차림과 세련됨이 흘러 깜짝 놀랐다. 의아해 하며 내가 생각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G의 어머니께서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던가 싶다.

H는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대학 입학 전, 공식적인(?) 나의 첫 미팅 상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기실은 미팅 상대자라고 할 것도 없다. 행사를 치르고 나오는데, H와 그의 단짝 친구 몇 명이 나와 내 친구 선화를 쭐레쭐레 따라나서며 차를 한 잔 마시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당시에도 제법 카페 지역으로 유명했던 경복궁 앞의 제법 그럴싸한 레스토랑에 익숙한 솜씨로 앞장서 가서, 칵테일을 주문하기에 난생처음으로 집이 아닌 밖에서 칵테일을 마셔본 기억이 난다. 그곳의 레스토랑은 근처의 출판클럽과 주변의 문화적인 곳들과 한 때 꽤나 오래 존재하다가 그 일대가 지각변동 되면서 언젠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국제적인 디자이너 앙드레김의 큰 매장도 그곳에 있었고, 한복연구가 이리자씨의 숍도 그곳에 이웃해 있었다. 그래서 오고 가며 그 길을 지나칠 때마다 차장 밖으로 첫 미팅을 한 그곳의 간판을 찾아 기억을 더듬고는 했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로 간판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의 장면들만은 오래도록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풍성하고 즐거운 낭만적 시간여행으로 이끈다. 그때의 성인식 파티에 해당하는 듯한 모임, 참으로 즐겁고 재미났다. 대학생활보다 훨씬 더 많이!



미팅은 주로 레스토랑에서, 희미한 불빛 아래 칵테일을 마시며

그때에는 대학생들에게 칵테일이 제법 인기였다. 요즘에 스타벅스 따위나 핸드 드립 카페를 이용하듯 그때에는 레스토랑에 가서 칵테일을 마시곤 하였다.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지금의 카페라는 곳보다는 레스토랑이라는 간판이 더 유행하였다. 일반인들은 카페라는 특정인들의 은밀한 취향일 것 같은 장소보다는 레스토랑이라는 분위기를 더 만만해하며 지금의 카페처럼 이용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에는 오히려 레스토랑이라는 간판보다는 카페라는 건물 간판이 훨씬 대세이지만 그때는 레스토랑이 단연 인기였다. 의미로나 역할측면에서 살펴볼 때, 요즘에는 이 둘의 뉘앙스와 분위기가 서로 상반된 느낌을 대중에게 선사하고 있는 듯도 하지만 그때엔 그랬다.

대학가의 이런 음식점을 겸한 음악다방들은 남학생들에게 대학생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신뢰성을 인정해 주고는 하였다. 비록 초면이라 할지라도 딸랑 학생증 하나만 있으면, 소위 외상술을 먹게 해주더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선가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사회적인 품격을 갖춘 인격체요, 양자 간 성숙한 지성을 인정하는 풍토였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요즘에는 서로 간 이런 풍경이 별로 연출되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씁쓸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쌍방의 매너가 좋아졌다고 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까칠해져서 부딪히지 않으려는 냉전 기류를 전제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앞으로 어떤 좋은 모습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거저 바라지도 앉는 양심 공동체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까? 관심과 애정을 갖되 무한한 신뢰성도 함께 동반할 수 있는 좋은 묘안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상대의 눈길에 빠져들려 하기보다는, 주체적 개성을 창조하는 공간 개념의 카페

