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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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
그는 한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로 꼽힌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후진국 개발론’ ‘경제원론’ 등을 강의하다 스물일곱 살이던 68년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다.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88년 가석방되기까지 20년 간 수감 생활을 했다.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며, 한국 사회에 인문학 붐을 일으켰다.
다음은 그가 한 신문사에 특별기고 한 글이다.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을 몸으로 겪어온 그는 다음 글에서 책과 삶, 그리고 사회의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책은 먼 곳에서 찾아 온 벗입니다
책은 벗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반가운 벗입니다. 배움과 벗에 관한 이야기는 『논어』의 첫 구절에도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學而時習之不亦說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수험공부로 맥질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독서는 결코 반가운 벗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헤어지고 싶은 불행한 만남일 뿐입니다. 밑줄 그어 암기해야 하는 독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못됩니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열고,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비약(飛躍)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를 집필한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필자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발 딛고 있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우리시대의 문맥(文脈)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험공부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마 교양을 위한 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교양독서 역시 참된 독서가 못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양독서는 대개 고전독서이기도 합니다. 고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필요합니다. 고전은 인류가 도달한 지적 탐구의 뛰어난 고지(高地)들이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과거와의 소통도 어렵고 동시대인들과의 소통도 어렵습니다. 돈키호테와 햄릿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언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통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인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어떤 중세기사의 이야기가 아니며, 햄릿은 덴마크 왕자의 개인적인 비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탈 중세(脫中世)의 전개과정이나 인간 존재의 운명적 비극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교양이나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경우 자신을 확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것이 됩니다. 독서는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읽고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를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와 맺고 있는 사회역사적 관련성을 성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사철(文史哲)을 공부하는 까닭은 그것을 통하여 깊이 있는 세계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서화(詩書畵)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사철이 언어(言語), 개념(槪念), 논리(論理)로 인식하는 것임에 비하여 시서화는 이를테면 소리와 빛으로 소통하는 뛰어난 세계인식입니다. 문사철 방식에 비하여 시서화의 방식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는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는 이 시서화의 세계마저 영상서사(映像敍事)로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책과 종이 그리고 독서의 종말을 예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사철이든 시서화든 영상이든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든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핵심입니다. 그러한 성찰만이 우리의 삶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영상서사는 그것의 뛰어난 대상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성찰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문학서사(文學敍事)가 요구하는 독자의 자신의 고뇌와 성찰이 사라지고 독자로 하여금 복제와 카피라는 대단히 안이한 자리에 나앉게 함으로써 우리들을 또 한 번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의 장구한 지적 탐구를 통하여 키워온 그 치열한 성찰성에 주목하고 다시 한 번 독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책들이 반드시 당대의 최고의 지적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사의 전개과정이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모든 미래지향 역시 지금까지의 역사를 디딤돌로 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독서와 문학서사는 최근의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발 딛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 그 자체이며 무형의 문화유산입니다. 언어 개념 논리라는 쉽지 않은 인식 틀을 키워온 인류의 정신사는 그것이 비록 세계인식의 최고형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지적 탐구를 뒷받침해 온 탄탄한 초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의 핵심이 바로 성찰(省察)입니다. 성찰은 철학적 추상력(抽象力)과 문학적 상상력(想像力)을 양 날개로 하는 자유로운 비상(飛翔)이며 조감(鳥瞰)입니다. 이러한 비상과 조감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의 재구성이 바로 성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여정을 내려다보는 창공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성찰과 비상이라는 지적 여정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독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여정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더 좋은 책, 더 좋은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미 새의 체온과 바람과 물 그리고 수많은 밤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어느 날 아침 문득 빛나는 비상으로 날아오릅니다. 고뇌와 방황으로 얼룩진 역경의 어느 무심한 중도 막에 그 때까지 쌓아온 회한과 눈물이 어느 순간 빛나는 꽃으로 피어오릅니다. 독서도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고뇌와 성찰의 작은 공간인 한 언젠가는 빛나는 각성(覺醒)으로 꽃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독서는 만남입니다. 성문(城門) 바깥의 만남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는 자신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남인 한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바다를 향하여 달리는 잠들지 않는 시내와 같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사회적 각성으로 비약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을 깨트리고, 우리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드넓은 세계로 향하는 길섶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굳이 새해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동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일출은 도처에 있습니다. 반가운 만남과 성찰을 쌓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찬란한 일출은 있습니다. 새해의 빛나는 성취를 기원합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두 번 읽기에 들어온 글귀 - 보라색
1장 서론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24]
➜ 과거의 발자취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을 보여 줄 지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나의 하루하루가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4]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37]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41]
➜ 인성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관계 안에서 얼마나 잘 조화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구나.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2]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42]
➜ 더불어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남을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만이 아니라 남을 성장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말인가 보다.
