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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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7일 01시 07분 등록

 

영화 시에서의 배우 윤정희 씨에 대한 감동


J와 함께 영화 詩(이창동 감독, 각본)를 보았다. 배우 윤정희는 단아하고 우아하며 클래식한 연기자다. 이번 2010년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에 거론되다 감독상을 수상하고서 남편 백건우 품에 안겨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은 순수 예술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가 인터넷 상에 게시되었을 때는, 어느새 여배우 윤정희가 저토록 늙었나 하며 깜짝 놀랐다. 영화의 장면이려니 하며 다시 확인해도 현실의 그녀 모습인데 너무나 여염집 아낙 같은 모습에 자지러질 번했다. 칸 영화제의 오프닝과 시상식에 나섰을 때에도 조금 더 세련되게 치장하지 않고서... . 하는 아쉬움을 가졌더랬다. 너무도 수수한 차림을 하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형으로 보톡스 따위를 주입하지도 않았고, 주름살 제거술도 받지 않은 듯 보이며, 입체 화장이며 값 비싼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머리도 손수 손질하였다고 기사는 전했다. 기자는 우아한 한복차림이라고 했지만 여의도에서 윤정희 씨 개인이 맞추었다는 것을 기사로 남겼을 때, 나는 혹시 덜 세련돼 보여 윤정희 씨 당사자에게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을 가졌다.

세계적인 배우들이 모이고 국제적인 관심사이기도 한데, 나라를 대표하고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에 좀 더 삐까번쩍하고 근사하게 한껏 장식하고 나가지 않고서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너무 평범해 보인다하는 안타까움을 가졌더랬다. 세계 어느 자리 어떤 국제적인 자리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배우가 단연 돋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최소한 국제적 행사 어디에 내놔도 절대 기죽거나 초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을 앞서 한 것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소곳해 보이는 차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얼마든지 건재 하는 왕년의 스타로서 당대 최고의 히로인이요, 윤정희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음껏 화려하게 꾸밀 만 하다고 생각하며, 어째 저런 모습일까 아쉬움 한편 의아하기까지 했다. 같이 출전한 다른 작품의 동료 배우들의 겉치레에 비해 언뜻 너무 덜 차려입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공연히 세월의 덧없음을 상기하며, 서글픔이 일면서 생활이 곤궁한 것인가 하고 염려가 되어 안쓰러운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내 생각이 매우 상업성에 치우치며 일상의 난무하는 인공의 가공적인 모습에 매우 깊숙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배우 윤정희는 현실의 윤정희 그대로이며, 무공해의 생태적인 자연인이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각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윤정희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와 윤정희 자신을 극중 인물과 차별을 두지 않고, 내면 연기 그대로 또 외면의 모습 그대로를 동일선상에 위치하듯, 작품 자체가 그녀요, 영화의 내용이 곧 윤정희 자신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배우로서 순간 남의 인생을 잠깐씩 살다 나오는 작품 속 소모품의 인생이거나 배우라는 직업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윤정희가 아니라, 그녀의 일상에 잘 맞아 떨어지는 그 작품을 하기에 너무 적합한 여인 윤정희요, 그가 바로 인간 윤정희로 생각되는 것이다. 오직 그녀만이 그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 윤정희는 우리를 각인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기와 매너를 아낌없이 펼쳤다. 윤정희라는 배우로서의 등장이 아니라, 바로 축제장에 나타나 함께 어울릴 만한 현실의 윤정희 그대로인 것이다. 마치 영화 속 소년의 외할머니가 우리 앞에 살아 돌아온 것과 같이 말이다. 그녀의 이러한 등장이 매우 놀라웠다. 하지만 예술인 윤정희는 당당했다. 언제든 연기로 승부하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태도로 자유롭게 연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영혼의 연기자요 개성 강한 예술가의 풍모를 지닌 이지적인 배우였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순수예술을 하는 남편 백건우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을 것 같고, 서로의 예술 세계를 깊이 인정하는 그들 부부만의 삶의 태도 그대로가 작품 및 일상의 전반에까지 차고 넘치는 모습으로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대단한 자존심이요 자긍심을 지닌 예술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실생활에서는 물론 커다란 행사에서조차 영화배우로서의 윤정희 인생이 아니라, 자연인 윤정희로서 살아가는 모습임과 동시에, 항시 연기자이며 예술인 윤정희로서의 매운 태도를 나태 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너무도 아름답고 신선한 자극이며 내・외면이 일치하는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나도 그러한 자존심을 가지고 늙어 가리라 그녀처럼. 하고 본을 받게 하는 참 예술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아니 세계적인 배우 윤정희의 대단한 올곧음의 예술철학이 아니겠는가. 어려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녀의 생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존경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부부가 진실로 아름다운 예술인의 초상을 보여 주는 모습이 감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詩)