그때엔 간판도 지금처럼 작고 앙증맞게 붙이기보다 눈에 잘 띠도록 최대한 크게 붙여 눈에 띠도록 하며 외관부터 제법 그럴싸하게 꾸미는 일에 상당부분을 치중하였다. 지금처럼 골목 안 카페 형식이나, 여럿이 어울려서 나누고 돕는 공간을 목적하기보다 대로변의 버젓한 건물 크기에 맞추어 건물을 부각시키는 것이 목적이기라도 하듯 넓은 공간에 큼직한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여 고급스런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인사동 거리는 항시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강북의 명장소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한옥의 건축물과 여러 골동품 가게들과 각종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즐비하다. 많은 예술인들이 저마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작업하는 공간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강남 지역이 급부상하면서 이들 공간도 점차 지역성을 따라 강남으로 하나 둘 옮겨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사동 주변은 한산해 지고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행사를 전후해 잠시 반짝 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또 잠잠해졌다. 그러다 영국여왕이 내한하여 방문을 하면서 인사동 거리의 조성 붐이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활기를 되찾아 가는 모습이다. 사실  강남∙북간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유산을 적극 살리고 세계적인 명소로 홍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곳들은 다방(房)에서  다실(室), 다원( )으로 간판의 이름이 변모해 가며 우리 민속 고유의 전통차를 주로 선보이는 가게들이 주로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국어순화운동으로 찻집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90년대 말 해외여행 자유화가 본격화되자 이곳에 다시 이국적 정취의 변화가 일어나며 카페 등의 간판으로 바뀌어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신촌 지역을 중심으로 이대와 연대, 서강대와 홍익대 등 주로 4개의 대학이 집결되던 이대와 신촌역 주변도 변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젊은층의 문화를 선도하던 이들 지역에도 점차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4개 대학을 주축으로 형성된 젊은층의 문화가 가장 왕성하고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했지만 강남발 변화의 물결은 이들 지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유행을 선도하던 신촌과 이대거리가 강남지역의 부상으로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촌과 이대 앞 상권은 서서히 가라앉고 테헤란로 주변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이나 겔러리아백화점 등 청담동과 강남역 주변으로 상권이 대거 이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종로서적이 위치해 있던 종각주변과 건너편의 인사동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이고 오래된 대중문화에 식상한 젊은 층들은 좀더 개성 있고 자유로운 모습의 새로움을 갈망했다.

이때 홍대거리는 지역의 여건과 특성상 이지적인 분위기를 띠며 모여드는 사람들과 이동경로를 흡수할 만한 장소로 변화할 수 있는 변경지대가 되었다. 전철 노선을 따라 지리적으로 흐름이 차단되지 않고, 홍대를 중심축으로 주변으로 완만히 퍼저나갈 수 있는 지형인 것이다. 새로운 지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다 강남으로 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흐름이 끊기지 않는 이러한 위치와 주변지역으로의 확장성이 필요했던 것이고, 전철 노선의 확대와 환승역의 역할도 한몫했다. 젊은 층이 모여들다보니 점차 이들 지역에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모색의 공간들이 늘어났다. 카페도 이러한 가운데에 생성된 모습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점차 유입되는 수요를 흡수하고 공급을 확장해 가며 서서히 명맥을 유지하여 나가게 되었다. 하나, 둘 작게 작게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곳의 카페 문화가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특징적인 문화를 지닌 독특한 상권으로 변모해 가게 되었고, 특히나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또 하나의 명물 장소가 되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특히 젊은 지식인들인 대학생들에게 외국의 문화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들 신세대들은 자유롭고 편한 세계 곳곳의 문화를 그들의 주변에 옮겨오고 응용해 나갔다. 그렇게 공간을 통한 지역문화를 창조해 나가게 된 곳이 바로 작금의 홍대주변의 거리 문화다. 이곳에는 일본식 까페와 유럽형 골목까페 등 다채로운 문화들이 공존하고 생성되는 자유로움과 도전이 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하여도 MBC문화방송의 별채가 있던 정동이나 덕수궁 돌담길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의 시청 앞, 반포와 영동 등은 레스토랑 일색이었다. 당시 영동시장 근처나 반포 주변은 비후가스, 함박스테이크, 정식 등을 주 메뉴로 하는 레스토랑이나 음악다방 천지였다. 또한 강남역 테헤란로 주변의 랜드 마크는 단연 뉴욕제과(6번 외한은행 출구쪽)와 더불어 바로 위층인 샹제리제 레스토랑이었다. 그시절 국기원도 건물을 랜드마크한 구역의 상징으로 유명했다.

대학생들과 청년층은 지금의 스타박스와 같이 주로 뉴욕제과를 이용하였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직장인들은 한층 위인 샹제리제 레스토랑을 이용하였다. 물론 이들 두 곳은 제법 주머니가 넉넉한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때에 우리는 주로 영동시장 부근에서 어울려 음악을 들으며 놀았다. 그 정도는 어울릴 만 했나보다. 뒷골목으로는 떡복기와 만두가게 들이 즐비했는데, 시장기를 때우기에는 아주 그만인데다가 맛도 좋아 인기가 '따봉'이었다. 그때에는 TV광고 등에 '따봉'이라는 말이 지금의 '짱'이라는 의미와 같이 자주 사용되었다.


