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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 최성환
비평가 김화영 선생에 따르면, 하루 중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있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순간이 발생하는데, 바로 그 시간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이 시간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라고 하기엔 밝음의 강도가 약하고 밤이라고 하기엔 어렴풋하게나마 사물의 형체가 구별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옮아가는 ‘불분명한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개와 늑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시간적 공간적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간이다. 이 불분명한 경계는 때로 늘 익숙하던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혼돈이자 불안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라고 할 때의 저 파스칼적 공포 역시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
요컨대 문학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미묘한 변화의 조짐,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섬뜩한 느낌, 순간적인 섬광, 시선, 숨결, 냄새, 소리, 촉감과 같은 매우 미세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어떤 ‘멈칫거림’의 기억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간혹 이 느닷없는 멈칫거림과 조우하기 위해서 문학과 대면한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놓치기 쉬운 시간, 즉 오후 다섯시부터 여섯시 사이, 인생에 대해 막연히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 그 시간들을 되돌려준다.
따라서 이런 말도 가능할 것이다. 문학이란, ‘어두워진다는 것’이라고. 나희덕 시인은 말한다. 산다는 건 “5시 44분의 방이/5시 45분의 방에게/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몸을 비추던 햇살이/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안다. 어두워지는 순간, 대낮의 밝음과 한밤의 어둠이 동시에 명멸하며 인생의 비의를 문득 드러낸다는 것을. 아마도 문학은 그 시간을 향해 난 좁은 창일 것이다.
- 신수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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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는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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