작품은 환갑을 훌쩍 넘긴 초로의 여인 윤정희가 이혼한 딸의 아들인 외손자를 대신 키우며 생활하는 모습에서부터 출발한다.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인 외할머니 윤정희가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중학교 3학년 외손자의 뒷바라지를 위해 간병인 겸 파출부 노릇을 해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삶의 애환을 그린다. 철없는 10대 사춘기 소년에 불과한 외손자는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데, 주로 폭력물이나 오락 등에만 빠지며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그저 그들 또래가 겪을 만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런 계획이나 꿈도 없이 체념한 듯 일상을 영위하며, 낙이 없는 모습으로 마지못해 학교에 다니는 형상이다. 그러다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 외손자는, 어느 날부터 6명의 패거리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니며, 6개월 동안이나 교내 같은 학년의 여학생을 윤간 하였고, 급기야 그 여학생은 더 이상 그 상황을 견디다 못해 꽃다운 나이에 청춘을 접어버리는 선택을 한다. 한가롭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숲이 우거진 강물에 엎어진 채로 둥둥 떠가는 여학생의 시체 모습을 영화는 첫 장면으로 클로즈업 해 보여준다.

한편 삶의 팍팍함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초로의 여인 윤정희는 여성성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채 시처럼 소녀처럼, 마치 나비가 춤추고 꽃이 노래하듯 하늘하늘 감수성 많고 꿈 많은 소녀 같은 모습으로 곱게 늙어가기를 희망하는 멋쟁이 할머니다. 소녀 같은 감수성을 그대로 간직한 소년의 외할머니는 자꾸만 건망증이 심해지고 팔이 저려와 어느 날 병원을 찾는다. 그녀는 의사에게 자꾸만 팔에 힘이 빠지고 전기가 흐르듯 쩌릿쩌릿하다고 증세를 말하는데,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알츠하이머, 즉 치매라고 진단을 내린다. 그녀는 믿을 수 없어하지만 이내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증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아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며 문화센터를 찾아가 시를 쓰고 싶다고 용기를 내어본다. 전부터 생각해 온 것들이지만, 살면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일을 이제는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갈망하는 것이다. 뒤 늦게 시 쓰기를 수강하며 갖은 애를 써보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외손자와 연루되어 여학생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된 외할머니는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외손자를 불러 야단을 치거나 넋두리에 빠지기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외손자를 안타까워한다. 질풍노도와 같은 정체성 혼란의 시기인 청소년기, 너무나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불운한 가정환경에 처한 외손자가 안쓰러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외할머니 윤정희는 소년이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기를 바랄 뿐이다. 소년의 어머니인 윤정희의 딸 역시도 저 하나 살아가기에도 빠듯한지, 통 소식조차 없다. 제 아들을 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방치한 채, 어디에서 사는지 일체 드나들지도 않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어미에게 제 새끼를 내팽개치듯 맡겨놓았을 뿐이다. 그래도 윤정희는 딸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밝고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가며 애쓰는 낙관적 인물이다. 그녀는 시를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감수성 많은 초로의 여인으로 항상 여성스럽고 맵시 난 차림을 하고 다닌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인 소시민적 일상을 영위하는 한 여인이요, 지고지순한 사랑과 헌신으로 살아가는 인내와 순응 속 밝음의 화신이다.

자신의 슬하에서 어처구니없는 행동밖에는 하지 못하는 외손자를 그녀는 시를 쓰는 고행처럼 받아들이고, 시를 쓰고자 하는 희망과도 같이 외손자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버리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안간힘으로 감싸고 돌본다. 일상이라고는 맨 버겁고 힘든 일과들과, 보람이나 일말의 기대와 희망조차도 보이지 않는 따분하고 헛헛한 현실의 상황뿐임에도 호락호락 발목 잡힌 채로 미련하게 살지 않는다. 현실의 생활에서나마 깜냥 것 최선을 다해 양심의 결대로 자유로이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아름답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할 뿐인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의 맑고 싱그러운 영혼처럼 시를 동경하고 사모하며, 일상을 시와 함께 영위해 나가고자 바람하면서.

