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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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시기라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뭔가를 잃게 되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도전과제가 우리를 영원히 바꾸어놓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부부가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면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 지식을 얻게 되며 이를 기반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이 지식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 게리 뉴먼, 멜리사 뉴먼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에서 -
더큰 감사와 더큰사랑.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특히나 어려운시기, 나쁜시기에는 더욱더 말이죠.
아주 단순한 일상의 한자락속의 일부인 부부싸음만 하더라도 당시에는 너무 힘들지만 미안하다 한마디로
화해하고 또 웃으면서 그만큼 나도 좀더 자라남을 느낍니다. 큰 어려움과 나쁜시기임에도 고통과 절망의 장탄식 대신 감사과 사랑을 가진다면 또다른 성장한 나의 모습을
바라볼수 있지 않을까요.
올해 저는 꽤 힘든 회사에서의 추석 연휴가 될듯하네요.
맛있는것도 많이 드시고 또 오랜만의 정다운 얼굴도 많이 만나세요.
(개인적으로는 설,추석의 제사문화는 아마도 우리 세대를 끝으로 급격히 퇴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지 않는데..어쨌든 지금보다 명절때의 여성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오늘은 철야작업을 하면서 깜냥은 안되지만 감히 천복부족의 출석부를 열어봅니다.

조한규님, 아침 첫 문을 열어주셨군요!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물론 저는 가톨릭입니다만)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같이 하려면 그 사람에게 이 능력이 있는지...그것을 알아야 한다. 화해하는 능력. 즉, 오래 함께 살다보면 누구나 크던 작던 다툼은 있기 마련인데, 그 다음 어떻게 화해하는냐, 혹은 화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힘이 있는 사람,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한규님, <좋은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 오려고 힘든 일도 있겠지요.
파이팅! 하십시오.

한규님!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전 지난 1기를 통해서야 IT업계가 야근 (야근이 아니죠. 거의 철야 밤샘이죠~)이 많은 줄을 알았답니다.
근데 추석 연휴도 꼬박 반납하셔야 하네요. 에고.
모쪼록 건강 챙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힘들땐 역시나 아이의 사진 보는게 제일 큰 행복이더군요.
저도 귀여운 제 아들 사진 올립니다. 출장중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가족의 사진은 역시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앞니가 무더기로 빠진데다 얼마전에 파마해서 더 귀엽습니다. ㅎㅎ

PS. 오늘은 제가 일전에도 추천드린 독서포럼 '나비'가 열리는 날이랍니다.
6:40AM~9:00AM까지 양재역 인근 3P자기경영연구소(www.3pbinder.com) 지하에서 열리는데 달콤한
주말 아침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석하는 60~70여분의 에너지를 받고 싶으시면 참석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냥 오시면 됩니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도 사람들은 더욱 더 성숙되고 큰 힘을 다져나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하영이를 일욜까지 못보고 계속 철야작업하셔야 한다는 글에 속으로 많이 놀랐습니다.
추석연휴도 반납이라니..
철야 중에서도 이렇게 좋은 글로 대문을 열어주시니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만 더 고생하시고 얼릉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귀환하시기 바랍니다^^
작은행복을 얻기 위해서도 힘차고 강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참으로 와 닿습니다.
저의 잠을 단박에 몰아내는 한 말씀이세요^^
깜냥 충분하신 한규님, 오늘도 홧팅임다^^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나온 같은 몽골 여인 동생을 숨겨주고
도망나온 여인의 남편으로부터 숨겨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칼로 무참히 난도질 당해 꽃다운 나이에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장례식장에는 가난을 벗어나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시집 온 많은 이주여성들이
음식을 나르고 죽은 언니의 아이들을 돌보며 가슴을 찢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몽골에 있는 유족들이 비행기값이 없어 발을 동동구르고 있을 때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비행기값을 마련하였지만 돌아갈 비행기값이 문제라고 걱정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을 먼저 보낸 같은 이주여성 친언니는
서투른 한국말로 동생이 죽었다 불쌍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기만 하였습니다.
손잡아 주고 어깨만 토닥거리다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