라이브 음악카페의 무대, 명동에 이어 서울 근교의 백마나 미사리 등으로 퍼져

강남의 테헤란로 주변이 부상하기 전에는 강북을 지배하는 대중의 문화 선도 지역은 단연 명동과 소공동 일대였다. 이 정도는 웬만한 서민들도 즐겨 찾아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7080세대라 불리는 지금의 4~50대에게는 통기타 음악에 대한 향수가 깊어 요즘에도 남다르다. 명동에는 두 곳의 유명한 라이브 바가 있었다. 등장 가수들의 대부분이 통기타 가수요 유명한 방송인이기도 한 이종환씨가 운영하는 라이브 바 <쉘부르>와, 하이틴 영화배우 겸 가수였던 전영록씨가 운영하던 <영스타> 등은 그야말로 인기 최고였다. 이곳에 가면 TV나 라디오에 나오는 당대의 유명한 팝송가수나 통기타 가수들의 대부분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럿이 몰려가면 기본의 세트를 시켜 당시 새롭게 등장한 세트메뉴, 즉 마른안주와 함께 나오는 작은 병맥주를 마시거나, 칵테일을 주로 시켜놓고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이전에는 주로 400 미리리터의 병맥주만 생산되어 나오던 것이 반으로 줄어든 200 미리리터 병맥주가 등장하여서 가정에서는 주로 큰 병맥주를 사다 마시는데 반해, 경양식이나 라이브 바 등 에서는 주로 작은 병으로 제공하며 영업하였다. 큰 컵 한 잔 정도의 작은 병맥주가 나오면서 이것을 세 병 혹은 다섯 병으로 묶어 마른안주와 함께 제공하며, 얼마에 파는 식의 세트메뉴가 나와서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에는 세트메뉴만 주문하고서 생음악 감상을 할 수 있고는 하였는데, 그것이 각자가 칵테일을 마실 때보다 비용면에서 약간 절감되었다. 물론 추가해 마실 경우에는 다르지만 말이다. 우리는 대게 칵테일 한 잔 혹은 세트메뉴만으로 해결 하며, 술을 마실 목적이 아니라 기분 좋게 생음악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후에 이런 라이브 뮤직카페가 체인점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여태도 존재하는 모습이다. 그 외로는 백마 등 신촌역에서 문산행 기차를 타고 가면 교외에 나아가 이런 카페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후에 미사리 조정경기장이 완공되고부터는 미사리에 라이브 레스토랑&카페들이 대거 등장을 하는 붐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주로 승용차로 강변 등으로 드라이브를 즐기다 가게 되는 곳이어서 대학생이나 청년층 보다는 아베크족들이나 주로 중장년층을 타겟으로 하는 영업이 이루어지는 곳들 이었다. 따라서 맛에 비해 음식 가격도 비싸고 분위기도 대학가나 청년층들이 찾는 곳과는 달랐다. 백마 지역은 정부의 주택정책에 따라 수도권 5대 신도시에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의 일환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 지금의 일산 풍동지역 부근에 해당하는데,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도 골목을 끼고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는 라이브 카페나 음식점들로 즐비하다.