그녀 자신의 고유한 삶의 정체성과 어우러져 최대한 충만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허물어져가는 정신세계와 일상의 헛헛함과 아름다움을 시로 읊어내어 보고자 한다. 생기 있는 삶을 추구하며 어려운 현실에 휘둘리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지만, 이미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로 마음을 달래고, 시로 그녀의 시름을 위로 받으며, 시로 희망과 기대를 품으면서, 시와 함께 각박하고 고달픈 현실을 비껴나 일상을 관조하며 살아가기를 갈망한다. 아름다운 사물들과 속삭일 수 있는 시인의 안목과 시를 낭송하는 자세로 시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장기간 투병생활에 지쳐하던 간병 상대자 갑부 노인은 너무나 참한 윤정희의 간호하는 모습에 반해 비아그라를 구해다가 먹고는 제발 단 한번만 자신과 성애를 나누어 달라고 애원처럼 매달린다. 처음에 그녀는 모욕감을 느끼며 그 일을 그만 두었지만, 소녀 아녜스의 죽음 앞에 자신의 앙탈이 덧없음을 느낀다. 무엇으로도 그 소녀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고 죽음을 위로할 수 없음에 가슴 아파하면서 삶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철없는 외손자 대신 속죄양이 되어 죄를 빌려 피해자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잠시 나누고 올 뿐이다. 피해자 어머니를 찾아 가는 밭두렁에 이르러 살구나무에서 살구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다 누군가의 발에 짓밟히고 짓이겨 진 것들을 들여다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구로 다음 생을 이어가는 혼신의 열정과 자연의 순응성을 깨닫게 된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 보다 자신의 일생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농익어 나무에서 떨어져 흐드러진 살구를 들여다보며 그때가 가장 과실의 무르익은 절정의 최고 맛을 낸다는 것과, 그렇게 생물(생명)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고 난 연후에야 또 다른 살구로 다시 나무에 열리게 되는 자연의 순환과 이치와 섭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갈망과 동질성을 깨달으며, 이윽고 뇌졸중 노인의 간절한 성애를 받아들인다.

그때까지 막막하기만 할 뿐, 시를 쓸 수 없었던 그녀는 언어의 조합인 글로서 시를 풀어내는 대신 사람에게 직접 시성과 발심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시어가 지친 영혼들에게 생기를 돋우듯, 오래 지쳐있는 한 생명에게 단비와도 같은 한순간의 쾌락과 기쁨을 선사하며, 생명의 순환과 자생력을 회복시켜 보고자 한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온몸으로 인간에게 인간이 생명의 시를 쓰는 것이다. 그녀의 행위 자체가 한 자 한 자 정성껏 꼭꼭 눌러쓰는 시어들과 같이 생명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인간이 인간에게 오롯한 간절함을 연민하며, 시들어 곧 죽어갈 생명에게 살아있는 동안의 일순간만이라도 활력이 솟게 하고, 그답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평화를 선사하는, 자비와 헌신의 참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볼품없는 노인으로서 비록 노쇠하여 병들어 초라한 모습의 생명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꼭 있어주어야 할 일상의 고달픈 현실 가운데의 환기와 반전의 어느 날에 우연처럼, 사는 날까지 자연의 섭리와 순환을 소중히 돕는 힘, 한줄기의 빛과도 같은 영혼의 생명력과 욕망을 솟구치게 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노인은 병환 중에도 몰라보게 생을 의욕하며 활기를 찾아간다. 윤정희가 행하는 처세와 태도는 생명의 순환과 역동성을 일컬음이요, 자연현상의 이치를 달관으로 순행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시 쓰기는 곧 사람을 이해하고 돕는 것이며 생명력을 발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영화는 간접 조명하는 듯하다.