인본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동양 사상에 관한 설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존재存在와 인식認識 일반의 존재 형식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그 존재 형식에 내재하는 관계론적 구조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44]
2장 오래된 시時와 언言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 입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62]
➜ 바람이 불 때 꼿꼿이 서 있지는 못하지만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풀처럼 고난 앞에서 꺾이지만 않는다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지.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무엇보다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2]
➜ 삶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삶의 순리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있다면 좀 더 삶에 공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75]
➜ 불편함이 없다면 발전도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77]
➜ 나의 미래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닌 결국 내 내부로부터 나의 과거로부터 오는 것임이 당연한데도 늘 잊고 산다.
3장 『주역』의 관계론
바닷물이 뜨는 그릇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89]
➜ 지금 세상은 두려운 것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져 점점 더 포악해 지나보다.
위位와 응應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101]
➜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자리를 먼저 찾기에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2]
지천태地天泰
象曰 拔茅征吉 志在外也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
띠풀을 뽑듯이 떨기로 가야 길하다는 뜻입니다. 띠풀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풀입니다. 한 포기를 뽑으려 하면 연결되어 있는 줄기가 함께 뽑힙니다. 모든 시작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창건이든, 회사 설립이든, 또는 전위 조직의 건설이든 많은 사람들의 중의(衆意)를 결집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형제와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111]
➜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미약하다.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발전도 미비할 뿐이다.
산지박山地剝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3]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4]
➜ 역경을 벗어나는 것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에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를 비우고 투명하게 드러난 나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겠지.
화수미제火水未濟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127]
➜ 실수하지 않고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127]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28]
➜ 결과가 단번에 나오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결과의 성패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다.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이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으면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129]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131]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
그런 점에서 『주역』의 범주는 그것이 판단 형식이든 아니면 객관적 존재에 대한 진술 형식이든 그것이 망라하는 세계는 결과적으로 왜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132]
4장 『논어』, 인관관계론의 보고
배움과 벗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144]
➜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운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의 기쁨도 느낄 수 없는 것.
옛것과 새로운 것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0]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4]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156]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6]
➜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지하철 막말녀, 막말남들이 나오는 것 또한 관계의 일회성에서 오는 것이겠지.
공존과 평화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165]
➜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서로 동화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처럼 관계에 대한 배려를 감성적 차원에서 완성해 놓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좌우명으로 걸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8]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 말에 쉰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내용 자체를 인간적이고 덕성스럽게 영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복지 문제를 삶의 문제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171]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175]
➜ 표면적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안 깊이까지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임에 비하여 사思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 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181]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182]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183]
➜ 한 분야를 깊게 아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이고 그 와 관계된 모든 것을 두루 알고 있어야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7]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188]
➜ 욕심을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시야를 흐리게 만드나 보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을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199]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
5장 맹자의 의義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同類라는 안도감과 동감同感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久遠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것이지요. 유행流行이 바로 동류와 동감의 현실적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정서입니다. 이를테면 소외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독락의 정서는 오히려 개별 상품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차별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219]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인仁이란 하늘이 내려준 벼슬이며, 사람의 편안한 거처이다.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인을 행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며, 무례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남의 부림을 받으면서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열심히 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231]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지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3]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42]
➜ 피상적인 관계는 책임감을 자연스럽게 회피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248]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개 사내(一夫)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249]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249]
➜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대우도 달라지는 것.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50]
➜ 타인이 나를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의 시작은 스스로를 그만큼 무시했기 때문이구나.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269]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269]
뼈를 튼튼히 해야
『노자』독법의 기본은 무위입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283]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288]
빔이 쓰임이 됩니다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3]
➜ 소비가 미학이 된 세상에서 내 손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어떠한 과정이 거쳐 들어오게 되는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299]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이란 글씨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301]
➜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모든 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맷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 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됩니다. [301]
➜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지만 단지 수단일 뿐이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공감을 통해 경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302]
7장 장자의 소요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
“옷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법, 옷이 있다면 그 역시 옳지만 옷이 없어도 그 역시 옳은 것입니다. 새는 날개가 있고, 짐승은 털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이와 가지는 맨몸뚱입니다. 이를 일러 ‘저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며, 이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315]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면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우환이 없어질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큰 근심이 많겠는가.[326]
➜ 자꾸 뭔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깊게 바라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28]
➜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험이 수반되어야 하나보다.