<별이 빛나는 밤에>로 유명한 별밤지기 이종환씨는 나의 중∙고교시절 사춘기 소녀들에게 가슴 설레게 하는 삼삼한 목소리로 라디오방송의 팝송 및 가요 디제이로 활약상이 대단하여 그야말로 인기짱이었고, 그에 의해서 키워지는 가수들의 대부와도 다름 없었으며,  초창기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의 심사위원을 맡는 등, 당대에 거의 막강 파워로 굴림하였다. 이종환씨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일명 <별밤> 프로그램은 청소년 시절 우리 또래들과 어울린 대표적 라디오방송프로그램 코너로, 그 시절의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는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방송이 시작되어 40여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며 꿋꿋이 건재하는 장수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특히 나의 중∙고교 및 대학시절과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그의 명성과 파워는 대단했으며, 나는 그의 목소리에 반해 그가 운영하는 음악 카페 <쉘부르>에 친구들과 자주 드나들며 직접 실물을 보면서 설레임을 달래곤 하였다. 이 라디오방송프로그램은 그 때의 아성을 말해 주듯 여러 명의 DJ로 이어지는 가운데, 지금까지도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 시절 재벌 그룹 삼성이 세운 경쟁사인 TBC 동양방송(후에 KBS2로 흡수 합병 됨)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방송이 진행되었는데,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라디오서울(RSB)로 시작하여 무려 45년 이상 장수하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으로서, 지금의 국영방송인 KBS에 흡수되기 전인 민영 상업방송시절부터 인기를 누려왔다. TBC 동양방송국은 1960~70년대의 민영방송사로 1980년 군부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정권의 언론통폐압 조치로 인해 국영방송국인 KBS에 강제 흡수되어 세간의 많은 논란이 되었다. 



 간단한 칵테일, 손수 만들어 집에서도 즐겨 보기도

대학생이 된 나는 언젠가 칵테일을 만드는 것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 언니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양평동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고 동창 정혜가 가르쳐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오빠들도 대학에 다녔고 복학을 하는 등 할 때였지만, 나와는 나이차이가 많고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집에서는 도통 밖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오빠들에게 그런 문화를 전수받지는 못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알음알음 대강의 어깨너머로 배우는 상식을 통해 약간의 칵테일을 제조할 줄 알았었다. 유행하던 여성지인 여성중앙이나 여성동화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다.  잡지에 등장하는 단골 세션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주 접하다보니 가능하고 쉬웠다. 가장 흔하게 할 수 있고 간단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요즘에는 클래식 칵테일이라고 불리며 오랜 전통과 명맥을 이어온 칵테일들인데, 진토닉과 스크루드라이버, 레모네이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걸스카우트 언니들과 대학생활 초기 친구들과 어울리며, 집에서도 몇 번 제조하여 즐겨본 경험이 있다. 만드는 방법도 그다지 어렵지 않아 누구나 간편하게 배워볼만 하였다.

레모네이드는 레몬즙에 설탕과 찬 얼음물을 이용해 만드는 매우 간단한 칵테일이다. 완성된 칵테일에 레몬 조작을 얇게 저며 예쁜 크리스털 잔에 살짝 걸치면 그야말로 근사하고 멋들어진 칵테일이 완성 되었다. 진토닉도 대단히 만들기 쉬운데, 드라이진에다 토닉워터를 적당량 섞어 만들면 된다. 여기에 레몬즙을 몇 방울 첨가하면 더욱 그만이다. 스크루드라이버는 오렌지주스에 보드카를 적당량 섞어 넣어 만들면 되기도 한다. 이들 모두 아주 쉽고 기본적인 칵테일이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고, 비율을 섞어 만들어 먹는 과정이 재미나기도 했다. 집에서 마시는 것이니 걱정할 일도 없고 농도와 배합에 대한 감도 익힐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칵테일이 제법 흔하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지금은 칵테일 바를 잘 가지 않아서 그런지 예전처럼 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식음료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 요즘에는 여러 국적의 작은 캔 맥주나 이름도 잘 모르겠는 칵테일 등이 많이 생성된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예전의 한 때에는 커피와 함께 이런 순한 칵테일이 제법 인기가 좋아 대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주로 가는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메뉴들이 주종을 이루었고, 퍽이나 반응이 좋은 인기메뉴로 등장하곤 하였다.



