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이해할 때는 두 개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아폴론의 시선이고, 또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시선이다.   하나는 빛의 시선이고, 또 하나는 황홀과 도취의 시선이다. 하나는 이성의 시선이고 또 하나는 감성의 시선이다. 변화를 계획하고 방향을 정할 때는 이성의 힘을 빌어야 한다. 환한 빛 아래서 계획되어야 후회가 적다. 그러나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는 감정에서 나온다. '지금 여기' 라는 황홀을 느끼지 못하면 그 하루에 미안해야한다.

   사람들은 변화가 두 개의 시선으로 조망되는 것에 불편해 한다. 복잡하고 어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를 삶의 원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숨을 쉴 수 있다. 식도와 기도는 서로 알아서 동시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동일한 부위로 생식과 배뇨를 함께 한다.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를 모두 가지고 있어 하나는 생각하고 하나는 느낀다. 그리하여 우리가 된 것이다. 다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 테스킹 능력은 우리의 작동원리인 것이다. 모순과 딜레마와 패러독스는 균형과 조화의 원칙이며, 삶을 흥미진진하게 이끄는 놀이의 핵심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신들의 이야기 속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모두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그들이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하자. 우리는 질서에 지치면 변화를 만들어 내고, 변화에 피로하면 질서를 만들어 낸다. 먼 목표와 로드 맵을 만들 때는 머리를 쓰지만 그 길을 따라 매일 걸을 때는 새소리와 물소리에 황홀한 미소로 답해야한다. 오늘이라는 아름다운 숲길을 걸을 때는 모든 아름다운 꽃과 향기와 포도주에 심취하여 황홀해야한다. 변화는 방랑과 여행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일상에 지치면 짐을 꾸려 떠나고, 자유에 지치면 돌아와 일상의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중용이라고 불렀다. 종종 공자의 중용은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것, 물탄 술, 혹은 죽밥 같은 것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공자의 중용은 떨림이다. 그것은 나침반의 떨림이나 저울의 떨림과 같다. 방향이 바뀔 때 마다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스스로를 재세팅해야할 때, 나침반은 떨린다. 새로운 물건을 달 때 마다 저울의 추는 균형을 잡기위해 떨린다.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떨리게 된다. 우주적 떨림이 있는 순간 우리는 변화하게 된다. 이 영혼의 떨림에 반응하지 못하면 나침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 결국 표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는 이 떨림에 따라야 한다.

   종종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언제가 인생의 전환점인지, 언제 변화해야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말한다. 그대의 영혼이 떨릴 때, 그 떨림을 따라라. 그러나 떨림이 없다면 아직 그대로 가던 길을 가면 된다. 그러면 난감해 한다. 꼭 집어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보다 더 그럴 듯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이성과 감성으로 만들어진 균형의 나침반은 내면의 정신 속에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으나 본인은 그 떨림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때는 용기를 내어 그 떨림에 부응해야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따라 나서듯,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떨림에 따라 나서야한다.

  만일 그 떨림이 교활한 내 무의식의 거짓 투영에 의한 것이라면 어찌할까 ? 나를 망치려는 악마의 부름이라면 ? 그때는 인생이 흥미진진해진다. 커다란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두려울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나는 나의 운명을 따를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주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