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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5일 22시 09분 등록

제갈공명이 두 번째 출사표를 내고 비장한 각오로 힘겨운 위나라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의 이야기다. 제갈공명은 빨리 승패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사마중달은 공명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며 지구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렇게 오장원에서 서로 대치해 있는 가운데 사자들이 자주 오고 갔는데 하루는 중달이 사자에게 물었다.

공명은 하루 식사를 어떻게 하며 일 처리는 어떻게 하시오?” 사자가 대답했다.

공명은 음식은 지나치게 적게 들고 일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일이 처리하십니다.”

 

중달이 말했다.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

사자가 돌아오자 공명은 중달이 무슨 하는 말이 없던가 하고 물었다. 사자가 들은 그대로 전하자 공명이 말했다. “중달의 말이 맞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별을 관측하던 태사관으로부터 장수성이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중달은 공명이 드디어 죽었다고 믿고 공격을 개시한다. 그런데 자기가 죽으면 중달이 공격해올 것을 예견한 공명은 만일 중달이 쳐들어오거든 자신의 등신 인형을 만들어 수레에 싣고 나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쉰 넷이었다. 학창의를 입고 손에는 학우선을 들고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공명을 본 중달은 공명의 계략에 속은 것이라 여기고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중달을 쫓은 것이다.

 

삼국지에서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을 두고 한 말 식소사번(食少事煩)’의 유래다. 당신은 이 고사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일중독자의 참담한 최후가 보인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분주히 일하다 결국 단명하고 마는 일중독자 제갈공명. 그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준비한다. 이 무슨 오지랖인가? 죽어가면서도 그는 얼마나 분주하고 고달팠을까. 공명은 그래도 그리 하지 않고는 편히 눈감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오지랖 대마왕 제갈공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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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 해를 마감하면서 되돌아 보니 내 오지랖 또한 제갈공명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속의 경보 벨을 울린 일은 대학동창 윤희의 결혼 소식이었다. 마흔 고개를 넘은 노처녀 윤희는 내년 2, 내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대학 시절 나와 함께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윤희는 졸업 후 잠깐 회사를 다니다 그만 두고 몇 년 동안 임용고시를 준비하더니 결국 합격했다. 이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발레를 취미로 하며 인생을 즐기는 멋쟁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는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안타까워 작년 봄 친구 영선이의 남편 친구와 만나도록 연결해주고 잊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 그녀의 결혼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한 것이다. 그녀의 문자를 보고 든 첫 번째 생각은 반가움보다는 잘 살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었다. 중매를 세 번하면 천당 간다는 말이 있다. 두 번째 중매가 성공했으니 천당에 더욱 가까워졌을 텐데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이유는 내가 중매한 첫 번째 커플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미선이는 그야말로 발랄하고 발칙한 소녀였다. 고교시절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영화 프리티 우먼을 보러 가기 위해 엄마 옷과 구두, 붉은 립스틱을 챙겨 학교에 온 미선이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정말 신나는 인생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입시 낙방을 시작으로 그녀의 인생에는 이런저런 실패의 경험이 쌓이기 시작했고 서른이 다 되어 갈 무렵 만난 그녀는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그때 내가 여동생 대학 선배를 그녀에게 소개해주었고 그녀는 그렇게 그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경기도 어귀에서 살았다. 가끔 그녀의 집에 가보면 꼬질꼬질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과 그녀 얼굴의 거뭇거뭇한 기미가 그녀를 더 지쳐 보이게 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던가? 중매한 커플의 결혼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잘 살고 있을지 때때로 걱정이 되었다. ‘이건 친정엄마의 마음인데내 오지랖이 태평양을 덮고 우주로 뻗어 나간다. 중매했으니 좋은 옷 맞추어 입으라고 그녀의 결혼식 전에 받은 돈봉투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 걱정의 무게 또한 늘어갔다. 얼마 전 집 근처 할인점 입구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눈가의 주름과 그 주름 아래 기미는 더 늘어나 있었고 마흔을 앞둔 그녀는 이미 마흔 고개를 한 참은 넘어가 있는 듯 했다. 아이를 낳은 후 산후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그녀는 더 이상 발랄하고 발칙한 소녀가 아니었다.

 

윤희의 문자를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또 하나의 업보를 만들었구나. 이제 딸 둘을 시집 보낸 친정엄마의 마음이겠구나.’ 남편은 말한다. ‘중매자가 할 일은 둘을 만나게 해주는 일까지다. 잘 살고 못 살고는 그 둘의 문제다.’ 그렇다. 머리로 생각하면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가슴은 그렇지 않은데 어쩌겠는가? 진정 오지랖 대마왕 제갈공명의 피가 내게 흐르는 것인가?

 