첫 미팅 장소가 된 레스토랑에서의 수줍은 칵테일 시음

그날 나는 카카오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H가 당당하면서도 정중해 보이는 어투로 차분히 설명한 바에 의하면, 콜라 같은 빛깔의 초콜릿 맛이 나는 부드러운 칵테일이라는 것이었고, 매우 순해서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등의 후유증을 유발하지 않으니, 걱정과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음에 매우 침착한 어조로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말을 하는 태도를 지녀, 상대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나도 핑크레이디나 페퍼민트, 싱가폴 슬링, 레모네이드, 진토닉 따위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하간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가서 처음으로 칵테일을 마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짜릿한 흥분과 새로운 경험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전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행사에 동참하듯 투여된 곳에서, 그들 명문 고등학교 출신의 멋쟁이들 눈에 낙점되어 제법 낭만적인 장소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 가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훤칠하게 잘생긴 귀공자 타입의 H와 오붓한 시간을 같게 된 경험이란 그야말로 그 시절 대단히 새로운 개인사적 사건에 해당할만 했다 그렇지만 처음 본 그를 언제 보았다고 단박에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주변의 친구들과는 달리 전혀 남학생들을 사귀지 않았었다. 당시 유행하던 고교 방송제를 하면선가 누군가를 통해 인근의 같은 공립의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안면을 트게 된 남학생 한 명과 그저 알고 지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 따로 어떤 공간이란 곳을 통해 미팅 같은 분위기와 느낌을 받으며, 서로 상대를 빤히 마주하고 앉아서 관심사를 나누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고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되도록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소 사람들이 말하기를 칵테일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술로서 처음에는 부드러운 줄 알고 홀짝홀짝 마셔대다가 나중에는 머리가 아프거나 하여 고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향이 부드럽고 맛이 달짝지근하여 취기가 늦게 오르기 때문에 특히 주의하여야 한다고들 했다. 소위 당시의 작업맨들이 칵테일로 여자들에게 작업을 거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시중에 심심찮게 회자되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영화나 소설책 속에서도 그런 줄거리가 많이 삽입 되고는 하였으니까 가히 믿을 만한 정보였다. 여학생으로서 바른 생활 몸가짐을 갖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도는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약간의 긴장감과 흥분이 될 만한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와 장소에서 제공받는 술이었으니, 경계감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소 칵테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니 더욱 조심스럽기도 하였다. 본의 아니게 여학생 특유의 내숭도 조금은 작용하였을 라나? ㅎㅎ



이제 칵테일 제조는 너무 어려워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내가 위에 열거한 정도를 가지고 칵테일 운운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메뉴판에는 전혀 이름도 생경한 수많은 메뉴들이 얼마나 빼곡히 적혀있고는 하는가 말이다. 그러니 내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연지사의 태도였으리라.

요즘에는 미도리 샤워나 화이트 러시안, 코스모폴리탄, 잭콕 등의 칵테일 등이 유행하나본데 이들 칵테일 맛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싱가폴 슬링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나보다. 영국의 소설가 섬머싯 몸이 ‘동양의 신비’라고 극찬했던 칵테일이라고 해서 유명하다. 저녁노을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으로 다른 술과는 달리 특히 칵테일에는 야담의 줄거리가 많이 삽입되곤 하는 분위기다. sex 나 kiss 등의 단어를 혼합하거나 연상시키는 작명들도 많다. 좀처럼 즐길 줄도 모르고 멋도 없는 내 생활상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섹스 오브 오르가슴이던가 하는 칵테일이 또 한참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는 칵테일이라고 해서 나도 곧잘 마셔보곤 했다. 그런데 이런 칵테일을 남친을 앞에 앉혀놓고 주문하면 그것이 곧 상대에 대한 의사의 표현으로 둔갑되어, 노골적인 대시이거나 은근히 기회를 제공하는 처사가 되는 거라고 뇌까리고들 하였으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카카오가 카카오나무의 종자에서 추출한 맛이라는 것 이외에 나름 무슨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저 대체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심심한 칵테일이라는 뜻인지는 모르겠다. 찾아보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관계도 아닌 심심한 사람들이 마시는 칵테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한 때 초록 빛깔의 페퍼민트를 즐겨하였다. 작은 잔의 민트향이 어쩐지 깔끔하고 정숙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아 주로 그것을 마셨는데, 아이스크림도 그와 비슷하게 페스타치오아몬드를 주로 먹는 내 성향을 보면, 성격과 취향이 다소 그런 쪽 인 듯하다. 뭐랄까 분위기와 낭만이라고는 별반 없는 무지하게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다. 좀 다른 것을 시켜보려 하다가도 관심이 없으니 아는 게 없어 항상 만만한 알고 있는 그대로를 선택하게 되고는 한다. 나는 왜 이리 꽁꽁 틀어박힌 사고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은연중 집안 분위기가 그러한 건가 더듬어보게 된다. 내 탓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규율과 관계 속에서 생활했던 탓이 아닌가 싶은데, 변명일까 모르겠다.