한편 그녀의 현실로는 도저히 합의금 마련을 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으로 한 많은 생을 마친 소녀에 대하여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철없는 외손자를 대신해 수없이 넋을 위로한다. 피지도 못하고 죽은 영혼을 위해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진심으로 가슴 아파 하는 것이다. 소년의 외할머니는 소녀 아녜스의 사진을 위령제 날에 성당에서 몰래 가져다 식탁에 놓아두고서 외손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길 바라보지만 그도 덧없는 일이요, 그녀가 몸을 던졌던 다리 밑 강물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그녀의 넋을 달래도 보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던가.

사건 이후부터 여기저기 대책회의에 끌려 다니며 다른 가해자의 학부모들로부터 합의금에 대해 지속적으로 몹시 시달리는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희망인 병든 갑부 노인에게 찾아가 어차피 갚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이유는 묻지 말고 돈을 달라고 때를 쓰듯 요청한다. 마치 화대를 달라고 하듯이 태연자약하게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던 어이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외손자를 구해야 하고 소녀의 죽음을 위로할 최소한의 묘책은 그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최소의 도리와 성의를 전달하기 위해 비용을 마련코자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어 처연히 금고 털이를 하듯 마음에도 없는 짓거리를 해대는 것이다. 어린 외손자의 불우한 가정환경에 기인한 빗나간 태도와 꽃 같은 소녀의 덧없는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어미를 대신하고 기성세대들의 잘못을 대신하여, 외할머니로서 할 수 있는 무엇이건 다 해낼 수 있다는 각오로 단단히 작심한 듯 서슴없는 행동이다. 합의금 마련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하여 초로의 노인인 그녀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길 밖에는 전혀 달리 대책이 없다. 하여 철면피처럼 병든 노인을 찾아가 때를 쓰듯 삶을 체념한 듯 능청스럽게 달라고 졸라, 온몸을 던져 마련한 몸값으로 몸값을, 아니 죽음의 값을 전달한다.

하지만 꽃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그녀의 감수성 깊고 올곧은 심성이 결코 바라는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맑고 순결하기만 한 그녀의 영혼은 그녀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버거웠고,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한 채, 깊은 상심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것으로서 외손자의 죄를 대신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책임 추궁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료시킨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이 정신력마저 희미해져가는 소년의 외할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최대한의 위자료까지 성의를 표하고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무기력하게 사건의 책임과 마무리를 위해 소년원으로 향하는 외손자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수무책으로 보낼 수밖에 없음에 무기력할 뿐이다. 그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현실에 외할머니는 절망하고 힘겨워한다. 하여 도저히 숨을 가눌 길 없는 가슴앓이를 하며 애통한 선택을 하고야 말기에 이른다. 

때마침 시 수업 종강 날에 외할머니는 어느 덧 소녀와 그녀 자신의 영혼이 혼연일체의 넋이 되어, 소녀와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애절한 삶의 허상들을 던져버리는 영원의 시로서 마음의 골을 유감없이 표현해 낸다. 문화센터 시작반의 종강 날에 시 한편을 과제로 제출키로 하였지만 아무도 과제를 완성한 사람은 없다. 초로의 노인 윤정희만이 최선을 다해 시 한편을 완성하여 스승의 탁자 위에 감사의 꽃다발과 함께 전해 두었던 것이다. 끝까지 스승을 신뢰하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건실한 소시민의 한사람인가를 영화는 알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신념만으로 살아갈 수 있고, 이 풍진 세상을 지켜갈 수만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그리하여 시는 강사에 의해 대신 덧없이 낭송된다. 소년의 외할머니 윤정희가 소녀를 그리는 시는 힘들고 고단한 세상과의 작별을 사전 암시한다. 소녀의 마음과 외할머니의 마음은 세월의 강물처럼 시로 굽이굽이 흐르며 생과 사를 초월한 영혼의 메아리로 닿아 함께 흘러간다. 외할머니의 생의 마지막 시와 일찌감치 생을 마치고만 소녀의 살아생전의 마음의 언어들이 시로 주거니 받거니 애절하게 굽이치듯 강을 흐른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뒤늦게 귀찮고 신경질 적이며 따분한 모습으로 집에 찾아 와 보지만 아들은 이미 소년원으로, 친정어머니는 자살을 선택한 뒤 인 것이다.