오지랖의 뜻이 궁금해 사전을 찾아 보았다. 오지랖은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말한다. 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안에 있는 다른 옷을 다 감싸버릴 수 있는 것처럼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라면 나는 오지랖 주의보가 필요하다. 누군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면 나는 즉각 솔루션 위원회를 소집한다. 그가 필요한 것이 위로인지 해결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연결해 주고 진행상황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어줍잖은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조언이란 상대와의 감정적 거리가 충분히 가깝지 않으면 비난으로 들릴 수 있음을 나 또한 경험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여간 피곤하지 않다. 죽은 후의 일까지 예견하고 준비하는 제갈공명의 후예이니 들은 이야기를 그냥 넘기기 힘들지 않겠는가? 더욱이 이러한 태도가 나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삼사일언(三思一言)이란 말을 마음에 새긴다. 돌이켜보면 내가 뱉은 말로 인해 남과 나를 불편하게 한 일이 많았다. 분위기를 띄우겠다고 한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 일로 인해 버릇없고 무례한 사람이란 평가를 얻은 일도 있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똑바로 살라며 어줍잖은 조언을 하면서 잘난 척 한 일도 있었고, 딱 부러지는 성격을 내세워 일이든 관계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처리하고 재단하려 했다. 호불호(好不好)가 얼굴과 말투에 극명히 드러나 일을 그르친 적도 있었고, 오리의 다리가 너무 짧다며 늘리려 하고 학의 다리가 너무 길다며 자르려 하면서 주관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윤희의 결혼을 계기로 내 오지랖을 대폭 줄여볼 참이다. 혹 중매자라고 돈봉투를 내밀게 되면 절대 받지 않으리라.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의 의례다. 그들의 결혼 생활과 나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며 나의 책임을 더 이상 가중시키지 않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결혼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다.’라고 되뇌어 본다. 누군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면 그저 잠자코 들어줄 것이다. 스승의 말대로 조언을 구할 때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의 이야기를 힘들이지 않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일을 맡기려 한다면 내가 그 일의 적임자인지 심사숙고 하려 한다. 괜한 오지랖으로 내 몸과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말 한 마디 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리라. 뱉은 말로 인해 마음의 부담을 갖지 않으리라. 나의 휴식은 그렇게 조금씩 삶의 여백에서 솟아 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잘 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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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22:51:38 *.140.216.250

언니.. 오지라퍼... .. 나의 오지랖과는 차원이 다르군..ㅋㅋㅋ..

나는 오지랖을 떨긴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후에는 신경 확 꺼버리는데...

 

둘이 잘 살면 좋은거고, 아님 말고. 뭐 이런 생각으로?? ㅎ

 

중매 해줬으면 받을건 받아야지 언니..ㅎ.. (받아서 이후가 신경쓰이면 안 받는게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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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36:10 *.143.156.74

나도 앞으로 그리 하려고.

잘 살면 좋고, 못 살면 할수없고.

근데 중매해줬다고 뭐 받진 않으려고.

그럼 더 신경쓰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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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1:21:11 *.163.164.179

재키 제동. 재미있게 잘 읽었어.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중달을...."하는 이야기는 알았어도,

식사소번이라는 이야기는 처음이야.

그것으로 오지랖과 자신의 경험을 엮어가며 이야기하는 센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삼사일언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잘 섞이지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재키 제동의 책을 염두에두고 두번째 읽어보았는데

저자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일기를 보는 것 같아.

책이 꼭 독자를 향하는 것처럼 씌여져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야기의 방향을 염두에두고 살짝 틀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네.

 

수고했다. 재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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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03:41 *.143.156.74

오라버니, 식사소번이 아니고 식소사번이여. ㅋㅋ

 

사실 이 글은 내 책의 꼭지글이라기보다는 올 한해를 정리하는 내 일기의 성격이 강해요.

삼사일언을 언급한 것은 내 모든 오지랖이 '말'로 시작한다는 의미지요.

나도 쓰면서 좀 껄적지금했지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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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3:07:30 *.138.53.71

누님, 웨버하느라 일이 많으니 이런저런 고민도 많으셨지요?

그러니 이런 고민도 하게 되는 것일테야.

그래도 꿋꿋이 본인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오지랖 대마왕'을 넘어서!ㅋㅋ

이번 글은 훈형말대로 자아성찰적 느낌이 강한데요.

책 속의 모든 꼭지들이 다 똑같을 필요는 없을테니,

나중에 정리하면서 문체나 톤을 다듬으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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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37:42 *.143.156.74

그래, 경수야.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아성찰 좀 해봤어.

내년에는 더 멋진 재키 제동이 되려구.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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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5:21:41 *.194.110.155

제갈공명을 일중독자로 풀어간 것이 재밌네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도 좋지만 오지랖의 끝을 보여주는 언니의 사례말고 다른 사례를 넣어보는 건 어떨까?

사례만으로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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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04:56 *.143.156.74

제갈공명이 일중독으로 단명하고 죽은 후까지 대비하는 오지랖을 보인 것을 사례로 들었는데 좀 약했나?

미선아, 조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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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7:51:12 *.136.129.27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60권짜리 만화 삼국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중달의 말을 들은 공명은 매우 씁쓸하게 웃으며 "중달이 바로 보았구나"라고 내뱉지요

당시 촉은 어린 유선이 왕위에 올라있었고 인재는 없었으니

공명은 전주에 대한 믿음을 갚을 방법이 없어서 제 몸을 혹사한 거였지요.

그리 혹사하지 않았더라면 공명은 오래 살았을까? 그러면 촉이 통일을 할 수도 있었을까?

어쩌면 유비는 공명이 오래오래 살면서 유선을 보필해주기를 바랬는지도 몰라요.

일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군주로 키워내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르잖아요.

이 부분을 마지막에 연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 나 잘 정리가 안돼.

그냥 일중독자 공명이 생각한 방식과 유비가 바란 것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언니 친구들이 언니에게 바라는 것은 언니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연결하면 어떨까하는 생각.

그냥 나만의 생각이야...ㅋㅋㅋ 뭐 결정은 언니가....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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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07:24 *.143.156.74

오, 루미가 좋은 포인트를 짚어 주었네.

원래 좋은 리더는 시간을 알려주는 리더가 아니라 시계를 만들어주는 리더라더군.

조직원들이 리더가 없어도 시간을 알수 있게 말이야.

공명이 자신의 몸을 더 돌봐서 오래 살면서 유선을 보필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구나.

일중독자 오지랖 대마왕인 사람들이 생각해봐야 할 포인트같다.

루미, 고마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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