하여튼 이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H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 개인적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전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미주알고주알 생생한 기억들로 인해 심사가 괴로운 적도 있었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요즘은 전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생각들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걱정이 될 정도다. 망각이 나만의 개인사를 다 잠식해 버리기 전에 글로 옮겨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꽤나 심각한 상태가 유발되나 보다. 요즘 젊은 층에게도 치매 증상이 심하다는데, 혹시 내가 치매가 있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의심이 들고는 한다. 전과 달리 꽤나 심각하게 건망증이 나타나고,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들이 도대체가 기억이 나지 않고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인지를 이제야 하기에 이른다. 서설 그만하고 빨리 하기로 한 이야기로나 들어가자.



활달함 속에 꽉 들어차 있는 아리송한 내 성격

H와는 그 후 친하지는 않아도 가끔 만나고는 하였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사고가 깊은 똑똑한 청년이었는데, 이따금씩 뜬금없이 내게 연락을 취해오고는 하였다. 대학 진학이후 학교나 집안 분위기 등이 너무 달라 대화가 잘 안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가끔 연락을 주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가보면 가출을 했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하였다. 나는 거의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열변을 토하며 어울려 다닌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자상한 모습으로 마치 오빠처럼 날 잘 안내하며 여기저기를 구경시키듯 데려가 주고는 했다. 나는 평소 활달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데, 속으로 욕심은 많으면서도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그랬는지 꽤나 멋진 그에게는 좀 내숭을 떨며 마음 표현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럭저럭 한 2년간 간간히 얼굴을 보며 지냈다. 이따금씩 그는 대단히 심각하게 집안의 기대에 대해 버거워하는 듯 호소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가 결국에는 집안의 분위기를 따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오빠들의 경우에 비추어 그리 생각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절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그러다가 의대만 해도 6년을 공부해야 하는 그가 내가 초대를 졸업할 즈음에 작별을 고해왔다. 자신은 앞으로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나는 동갑이니까 여성으로서 얼른 시집을 가야 할거라고 생각이 된다나. 딱히 사귀는 관계라고 할 수 없어 헤어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지만,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를 욕심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도 내가 무척이나 부족한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끌어 당겨보려는 욕심보다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일류대에 다니는 반면, 내가 그렇지 못한 것이 조금 속상했던가 보다.

당시에 이화여대생들을 취재한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는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시집을 잘 가기 위해서 공부하고 대학에 간다는 내용을 실어, 그 기사가 가십이 된 적이 있다. 사실상 그런 풍토와 다르지 않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반박할 다른 이유나 어떤 입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그래라 하는 식으로 마치 순순히 받아들이는 양 하였다. 이리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딴엔 특별한 감정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만. 그래 그런지 그가 남긴 한마디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던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오래 기억이 되었다. 그날 그와 그렇게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어 그런지,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이 되어 그러한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야기인 즉 만나고서 헤어져 돌아갈 때마다 단 한 번도 내가 그를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찬찬하고 꼼꼼한 그의 성격에 딴에는 서운함 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너는 그러한 성격이니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였던가. 하여튼, 그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고 제 각각 살아가게 되어 아주 이따금씩 무언가의 계기가 있고는 할 때면 생각이 나곤 하는 친구다.

H가 그 이야기를 했기에 말인데, 사실은 나도 전혀 의식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내 성향인가 보다. 좋아하는 마음에 앞서 자존심과 미련함이 우선 발동하여서 매달리기나 하듯 뒤돌아보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다. H가 보기 드물게 제법 잘난데다가 도무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라곤 없어보였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편히 지내지를 못했지 싶다. 사실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 표현하지 못하는 이상한 태도가 있다. 그래서 그냥 속으로 혼자 상상하거나 기분을 음미하다 말고는 하는 편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상대일 때는 다르겠지만, 지금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다가오는 사람과는 단 둘이만 어울리는 어떤 상황들을 그다지 즐겨하지 못한다. 전혀 아무 생각이 안 드는 편안한 관계들에게 내가 대하는 행동을 보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아직도 그러한 상황에 또 처하게 되면 무지 어색하기 짝이 없어 하며 평소와 달리 편하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나는 청년 시절이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사귐을 전재로 하는 만남에 대해서는 그다지 길게 이어가지 않는다. 처음에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그냥 길어야 두세 번 정도에 끝내버린다. 그것도 딱 부러지게 표현하기가 미안해서 시간을 좀 두어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명확한 것을 좋아하고 일단 마음이 놓여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분위기가 중요하며, 만나다 보니 정이 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애시에 아닌데 어쩌다보니 정들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지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느낌상 그렇게 전개될 소지가 많아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피하게 된다. 이러니 사람 사귀는 일이 의외로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런 나를 향해 '잘났다'라고 비꼬곤 한다.^^