영화 시는 나의 감상처럼 자세하게 묘사를 전개하기보다 내면 연기와 표정 연기로 함축하며 시처럼 간결하고 깔끔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소년의 외할머니가 직접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 따위를 삽입하거나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숨통이 끊어지기 전 거칠고 가쁜 숨소리만이 애끓는 죽음을 암시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무엇보다 여배우 윤정희의 시 같은 무공해 연기력에 반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시처럼 여운을 남기는 연기를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냈다. 칸 영화제의 오프닝과 시상식에 나타난 그녀는 어떤 연기라도 척척 해내는 배우 윤정희로서의 맵시보다, 마치 영화 속 외할머니가 시처럼 걸어 나오듯 수수하고 우아한 자태를 드리우며 등장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 윤정희임과 동시에 예술가의 한사람으로서의 윤정희 고유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시종일관 자신감과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삶이 진지하고 성실했음이요, 자신 있게 표출할 수 있는 당당함이다. 아무에게나 볼 수 없는 배우 윤정희만의 모습이며 나아가 세기의 명배우요, 진정한 예술인으로서의 삶과 길을 걸어온 윤정희라는 자연인의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화를 보고서야 배우 윤정희로서의 단순함이 아니라 세계와 당당히 겨룰 수 있는 작은 몸집의 큰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이지적인 가치관과 신념이 이해되었다. 그녀가 그녀의 온 인생과 함께한 영화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고 애지중지 감사해 하는지를 알게 한다. 모처럼 대중과 가장 가까이 접하는 영화 속에서 진정한 예술인의 참모습을 대하니 영화와 함께 감동이 배가 되었다. 많은 연기자들이 이런 연기자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한낱 인기에 영합하거나 일시에 일확천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직업의 한 분야로서의 배우에서 나아가, 진정한 예술인의 삶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더없이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한국영화인으로만 머물지 않고 세기의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누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배우, 더불어 국위선양까지도 떨치는 예술가 정신은 얼마나 숭고한 일이며 가히 크게 찬사할 만한 일인가. 그녀만의 고상하고 우아한 자연미와 순수한 예술 정신을 경험하는 영화를 보게 되어 더없는 감동이었다. 보기를 참 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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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7:12:35 *.72.153.134
윤정희와 윤여정을 구분 못하는 J입니다.
배우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사람이 되므로... 난 그사람을 모릅니다.
그리고, 전 윤정희라는 사람을 이 영화 이전에 전혀 몰라서, 그냥 덤덤히 봤어요.
시나 인생이나 영화나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데요. 가끔은 강물이 소리내고 어떤 때는 너무 깊어 소리가 없듯이 참 잔잔한 영화이더군요.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나이를 참 많이 먹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묵묵한 일상이 동치미 맛처럼 느껴지더군요.
'시'라는 영화를 본 그날이 바로 '시'와 같은 날입니다.

제 취향의 영화는 아니라서 영화 못 볼뻔 했는데, 같이 보자가 해주어서 고마워요. 이 다음엔 '슈렉' 볼까요. 제 스타일의 인생영화같은데...하하하. 저는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도 행복합니다. 더 웃게 만들고 싶습니다. '슈렉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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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6.22 08:46:40 *.197.63.9
알았어. 그 렇 게 할 께. 그럼 난 밥 살께. 으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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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수(12기꿈틀투몽)
2010.06.25 09:03:46 *.178.68.125
두 분 잘 지내시나요?
글 만 보아서는 아주 잘 지내시는군요~
두 분 모두 보고 싶네요~
잘 읽었어요. 써니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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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2010.06.30 02:04:08 *.197.63.9
왜 그리 보기 힘드누? 물론 아내와 아가와 잘 살고 있겠지? 얼굴과 글 좀 나누며 살자. 응? 보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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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求人求才> 나무 소품에 어울릴 사진 & 포토샵 file [5] 최성우 2010.07.11 4931
59 카페에서의 독서, 웅녀의 리뷰/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 [1] 써니 2010.07.23 4273
58 출동! 카페탐험대 여수여성자활센터 강연 및 도움 방문기 file [6] 써니 2010.07.23 4534
57 그대, 미성동을 아시나요? [3] 써니 2010.07.25 3766
56 [카탐] 동네 산책 1/ 커피오다 file 써니 2010.07.26 3639
55 [카탐] 동네 산책 2/ Six file [1] 써니 2010.07.29 4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