부끄러워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332]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집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334]
➜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너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목표 하나에 담으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입니다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338]
➜ 이론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느라 정작 소중한 경험의 기회들을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빈 배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 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343]
➜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 지지 않을까?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득어망전’得魚忘筌이든 ‘득어망망’得魚茫網 이든 고기를 잡고 나면 그 고기를 잡는 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亡魚得網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를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望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6]
8장 문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제濟나라와 진晉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제후국이었으나 전쟁을 통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백성이 많은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공전을 예찬하는 논리가 있지만 묵자는 단호하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서너 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良醫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몇 개의 전승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전 국가의 비극과 파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쟁은 인명과 재산의 엄청난 파괴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묵자는 전쟁의 파괴적 측면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380]
그래서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82]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6]
➜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세상에 진정 공을 세운 자들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슬프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하늘일 뿐
하늘에는 변함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요순 같은 성군聖君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걸주와 같은 폭군暴君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르게 응하면 이롭고 어지럽게 응하면 흉할 뿐이다. 농사를 부지런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비축하고 때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병들게 할 수 없으며, 도를 닦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406]
➜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 앞에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상황에 맞추어서 하다보면 조금은 더 순탄하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하여 겨울을 거두어가는 법이 없으며, 땅은 사람이 먼 길을 싫어한다고 하여 그 넓이를 줄이는 법이 없다. 군자는 소인이 떠든다고 하여 할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하늘에는 변함없는 법칙이 있으며, 땅에는 변함없는 규격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변함없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407]
➜ 삶의 순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사가 지금 느끼는 것 보단 덜 고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418]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나는 말한다. 학문이란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컴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422]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422]
➜ 행동하지 않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보다.
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433]
탁과 발, 책과 현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2]
➜탁에만 집착하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많이 놓치게 된다.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보다 못한 법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8]
➜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면 어떤 감동도 줄 수 없는 것.
11장 강의를 마치며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 봅시다. 한 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74]
➜ 그 무엇하나 저절로 생겨난 것은 없는데도, 내게 당장 소용되는 것이 아니면 너무 하찮게 여기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相摩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478]
➜ 세상 모든 것이 나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 질 수 있겠지.
이학理學에 대한 심학心學의 비판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연속과 단절, 계승과 비판이라는 중층적 과정을 경과하는 것이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지만 이처럼 복잡한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적 입장과 실천적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창신創新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504]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05]
➜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미래의 내가 어떤 꽃을 필수 있을지 알 수 있을 테고 미래의 꽃을 보면 과거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삶이 거짓말을 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슴에 두 손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 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09]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적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509]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어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0]
3. ‘내가 저자라면’
두 번 읽어도 이 책은 여전히 어렵다. 글 자체가 딱딱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이 어렵다 보니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워낙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고전은 한 두 번 읽는 다고 해서 익숙해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이 책 한권으로 고전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것은 좋았다. 중간 중간 원문 그대로 옮겨놓은 한자에 음을 달아주면 조금은 더 친숙하게 원문에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계의 중요성을 모든 고전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점점 피상적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점이 좋다.
이 책을 읽고 고전에 대한 흥미가 생겨 좀 더 자세히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각 고전을 읽는 팁과 같은 것에 대한 설명도 곁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하는 중간 중간에 고전을 통해 본 현 시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들어가 있는데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전을 통한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더 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 몇 천 년을 거슬러 지금에까지 읽히고 있는 고전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의 모양만 변했을 뿐이지 그 중심은 어느 시대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이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마지막 강의를 마치며 라는 부분에 우리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경각심을 울릴 수 있는 작가의 시선으로 마무리 하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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