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승건(오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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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사이 새벽이 멀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렸습니다. 어제는 잠시 눈을 붙였는데 둥근 해가 떴더군요. 그 허탈감이라니…… 자주 느꼈던 익숙한 감정이지요. 공감하시나요?
오늘은 향기 나는 똥 이야기로 새벽을 열게 돼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시의 밭을 수십년 갈면서 남들이 다루지 않는 소재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똥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난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성이 상실돼 가고 개인이 소멸되는 자본주의와 디지털 시대에 소시민의 존재를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시 제목(원래 시 제목은 연월일을 빼고 숫자만 있는데 이 사이트에는 숫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감안해 읽어보셨으면 합니다)을 숫자로 한 것은 디지털 시대와 인간의 소멸을 이야기 합니다. 이름 대신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증명합니다.
한때 광고에 ‘황금똥을 누는 아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회사 우유를 아이에게 먹이면 황금똥을 누게 된다고 광고했지요. 부족민들은 요즘 화장실에서 어떤 증거를 봅니까.
오늘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행동이 내일의 나를 만듭니다. 오늘 먹은 음식은 내일 화장실에 반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비로 고생합니다. 좋은 음식, 평화한 생각, 숨 막히는 뜀박질이 향기 나는 황금똥을 만듭니다.
마케팅의 대박으로 빼빼로데이라고 부르는 11월 11일에 즈음하여 10여년 전 치열하게 살았던 시심의 한 조각을 꺼내 보고 오늘 저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싸늘한 겨울의 새벽길을 기쁘게 뛰어갑니다.
7부 능선을 힘겹게 올라가는 천복부족민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고지가 바로 저 너머입니다. 알고 계시죠! 발랄한 미소 날리며 종로의 토즈 문을 여는 그 순간 여러분은 이미 챔피언이었습니다.
새벽 공기는 새치름하지만 오늘도 홧팅입니다~ ^__^
1999년 11월 11일
빈들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쪼그려 앉아
똥을 눕니다, 마음을 비웁니다
배추ㆍ무ㆍ고추가 줄 지어 앉았던 자리
알맹이는 뽑혀 밥상으로 즐거운 여행을 떠나고
고추대ㆍ쭉정이가 빈들을 지킵니다
예기치 못한 설사에
알록달록 산행 복장의 바지 내리고
왜소한 궁둥이 깐 채로
세속의 찌꺼기를 연속적으로 뿌립니다
조급한 패스트푸드의 열량으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허겁지겁 떠밀려온 관성의 일상을
속 시원히 버립니다
엉거주춤 쪼그리고 앉아
키 큰 고추대에서 키 작은 고추대로 뛰노는
핼쑥한 초겨울 햇살을 보면서
빈들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쪼그려 앉아
똥을 눕니다
소시민의 울분을 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