이상적인 외모와 부대 환경에, 음매 기죽어~

H도 그랬다. 꾀나 괜찮은 인재였으니까. 게다가 키도 훤칠하게 크고 이목구비도 죽은데 없이 잘생겼지 아마. 공부도 잘해서 수석 입학을 하였고, 학교생활도 매우 성실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최대의 장점은 무엇보다 우아한 인성이었다.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나 몰지각한 행위는 삼갈 줄 아는, 참 바르고 말쑥하며 건실해 보이는 지성인이었다. 한마디로 귀공자처럼 우아한 매너가 일품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때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기대되고, 중년이후 더욱 중후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청소년기에나 해당할 아련한 그때의 기억들 저편 이후,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 저런 풍파를 겪으면서는 더욱,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아주 가끔씩 무엇인가와 연관되어 그때를 기억하게 되고는 한다. 그때는 H가 바르고 신사답게 행동하였던 점들이 당연함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지극히 아름다운 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고는 해서 그 시간들에 대해 고마움이 느껴지고는 했다. "아, 그때에 그 친구가 그랬었구나" 하고 다시금 사람의 인성과 가치관에 대해 되새겨 보게 되고는 하는 것이다.

오늘도 문득 이 길을 걷는 가운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H가 골목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와 기억의 한편에서  미소 짓게 하는 것이 가히 나쁘지 않다. 딱히 추억할만한 꺼리조차 안 되는 싱거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저절로 떠오르는 이 회상들이 꽤나 괜찮음이다. 봄비 촉촉히 내리는 신록의 계절 5월, 이 거리의 싱그럽고 상쾌한 내음과도 같이, 지난 날의 풋풋한 기억들이 훈훈하게 피어나니 그 또한 즐거움이다. 누가되었건 어느 누군가에게 상당히 몹쓸 인간으로 남지 않는 것, 참 다행한 일이고 되도록 추구해 나가야 할 일상이란 생각을 다시금 가져본다. 카페를 향한 우연한 발걸음에서부터, 여기 이 카페 길을 산책하며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지난날의 감회에 젖는 일이 예사롭지만은 않다. 비 내리는 휴일 카페의 오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모처럼만에 나만의 추억에 흠뻑 빠져들어 보는 기분도 괜찮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건가?



추억이 번지는 한적한 카페 산책의 길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계속하여 통인동, 옥인동, 효자동 등을 천천히 걸으며 카페를 산책하다보니 문득 언젠가 H와 걸었던 그 길과 마주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동네가 그만큼 변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느린 걸음으로 다양한 카페를 구경하며 걷다보니 수십 년 전, H가 “여기는 우리 큰 집이예요.” 하던 곳과 마주치게 된다. 딱 그 집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당시에 프랑스엔가 유학을 다녀온 미술학도인 H의 사촌 형이 특이하게도 자기네 집의 담벼락을 저렇게 색칠해 놓았다며, 내게 속삭이던 그 담벼락 같은 곳과 대면하게 되어서 이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바뀌지 않은 그 길, 그 골목안의 그 집들이 어찌나 정겹고 운치가 있는지 너무도 반갑고 아름다웠다. 새삼 감흥에 흠뻑 빠져들면서 며칠 전, 공연히 심통이 사나워졌던 강남의 압구정 가로수길이 일시에 가소롭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역사도 의미도 없는 번듯한 그곳에서는 추억이나 생명력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이곳의 분위기와 모습은 매우 달랐다. 고스란히 남겨진 지난 이야기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가 우아하게 보존된 점이 각별하고 따뜻하다. 세월과 함께 지고지순한 고풍스러움으로 어울림을 형성해 나가는 감동 또한 몹시 크고 벅찬 느낌이다. 임시방편적으로 덧칠되어 보기에 흉하거나, 서둘러 날림의 조작을 가한 가벼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여 지키고 가꾸어나가는 한편, 새로운 시대와의 어울림과 상생을 꿈꾸는 듯한 모습들이 참으로 고맙다. 나름의 의지로 꿋꿋이 버티어 온 유구한 저력과 인내가 있기에 더 한층 돋보이는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강남의 가로수 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곳의 뻑적지근하고 화려하게 우글대는 활기에 섣불리 기가 눌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 동안의 허기짐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음이다. 이 고풍스러운 멋과 이곳만의 향취는 무엇으로도 대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준다고 하여도 결코 함부로 살 수 없는, 고고함과 우아함이 깃들여진 가치를 어찌 모르랴. 역사란 호락호락 아무것에나 가벼이 자존심을 팔지 않는 비장함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멋진 한가로움은 그냥 얻어지는 운치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눈물겹다시피 한 이토록 아름다운 고고함과 진한 향수에 젖어 살고 싶어져서 시장이며 골목 곳곳을 찬찬히 누벼본다. 세월의 흔적과 변화를 감출 수야 없지만, 그래도 이마만큼을 지켜온 노력이 가상하고 가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내친김에 용기 내어 부동산중개업소로 발길을 디밀어본다. 어느 새 참 많이 올랐다. 안타깝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하도 변하지 않아 요상한 곳으로나 치부되고, 조금 늦게 알아봐도 늦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시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웬걸 그냥 놔두지 않았다. 역시나 이제는 마땅히 그 저력을 발휘할 만하다. 평당 단가가 예전과는 상당히 다르고, 높이 치솟아 가치가 형성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청동 일대가 확 바뀌면서 그 영향이 여기에까지 파급되어 미치고 있는 상황인지라, 이제는 아무나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이 더이상 아님을 확인시킨다. 강북에서 알아줄 만한 곳이기 때문이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진즉에 좀 더 안목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와 후회하며 헛헛한 마음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보다 나은 누군가가 들어와 이곳을 더 오래 잘 보존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게 일기에 다행히 그리 아쉽지 만은 않다.

내친 김에 카페 자리 하나를 물어본다. 지나오며 저곳은 왜 저리 작게 저 구석에 처박힌 느낌인가 하며, 잘 될까 올라가보려던 그곳이 가게 자리로 나와 있다고 한다. 19평이라는 데 임대료도 세지만 무엇보다 권리금이 만만찮다.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일의 상업적인 접근이기도 하니 돌연 감상적인 태도를 멈추게 된다. 경영적인 측면을 고려하며 마땅히 왜 그만 두려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얼마나 운영하였는가를 슬쩍 물으니 얼마 되지 않았다고만 하며 얼버무린다. 이 동네를 잘 아는 동네에 거주하는 사람이 가게가 헐값에 나오니 인수하여 조금 운영해 보다가 마뜩치 않아 금방 가게를 내어 놓고 있는 모양이다. 오래 가지고 있기보다 빨리 내 놓음으로서 예상되는 손해를 줄이는 한편, 권리금으로 빠른 만회와 이익을 보상받으려는 취지로 보인다. 나 같은 순 무지랭이 뜨내기가 함부로 달려들 사항이 아닌 듯싶어 그저 놀이나 나온 사람인 양 함구한 채, 호기심어린 눈으로 분위기 관찰만 하고 물러 나왔다.

카페를 찾아 거닐다 보니 문득 카페에서 쓰는 자전적 이야기가 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괜찮은 아이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년의 여성들이 이러한 곳을 찾아 일상의 여유를 갖으며 써보는 자기 이야기들도 괜찮은 방식이라 여겨진다. 혼자 이리저리 이것저것을 품으며 요리조리 골목길 사이를 누벼보는 맛도 가히 낭만적이다. 마음을 따라 거닐어보는 비 오는 토요일 오후의 상큼 신선한 카페 산책이 커피향보다 한결 그윽한 날이다. ^-^*


이대로 올려도 될까? 그러나 이젠 자야쥐~ 새벽에 다시 읽어보고 수정보완해야 되겠당.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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